25년차간호사에게 생동하는 새봄의 기운이 넘친다. 환자들의 손만 잡아줘도 혈압이 ‘뚝’ 떨어지니 하루하루가 즐겁단다. 토요일 의료봉사가 데이트처럼 설레어 달력을 ‘월화수목금봉일’로 바꿔놓았다. 원내방송을 만들었고 CS교육도 앞장선다. 일 하는 재미가 꿀맛이요 병원이 천국이라는 그녀. 해피바이러스를 간직한 나이팅게일, 김경희 간호차장을 만났다.
서울에서 반도의 땅을 가로질러 남쪽 끝으로 향하면 순천이다. 순할 順, 하늘 天. 이름 그대로, 하늘의 기운이 순하다. 도시 전체에 만물을 감싸는 온화한 파장이 흐른다. 주변으로 완만한 산세가 둘러진 풍광이 아늑하고 순천만에서 불어오는 촉촉한 공기는 약숫물처럼 상큼하다. 번잡함이 없고 기품 있는 생태도시 순천. 물 좋고 산 좋은 그곳에 인심 넘치는 건 당연지사일 터.
‘따뜻한 사람들’을 표방하는 순천병원에서도 유독 따뜻한, 아니 뜨거운 열정으로 뭉친 간호사가 있으니 김경희 간호차장이다.
아들 딸도 ‘엄마’ 뒤 이어 간호사로
“이 직업이 할수록 너무 좋아요. 제가 만날 행복하다 좋다 그러니까 아들이 간호대에 들어가더라고요. 고3 딸도 간호대를 준비하고 있고요.”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직업 정도가 아니라 자식들이 자원해서 간호사의 꿈을 키운다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김경희 씨는 80년도부터 간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타 병원에서 5년을 보낸 이후 86년부터 순천병원을 지키고 있다. 근속년수 25년차. 처음엔 겁 없이 시작했는데 10년 지나고 20년을 지나자 “점점 간호사란 사실이 자랑스럽다”며 환자들이 약이 아니라 따뜻한 말 한마디에 낫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어르신들에게 잘 주무셨어요? 피부가 좋아지셨네요! 한마디만 해도 혈압이 뚝 떨어지고 당도가 뚝 떨어져요. 할아버지 환자들에게 허물없이 ‘오빠’라고 불러드리면 병실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죠. 옆자리 할아버지가 나한테는 왜 안 부르냐고 질투도 하시고요.(웃음)”
이것이 바로 그녀가 간호사란 직업에 자긍심을 갖는 이유다. 상대방에게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대하면 바로 상태가 좋아지니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는 것. 간호사의 경륜이 깊어질수록 보람도 크다. 전문적인 의학상식을 일방적으로 전하는 게 아니라 그간의 오랜 경험에 녹여 설명하면 환자가 금방 이해하고 믿어준다고 한다.
또한 선후배나 동료들을 보더라도 ‘간호사’라는 직업은 매력적이다. 간호사는 아픈 사람, 나보다 약한 사람을 보살피는 직업이라 배려가 몸에 배어있다. 여름에 수박 하나를 자르더라도 위생과 편의를 고려한다. 대소변 치우기 등 힘든 일도 척척 해낸다. 응급상황에서 일하니까 위기 해결능력도 뛰어나다. 마음씨 따뜻하고 생활력이 강하니 간호사는 며느리로도 최고라고 엄지손가락 치켜세웠다.
따뜻한 말 한마디로 ‘혈압 뚝! 당수치 뚝!’
“한번은 기차에서 방송이 나오더라고요. 만삭인 산모가 탔는데 진통이 온다고 의료관계자 있으면 몇 호차로 오라고요. 산모의 진통 주기를 재고 분만실에서 겪은 얘기를 해주면서 서울 갈 때까지 손을 꼭 잡고 옆에 있어주었어요. 그럴 때 보람을 느끼죠.”
김경희 씨는 조산사다. 분만실 경력 5년. 그동안 받아낸 신생아만 해도 천여 명이 넘는다. 원래 아기를 너무 예뻐해서 어디서나 아기를 보면 만지고 싶어서 그냥 못 지나간다고 터놓는다. 갓난아기부터 어르신까지, 남녀노소 불문하고 누구나에게 사랑을 베풀고 그런 만큼 사랑을 받고 있다.
이는 타고난 밝은 심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꾸준한 봉사활동으로 다져진 후천적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녀는 2004년에 순천병원 봉사단을 발족시켰다. 지금까지 매주 토요일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가장 열성적으로 활동한다. 지난주 토요일에는 86세 독거어르신 집에 가서 도배와 장판을 새로 해주고 이야기를 나누고 왔다며 ‘봉사 중독론’을 편다.
“봉사는 참 이상해요. 마치 아침마다 마시던 커피 안마시면 허전하듯이 봉사도 빠질 수가 없어요. 아예 월화수목금‘봉’일로 알고 살아요. 한 4,5년 하니까 바퀴 돌아가듯이 저절로 되더라고요. 언뜻 봉사가 시간 뺏기고 손해 보는 거 같지만 얻는 게 훨씬 많지요. 어르신들이랑 수다 떨고 나면 기운이 솟아서 얼굴이 탱탱볼이 돼서 온다니까요.”
봉사팀, 방송팀 만들어 친절문화 확립
봉사 얘기만 해도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그녀. 봉사는 자신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긍정의 힘에서 출발한다며 공존의 철학을 배운다. 가슴을 덥혀주는 ‘보약 한 첩’ 먹은 효과라고 자랑한다. 지역주민들이 순천병원을 기억해주고 직원들을 기다리고 고마워하니까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봉사는 또한 동료 간의 관계증진에 최고다. 같은 병원에 있어도 업무가 다르면 얼굴 한 번 보기 힘든데 함께 의료봉사를 다녀오면 금방 절친해지고 업무협조도 잘 된다. “봉사한 사람끼리는 어려운 부탁도 거절을 못한다.”며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다.
인정도 많다. 그 좋은 봉사의 축복을 혼자만 차지할리 없다. 봉사를 다녀오면 항상 소감과 추후 일정을 담아 직원들과 단체메일로 공유한다. 그렇게 작성한 글이 두툼한 파일로 세 권이다. 나중에 책으로 엮을 계획이라는데, 역시나 수필집을 읽는 듯 감성과 은유 넘치는 문체가 마음을 움직인다. 이런 식이다.
‘이번 주 우리가 찾는 이곳의 하늘은 혹시 우리를 기다리는 첫눈이 뭉쳐있을 수도..아니면 금방 쨍 하고 깨질듯한 바다유리 같은 하늘 창이 드리워져 있을지도..그것도 아니면 자식들 손녀들이 보고 싶어 눈가 짓무른 군고구마 냄새 나는 할매들이 기다릴수도.. 자원봉사 1조 꿀벌팀 윙윙 거리며 모입시다.’
이 같은 투명한 감성으로 그녀는 참 많은 일을 해냈다. 8년 전부터 병원 방송반 ‘꾀꼴팀’을 창단, 아침방송을 통해 CS친절교육을 시행했다. 1996년부터 지금까지 병원 대표 친절강사로 활약한다. 2004년에는 남부권 권역의 CS강사로 발탁되어 대전중앙병원, 창원병원 등을 순회했다. 또한 칭찬릴레이를 최초로 제안해 현재는 전 소속기관에서 시행 중이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벅찬 이 모든 일들은 반짝이는 창의력과 솟구치는 열정에서 시작됐고, 순천병원의 밝고 건강한 직장만들기 풍토에 기여했다.
그녀의 적극적인 활동 덕분에 지난해 순천병원은 산재의료원 산하 9개 병원 중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순천병원 차원의 경사 외에도 개인적으로는 2005년 산재의료원 나이팅게일상 수상을 가장 큰 기쁨으로 꼽았다.
2005년 산재의료원 나이팅게일상 수상
동료들 사이에서도 인기 만점이다. 주화순 간호부장은 “낯선 상대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인간존중이 몸에 배였다. 말을 참 예쁘게 해서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녀를 평가했다. 이영희 수간호사는 “전남 신안 안자면의 공주라고 자칭 말하는 차장님은 가정생활도 화목하고 회사에서도 늘 에너지가 넘쳐 주위를 밝게 한다.”고 전했다.
“같은 일이라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수용태도에 따라 결과는 다른 거 같아요. 후배들 보면 밤근무를 힘들어하는데 전 너무 좋았어요. 모두 자는 시간에 혼자 깨어 있는 그 시절이 제 인생에서 언제 또 있겠어요. 밤이 아니라 내 인생 그 자체를 즐기면서 일했어요. 심야라디오를 참 많이 들었어요. 라디오에 사연 보내서 선물도 많이 받았어요.”
까만 밤을 음악과 함께 하얗게 지새우던 꿈 많던 새내기 간호사는 어느덧 5년 후 정년을 앞두고 있다. 이미 퇴임 이후 계획을 멋지게 세웠다. 국제봉사단체에 가입해서 아프리카로 2년 간 봉사활동을 떠날 참이다. 그를 위해 요즘 틈틈이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좋은 간호사되는 법’에 대한 조언을 부탁했다.
“절대 자기 혼자만 좋으면 안 돼요. 항상 내 옆에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하면 진짜 좋은 간호사가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