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인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은 온다’고 했다. 김선혜 씨는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다르게 살 자신이 없을 때 마흔이 되었다.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는 가이드라인을 그어놓고 음악치료사의 길로 뛰어든 그녀. ‘음악’이라는 예술과 ‘치료’라는 과학, ‘봉사’라는 뜨거운 가슴이 어우러져 ‘희망의 삼중주’를 연주 한다
영혼의 동요를 잠재우는 영약(靈藥)을 드립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친 김선혜 씨는 크로마하프도 배울 만큼 음악에 대한 재능이 남달랐다. 그러나 경제적 부담과 불투명한 장래성을 이유로 음대진학을 포기하고 사학과를 택했다. ‘피아노 치는 역사선생님’이 된 그녀는 4년 간 교편을 잡다가 육아에 전념키 위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전업주부가 되어 집에만 있었지요. 아이들 키우느라 정신없이 보냈는데, 어느 날 문득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허전했어요. 가정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어렵고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 하자고 생각했죠.”
오랜 신앙생활로 믿음이 깊었던 그녀는 하나님께 받은 선물을 다시 이웃에게 돌려준다는 원칙을 세웠다. 자신의 재능을 살리는 음악분야의 일로 가닥을 잡은 것. 그러나 시작보다 더 불안한 일은 없다. 자꾸 ‘나이’가 발목을 잡았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두렵고, 너무 늦은 건 아닐까”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앞날을 생각하면 이번이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였다. 신념이 있을 때 젊고 주저함이 있을 때 늙는다고 했던가. 평생 봉사하기로 결심한 이상 제대로 하자고 마음먹자, 거짓말처럼 나이가 많지 않게 느껴지더라는 김선혜 씨. 그녀 앞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무엇에도 마음이 홀리지 않는다는 불혹의 나이 마흔. 그녀는 세종대학교 예술치료학교에 입학했고, '음악치료사'에 미혹되었다.
익명의 분노를 풀다엄마 등에 업혀 듣던 36.5도의 따스한 울림은 우리 몸에 새겨진 음악의 첫 기억이다. 어느 뮤지션의 광신도가 되어 음악으로 인생을 배우는 사춘기를 지나 생의 리듬에 춤출 때 음악과 건배하며, 발아래 유리조각이 밟힐 때 알약처럼 음악을 삼킨다. 우리를 살게 한 불로장생의 영약 ‘음악’이 본격적으로 ‘하얀 가운’을 입었다.
“음악치료사는 리듬, 멜로디, 악기연주 등 음악적인 요소를 이용해서 내면의 갈등, 응어리, 분노를 끄집어내도록 돕는 사람이죠. 심리치료를 통해 신체활동을 개선시킵니다.”
김선혜 씨의 설명이다. “3년 전 음악치료 때의 일입니다. ‘이 몸이 새라면’이란 곡을 ‘새’ 대신 ‘집’을 넣어 부르는데 할머니 한 분이 갑자기 ‘아들이 집을 부수는 소리가 난다. 철거소리가 난다’며 큰 소리로 우셨어요.”
평소 그 할머니의 아들은 효자로 소문이 나 있었다. 할머니가 왜 그런 환청을 들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억압정서가 있고, 그런 감정의 응어리가 밖으로 분출되는 것이 바로 음악치료의 효과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유럽 등 복지 선진국에 비하면 음악치료사가 아직 걸음마 단계이다. 학부에는 개설학과가 없고 일부 대학원에서만 음악치료를 가르치고 있다. 복지시설이나 병원에서도 인건비 부담 등을 이유로 사회복지사가 음악치료를 대신하는 실정이다. 이는 인식부족에 따른 것이지만 점차 외국에서 음악치료를 공부한 사람들이 많이 돌아오고 있고, 사회적관심이점차 확대되는 추세라서 전망은 밝다고 한다.
이름을 부르다“그동안 주로 어르신들과 일했어요. 중간에 1년 동안 자폐아들과 일대일 음악치료를 했는데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정리했죠. 저는 어르신들과 일하는 게 좋아요”
노인소외와 고령비하를 염려하는 세상에서 자발적으로 어르신들을 찾고 할머니 할아버지 한 분마다 이름을 살갑게 불러드리는 그녀는 유별나다. 파킨슨씨병을 앓는 할머니가 몸이 불편해서 음식을 잘 흘리면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닦는다.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 다행이라더니, 가끔은 그런 스스로가 기특하다고 수줍게 웃는다.
어릴 때 할머니 손에서 자란 그녀는 엄마는 “어머니” 라고 불렀지만 할머니는 “할매”라고 불렀다. 그 할머니가 95세까지 장수하셨다. 허리가 반으로 굽고 몸이 불편하셔서 수발을 들어야했고 온전히 그녀의 몫이었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다른 어르신들께도 허물이 없다. 한 번은 직접 이름을 써서 할머니 할아버지 서른 분께 하모니카를 선물했다. “착각인지 모르지만 그래서 어르신들도 저를 좋아하는 것 같다.” 사랑을 믿는 그녀는 행복하다.
아픔과 공명하다김선혜 씨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나온 피아노 선생님의 단아한 차림새다. 음악치료사가 참 어울린다는 생각으로 마주했으나 “그 일이 ‘우아한 직업’이란 선입견은 오해”라고 강조한다.
“현장에서 일할 때 정신적, 육체적으로 소모가 무척 많은 ‘힘쓰는 직업’ 이에요. 현재 지역 복지관 대부분이 음악치료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번 일하러 갈 때마다 무거운 악기가방을 챙겨가야 해요.” 또 이론적 지식만으로 일을 감당하기 힘들 때가 많다. 몸과 맘을 맞대고 일해야 한다. 그런데 몸이 불편하신 치매 어른들을 모시다보면 당황스러운 경우가 더러 생긴다. 이성적으로 이해하지만 처음엔 서운했다. 물론 지금은 웃어넘기지만 말이다. “사명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에요. 한 사람마다의 아픔에 집중하고 공감해야 진정한 치유가 됩니다.”
이제 어떤 상황에도 ‘기분’ 보다 치유의 ‘의지’가 먼저 반응하도록 단련되었다. 시어른들이나 친정 부모님께도 더욱 잘하게 되었다. 밖에 나가서 어르신들한테만 잘하고 집 안에서는 못한다면 양심에 부끄러운 일이이기 때문이다.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행동을 바로잡게 된다는 김선혜 씨는, 타인의 아픔과 공명하는 사이 자신도 덕을 본 것 같다고 한다.
삶에 경배하다 그녀는 바쁘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치매노인 요양소 ‘너어싱홈’과 하남에 있는 ‘장애인 직업학교’에서 음악치료를 담당하고, 분당 노인주간휴게소 ‘은학의 집’과 교회 노인학교에서는 자원봉사로 일한다. 또 미금 YWCA에서 크로마하프도 가르친다.
삶에 탄력이 붙기 시작한 김선혜 씨는 올해 초 사회복지 대학원 과정을 시작했다. 음악치료를 가르쳐준 교수님들과 공저로 [노인정신건강과 음악치료]라는 책을 냈다. 앞으로는 민요와 전통악기를 직접 배워서 음악치료에 접목시켜볼 계획이다.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로 모든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노년기가 행복하길 소망한다.
‘바쁘지만 돈이 없는 마누라’를 묵묵히 지지해주는 남편은 항상 든든한 후견인이다. 대학원 입학 때 남편이 등록금은 이번만 내주고 다음부터는 직접 벌어서 내라고 했는데 면목 없게 생겼다며 웃는다. 대학원에 진학하자 고1, 중2에 재학 중인 아이들의 시험 때 나란히 공부하는 것도 즐겁다. 아이들도 엄마를 자랑스러워하지 않을까? 남자 애들이라서 살가운 표현은 안하는데 한 번은 작은애가 넌지시 묻더란다. “엄마, 재밌으시죠? 보람을 느끼시죠?”
하루하루가 바쁘다 보니 아이들에게 잔소리할 시간이 없어진 것도 아주 좋은 점이라고 덧붙이는 김선혜 씨. 사는 일의 행복감에 출렁이는 그녀의 눈빛은 말한다. 생활과 화해시켜준 음악에게 고맙고, 이 세상 모든 늙은 어르신들께 경배 드린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