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낭소리>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든 것은 두 분의 입이다. 하루에 한 마디를 채 안 하는 할아버지의 꾹 다문 고집스러운 입. 마치 노동요처럼 신세타령이 구성지게 이어지는 할머니의 한탄스러운 입. 그리고 한평생 논매고 밭 가느라 구두 뒤축 닳듯이 닳아버린 투박한 손이 보였고, 뼈마디가 톡 끊어져버린 뼈 빠지게 일한 할아버지의 앙상한 발, 대나무같이 파리한 다리가 눈에 걸렸다. 수만 개 태양의 흔적이 남긴 잡티와 검버섯으로 뒤덮인 할머니의 거무튀튀한 얼굴까지. 두 어르신의 몸의 부분별 잔상이 오래 남았다. 무슨 고흐의 그림을 보듯 빨려들었다.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담은 <송환> 때도 그랬고, 싫지 않았다. ‘늙은 얼굴’을 영화가 아니면 그렇게 오래토록 부분 확대해서 들여다보고 있을 기회가 사실은 없다. 내 아버지나 지하철 경로석에 앉아 계신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면 그만 측은해서 고개를 돌리고 마는데 영화는 그들의 늙음이 불편하지 않다. 심지어 도토리묵 표면처럼 자글자글 새겨진 주름과 흙탕물 튄 것처럼 검버섯이 번진 그분들 얼굴에 대해서 ‘주름에 관한 영상미학’이라는 그럴듯한 수식어도 붙여본다.
한평생 감옥에서 늙은 할아버지와 논밭에서 늙은 할아버지. <송환>할아버지와 <워낭소리>할아버지.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뜻과 땅을 지키며 ‘자연스럽게’ 살았다는 것일 게다. 맑음과 떳떳함. 시류에 타협하지 않고 본성에 충실했다. 굽힘 없는 소신, 하지만 버드나무처럼 유연하고 맑고 푸른 삶. 늙었으되 시들었다는 느낌이 없다. 천진해보이기까지 한 이유일 것이다. <송환>의 김동원 감독은 장기수 할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가 만났던 장기수분들은 우리 기준으로 불행한 사람, 지독한 사람입니다. 그래야되는데 편안해 보인다는 거죠. 당당함보다는 맑아 보이는 거죠. 보통 일흔 살 이상 할아버지들이 찌들리고 의욕 잃은 모습인데, 보아왔던 할아버지들에 비해 훨씬 맑은 표정이 읽혀졌어요. 반했죠. 나도 나이 먹어서 저런 얼굴, 저런 눈빛을 할 수 있을까. (할아버지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유혹이든 신념이든 "아닌 건 아니다."라고 예기할 수 있다는 것이죠. 최소한 그것만 있어도 늙은 이가 됐을 때 떳떳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요."
<워낭소리> 할아버지는 이가 몇 개 남아 있지 않았다. 틀니가 없는지 있는데 안 낀 건지, 처음엔 ‘자식이 아홉인데 틀니도 안 해드렸나’ 하는 생각이 들어 찹찹했다. 하지만 곧 이가 대여섯 개나 남았나 싶은 할아버지 입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오히려 앙상하게 움푹 패인 할아버지 얼굴에 미스코리아 웃는 입처럼 희고 가지런한 치열이 드러나면 그것이 더 징그러울 것 같다. 느려터지고 늙어빠진 소를 타고 터벅터벅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는 할아버지는 이가 온전치 못한 것이 더 온전한 것이었다.
그래. 나이가 들었으면 소화기능도 떨어지고 어차피 많이 먹지도 못하시더라. 그러니 아기가 이유식을 시작할 때 밥풀 같은 이가 잇몸을 뚫고 나듯이 또 나이가 들면 필요한 만큼만 이가 남는 것인가 보다. 허물어진 폐허같은 노부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력그림같은 완벽한 풍광에 폭 잠겨 있는 모습이 마치 한 송이 들꽃이나 바위처럼 참 잘 어울렸다. 헌데 만약 그 자리에 보톡스 맞고 주름 제거하고 명품가방을 든 신식 할머니와 검은 세단이 있었으면 얼마나 겉돌고 어색했을까.
자연스럽게 늙는 것, 곧 아름답게 늙는 것. 그리고 그 소처럼 나를 다 쓰고 죽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도시의 회색 콘크리트 건물을 전전하며 한평생 살다가 하얀 병동에서 한 포씩 개별포장된 약을 한주먹씩 털어놓으며 명을 늘이거나 노인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의 보살핌을 받다가 아마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좋은 음식과 좋은 병원이 너무 많아 적당한 때에 죽을 자유가 없어졌으니까. 빼앗겼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모 그룹에서 천문학적 예산을 들여 지은 ‘고품격 리조트형’ 노인요양원에 취재를 갔다. 한나절을 앉아서 ‘아름다운 노후의 꿈이 이뤄지는 국내 최고의 시설’의 설립취지와 의의와 배경과 시설을 소개하는 글을 썼더니 토가 나올 것 같다. 사는 일에 역겨움. 정말 입이 벌어지는 시설이었지만, 억 소리 나는 돈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고, 설사 돈이 있어도 그런 곳에 장기투숙객이 되어 생을 마감한다는 건 한없이 쓸쓸한 존재사건이다.
그곳이 ‘아름다운 노후’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노후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이가 다 빠지고 손톱밑이 새까맣게 뭉그러져도 추하지 않는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 채식주의와 명상과 요가와 걷기 같은 웰빙 레시피가 답인가. 집 팔아서 세계여행 하며 티끌만한 존재를 자각하고 우주의 진실을 캐야하나. 김수환 추기경처럼 죽고 난 다음에 유품이 서너 가지만 남으려면 가계부를 써서 무분별한 소비와 물욕을 줄여야할까. 박경리 선생님처럼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라는 유고시집을 내려면 자연으로 돌아가서 밭 일구고 글 쓰며 살아야 하나.
어렵다. 이럴 때마다 아름다운 삶이 있을 뿐 아름다운 노후는 없다는 결론으로 번번이 도피하고 만다. 삶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시간이 역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 이상 분노하지 않는 일일 게다. 삶(죽음)에 '저항'하지 않는 것 말이다. 니체의 운명애는 삶에 순응할 것을 명령한다. 이것은 운명론적 체념과는 다르다.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권리를 선택하고 분투하는 끊임없는 자기극복이자 자기창조의 행위가 운명애다.
<송환>에 이어 <워낭소리> 를 통해 어르신들께 '삶(죽음)'에 대해 한 수 배운다. 자연 '속에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살다 가는 삶을 고민하게 됐다. 아닌 건 아니다라고 말하는 행위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사는 동안은 열심히 긍정하고 치열하게 부정하면서 촌스럽게 살아야겠다. <송환>의 할아버지처럼, <워낭소리>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말싸움 혹은 기싸움의 장면처럼 (늙은 소를) "팔아!" "안 팔아!" 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생소리를 내면서 말이다. “오, 나의 영혼이여, 나는 네게 폭풍처럼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와 구름 한 점 없이 확 트인 하늘이 그러하듯이 ‘네’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