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주택복권이 나오던 시절, 인생역전을 노리며 매주 복권을 사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지갑에는 항상 1억 원 상당이 들어 있어." 틀린 말은 아니다. 결과를 보기 전까지 복권이 1억 원의 가치를 갖는 건 사실이니까. 내겐 사랑이 복권이다. 내 가슴에는 항상 운명적인 사랑이 들어 있다.
복권당첨을 소망하던 그처럼 난 사랑당첨을 꿈꿔왔다. 여러 숫자들의 우연한 배치가 복-돈이 되듯 다양한 감정이 운동하다가 충돌해서 불-꽃을 일으키는 거다. 일상에서든 영화에서든 소설에서든 상관없다. ‘사랑’ 그 자체, 그러니까 전무후무한 기념비적인 사랑을 보고팠다. <비포선셋>은 그런 나의 오래된 러브로망을 구현해준 억만금짜리 영화다.
“기념비란 잠재적 사건을 현실화함이 아니라, 그것을 구현시킴, 즉 거기에 실체를 부여함이다. 다시 말해 사건에다가 하나의 육체를, 삶을, 우주를 부여하는 것이다.”
익숙한 러브스토리 하나. 미국청년과 프랑스 아가씨가 우연히 유럽횡단 기차에서 만난다. 호감을 느낀 두 사람은 비엔나에서 충동적으로 내린다. 낯선 도시를 걸으며 심도 깊은 대화와 살과 살이 맞닿는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해 뜨기 전, 6개월 후 다시 만나기로 하고 남자는 공항으로 여자는 기차역으로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두 사람이 떠난 뒤, 꽃다운 남녀가 하룻밤을 보낸 텅 빈 공원만이 우두커니 남아 있다. 한 없이 쓸쓸한 그곳을 조망하던 카메라는 그윽한 여운을 남기고 시선을 거둔다. 영화 <비포선라이즈>는 그렇게 끝난다.
9년 후, 카메라가 다시 돌아간다. 영화 <비포선셋>은 이번에는 파리의 텅 빈 골목을 훑으며 시작한다. 거리를 덮는 도톰한 햇살을 따라 다다른 곳은 파리의 작은 서점 안. 그 사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남자주인공 제시가 독자와의 대화를 하고 있다. 셀린느가 문에 기대 가만히 지켜본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 잠시 후 ‘안녕’이라며 담백한 인사로 재회한다. 그리고 9년 전 그랬듯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다.
“그날 거기 갔었어?” 기다렸다는 듯이 사실검증부터 들어간다. 6개월 후 만나기로 한 약속이 무산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자면 두 사람은 하룻밤을 보냈을 뿐인 사이다. 친구라고 하기도 뭐하고 애인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저 ‘아는 사이’다. 이 관계의 모호함, 기억의 모호함, 감정의 모호함이 영화를 팽팽한 긴장감으로 끌고 간다. 젊고 뜨겁던 이십대를 지나 ‘이렇게 살수도 저렇게 살수도 없는’ 삼십대가 된 남녀의 조우는 익숙한 러브스토리가 아닌 절절한 라이프스토리로 전개된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남자가 비행기를 타기까지 단 서너 시간 정도뿐. 하지만 둘의 ‘밀린 수다’에서는 삶과 사랑에 관한 무수한 질문거리가 쏟아져 나오고 그를 토대로 멋진 사랑의 금자탑이 세워진다.
그들은 거리를 걷다가 카페도 들어가고 세느강에서 배도 탄다. 카메라는 롱테이크로 생동감 있게 그들을 따라 잡는다. TV 속 앵커처럼 주로 가슴 위를 잡는데 뉴스를 보는 듯한 구도는 그들의 존재에 신뢰감을 부여한다. 일 분 일 초도 쉬지 않고 떠드는 둘의 대화는 적나라 하고 강렬하다. 사나운 환경투사가 된 셀린느는 재치 있는 농담과 적당한 내숭과 신랄한 원망과 내밀한 고백과 진지한 세계관으로 대화를 주도한다. 글쟁이 남자도 만만치 않은 공력으로 맞선다. 요즘 말로 하면 개념을 탑재한 남녀의 끝장토론인 셈이다.
시소처럼 오르락내리락 율동적인 갑론을박이 오가는 동안 심연의 토사물이 쏟아져 나온다.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한 남녀의 애틋한 사랑이라는 진부함으로 오인되어서는 안 될 어떤 격정적인 정서의 창안이다. 과거의 깊은 잠재적 지대를 들쑤시는 두 사람. 기억의 수축작용이 일어난다. 사랑은 대부분이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9년 전 우리가 잤는가 안 잤는가 풀밭인가 벤취인가가 한 번인가 두 번인가가 때론 중요하기도 하다. “책은 안 써도 일기는 쓴다”며 자신의 기억의 적확성을 주장하던 그녀는 또 어느 새 온순해져서 “네가 떠나던 그 아침에, 너의 턱수염에 섞인 붉은 가닥이 햇빛을 받아 빛나던 모습을 기억한다”고 터놓는다. 고작 털끝 한 가닥으로 십년 세월 품은 사랑을 나긋나긋 증명해낸다. 그렇게 가슴 한 켠에 날마다 물을 주고 돌보며 키워둔 감정들을 자식처럼 서로에게 내보인다.
두 사람은 밀폐된 공간인 차안에서 가장 솔직한 대화를 나눈다. 여자는 말한다. “나에게 누구라도 특별하지 않았던 이는 없었으며 누구에게나 그 사람만이 소유하고 있는 특별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아무리 좋아했어도 헤어지면 쉽게 잊는다. 그런데 당신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됐다. 사랑을 믿지 않게 됐다”고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린다. 차에서 내리겠다고 소리를 지른다. 남자는 “나는 보육원을 차린 수도승”이라고 자신의 처지를 정의 내린다. 아내와 잠자리를 가져본지 오래다. 하지만 아이를 너무 사랑해 헤어질 수 없다고 말한다.
어찌하다보니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신이 더 불행하다며 주장하는 꼴이 되어버린 이 상황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더 사랑한다는 우격다짐처럼 '거친 고백'이 되어버렸다.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허물어질 것 같은 남자를, 사랑을 믿지 않게 된 여자는 지그시 안아본다. 삶이 삶에게 가하는 상처를 잘 아는 그들의 연대전선은 강고하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들른 곳은 그녀의 방안. 셀린느는 기타를 치며 왈츠곡을 불러준다. 제시는 소파에 폭 잠겨 음악을 듣는다. 방안이 우주처럼 팽창되고 두 사람은 샤갈의 주인공처럼 허공으로 날아오를 듯 가붓하다. 영화에서는 남자가 비행기를 탔는지 아닌지는 물론 나오지 않는다.
그것이 궁금하지 않다는 것이 <비포선셋>의 묘미다. 최선을 다하고 나면 어떤 결과에도 담담해질 수 있는 것처럼 두 사람의 ‘진정성’을 이미 확인한 덕분이리라. 더군다나 천하에 변덕스런 '감정'이 아닌 '삶'속으로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찾아낸 ‘사랑의 광맥’아닌가. 특별한 사건전개와 극적인 상황설정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토론회처럼 대부분 장면이 얼굴만 클로즈업되는데도 ‘낭만’이 흐르고 ‘영원’도 보이는 <비포선셋>. 이 질박한 사랑영화를 통해 한 줌 결론을 얻는다. 시들지 않는 사랑은 없겠지만, 시들어도 죽지 않는 사랑은 있다. “사랑의 성공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해 사랑이 이루어졌던 바로 그 순간에 사랑이 그들에게 부여했던 울림들, 어우러짐, 열림들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