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꽃별언니꺼 틀어줘” 딸아이가 분홍꽃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당기면서 당부한다. 그동안 간간히 해금연주를 듣긴 했으나 며칠 전부터 아예 해금소리를 자장가 삼아 청한다. 해금천리라더니. 해금 두 줄에 실려 멀리 꿈나라로 여행 떠나는가 보다.
딸아이의 해금사랑은 지난 4월 덕수궁 꽃놀이에서부터 시작됐다. 고백하자면, 그동안은 딸아이와 어딜 놀러가는 게 나에겐 절대 놀이가 아니었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일거수일투족 챙겨야 하는 돌봄 노동의 연장이었다. 딸아이가 예쁜 것과는 별개로, 집을 벗어나 야외에서까지 뒷바라지하는 게 참 귀찮았다. 고되고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딸아이가 초등학생이 되고나서 한결 의젓해지자 생각이 달라졌다. 지 한 몸 너끈히 추스르게 되니까 친구처럼 느껴졌다. 오동통한 손을 잡고 허리선을 훌쩍 넘는 키의 아이와 걷노라면 얼추 신체균형이 맞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집 앞에 파리공원 가는 것도 마다하던 내가 먼저 딸아이에게 “우리 덕수궁에 가자”고 말했다. 우리모녀는 그렇게 떠났다.
철쭉이 없었으면 세상이 이렇게 봄기운이 물씬할 수 있었을까. 여기저기 무더기로 인심 좋게 핀 철쭉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며 그 눈부신 분홍빛을 배경으로 화사한 웃음 터뜨리며 사진도 찍고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서 다리쉼도 하고 음료수도 하나 뽑아 먹고, 옛날 사또 복장 한 사람들이 하는 행사도 구경했다. 햇살이 이끄는 대로 오솔길도 걷고 아무데나 철퍼덕 걸터앉아 풍욕도 즐겼다. 그렇게 덕수궁과 하나로 어우러질 즈음 안내방송이 나왔다. “오후 4시부터 봄맞이 문화행사로 사물놀이 공연과.......많은 관람 바랍니다."
딸아이가 사물놀이 공연을 보자고 한다. 그 때가 두시 반 정도였다. 나는 한 시간을 넘게 여기서 뭘 할까나 하는 고민보다는, 그렇게 기다렸다가 볼만한 수준의 공연은 아니라는 얄팍한 생각에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딸아이가 하도 간곡히 원하여 그러기로 했다.
정각 4시. 내가 소싯적 '장유진의 가요산책'을 듣던 시간. 꽹과리의 신호음과 함께 한판 신명나는 사물놀이가 시작됐다. 사물과 가야금, 피리, 태평소, 해금, 거문고, 신디사이저 등의 퓨전공연. 연꽃을 든 곱디고운 무용가들의 한국무용, 판소리 춘향가, 왕의남자 OST '인연‘ 등등. 우리모녀는, 아니 실은 내가 더 넋을 잃고 한 시간 넘게 펼쳐진 공연을 봤다. 무용가 언니 오빠들의 빛 고운 한복의 자태와 손끝부터 눈웃음까지 우아한 몸놀림에 딸아이는 넋을 빼앗긴 듯 보였다. 나는 노랫말이 고와서 심취해 있었다. “인연이라고 하죠 거부할 수가 없죠..내생에 이처럼 아름다운 날..또 다시 올수 있을까요..” 집에 오는 길 딸아이가 그런다. “엄마, 나도 무용 하고 싶어” ‘그러니? 엄마는 저렇게 아름답게 슬픈 노래 부르고 싶어’ 난 속으로만 말했다.
귀가해서는 우리모녀는 약속이라도 한 듯 집안에 있는 유일한 국악CD인 꽃별 해금 1,2,3집을 들었다. 다음날인가, 금요일에 꽃별 4집 발매기념 콘서트가 있다는 사실을 입수했다. 부석사 여행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전야행사로 택하고 갔다.
콘서트 제목은 꽃별's Diary 꽃별은 하얀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무대 중앙에 앉아서 해금을 가슴에 품고 연주했다. 음악나라 해금공주. 해금이 별도의 사물로 된 악기라기보다 꽃별의 몸 같았다. 스페인 여행을 다녀온 얘기를 중간 중간 들려주었다. 친구와 수다 떨듯이 조근조근 이야기를 했다. 바이올린, 첼로 등 현악기와 퍼커션, 드럼, 기타, 피아노, 아코디언 등등 온 악기가 다 총동원 됐는데 꽃별은 신들린 지휘자처럼 해금 두 줄로 그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아코디언은 방랑의 악기인가. 이번 4집 앨범이랑 너무도 잘 어울렸다. 해금과 아코디언이 연주되자 음악의 파도에 풍부한 여운과 떨림이 실렸다.
꽃별은 스페인에서 걷고 또 걸으면서 ‘나는 왜 걷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했다고 말했다. ‘왜’라고 질문하는 자는 아름답다. 사색의 그림자를 끌고 다니니까. 작고 작은 꽃별은 너무 지치고 힘들었고 하얀 나비만이 나풀나풀 거리는 그 길에서 ‘노란 나비’를 볼 수 있길 염원했다고 했다. 그랬더니 언덕을 넘자 거짓말처럼 노랑나비가 있더란다. 삶이 그렇게 짜여진 각본처럼 될 때도 있어야, 우리는 살아간다. 꽃별이 “여러분도 여러분만의 노란 나비를 만나길 바란다”며 손끝에 키스를 날려 보냈다.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이름은 꽃별인데, 얼마나 차돌처럼 야무지고 다부진지 모른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정황은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꽃별을 인터뷰이로 처음 만난 날, 흐릿한 조명 아래서 몇 번을 봤다. 꽃잎처럼 여리디 여린 속내, 별처럼 촉촉하게 젖어드는 눈가. 그리고 꽃별은 해금을 정말 사랑하는구나. 마음이 맑아서 좋은 음악가가 될 거라는 믿음이 싹텄다.
나중에는 넌지시 사랑했던 과거사를 물었더니 이러저러하다며 터놓는데 “나는 헤어진 남자친구한테 술 마시고 전화도 잘 한다”면서 수줍게 웃었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뒤끝 작렬이 진리다. 헤어진 사람을 칼로 벤 듯 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척하는 것 뿐.
꽃별에게 소신을 물었을 때, 고운 얼굴에서 투사 같은 말이 나와 놀랐었다. “가장 경멸하는 사람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사람이에요.”그리고 또 한풀 꺾인 목소리로 “살아오면서 받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부당한 것들은 그만 다 잊어버렸어요.”라고 했다. 아니다. 그녀는 적어도 ‘우리 사회에 부당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는 않았다. 예술계만큼 학연의 고리와 돈의 거래가 강고한 곳이 없다고 나는 안다. 꽃별과 그런 부당함에 대해서도 한참을 얘기했다. “학연이나 지연 이런 것들 에 마음이 끌리는 것까지야 어쩔 수 없지만 정말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심사위원이든 교수든 자신의 귀를 존중해서 실력을 갖춘 사람을 뽑겠죠.” 우리사회가 점점 자존심이 무너지고 돈이면 뭐든 얻을 수 있다는 무식함이 활개 친다고 개탄했다. 꽃별은 그 속에서 ‘해금’과 ‘자존심’으로 살아남았다. 아니 꽃피었다. 그녀 뒤에는 그녀를 올곧은 길로 이끌어준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제가 음악을 하니까 더 강조하셨어요. 행여 라도 빽과 연줄로 빌붙어서 성공할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요. 오로지 연습으로 실력을 쌓아서 네 힘으로 해내라고요. 저는 레슨도 굉장히 저렴하게 했어요. 물론 엄마는 촌지 같은 건 모르고 사셨고요.”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단다. 꽃별의 짝은 공부도 못하고 꼬질꼬질 냄새나는 가난한 아이였다. 운동화가 없어 체육시간에 실내화를 신고 하다가 선생님에게 혼이 났다. (그 선생님도 참......)집에 가서 엄마에게 그런 얘길 했다. 며칠 뒤. 꽃별은 생일을 맞아 엄마와 함께 시장엘 갔다. 엄마가 선물을 골라준 것은 그 친구의 운동화였다.
“그러면서 말씀하셨죠. 나는 네게 ‘선물할 수 있는 기회를 선물하겠다.’고요. 그 때는 어렸잖아요. 일 년에 한 번 선물 받는 기회를 놓친 것만 속상했던 기억이 나요. 엄마의 깊은 마음도 모르고,..”
꽃별에 대한 추억이 하나둘 감정의 수면 위로 떠오르자, 음악이 한결 더 따뜻하게 들린다. 한 시간 사십분 간 진행된 꽃별의 공연을 꼼짝도 안 하고 본 딸아이는 또 그런다. “엄마, 나도 꽃별언니처럼 해금할까?” “그럴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너에게 꽃별언니 엄마처럼 좋은 엄마가 되어 주어야할 텐데....’ 공연 끝나고 로비에서 사인회가 있었는데 줄이 꽤 길었다. 중년남성부터 이십대 여성까지 세대가 어우러져 꽃별CD를 사는 모습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꽃별씨. 내가 노란나비를 찾으러 떠나는 길이라 사인도 못 받았네... 해금의 깊은 세계를 느끼게 해줘서 고마워... 무대 위에서 너무 멋있더라. 눈앞에 안 보여도 늘 응원하는 한 사람 여기 있어!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