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1950년대 독일. 15살 소년 마이클은 열병에 걸려 길 한복판에서 심한 구토를 일으키고, 그 앞을 지나던 여인 한나는 그를 도와준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그녀는 어느 날부턴가 사랑을 나누기에 앞서 책을 읽어줄 것을 부탁한다. 소년은 <오디세이>, <채털리 부인의 사랑>,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전쟁과 평화>를 읽어준다.
이 영화는 내겐 너무 매력적인 장치로 가득하다. 하늘만이 허락한 남녀의 불꽃같은 사랑이 평생을 집어삼키는 설정도 그렇거니와, ‘책’이 두 사람의 사랑을 묶어주는 인연의 끈으로 작용하는 점, 책으로 인해 삶이 자극받고 사람이 변하는 과정이 드러나는 것도 감동적이다.
그런데 잘 헤어지는 게 잘 사랑하는 거라고 믿는 관점에서는 오십 점짜리 멜로영화다. 감점의 요소를 제공한 한나의 소통불능적인 성격이 안타까웠다. 글을 볼 줄은 모르는 상태에서 30년 넘게 하층민 노동자 신분으로 살아온 퍽퍽한 삶이 그녀를 자폐적으로 만들었을까. 기계의 부속처럼 단순반복적인 일만 하는 그녀. 극중에서도 마이클과의 관계에서는 집에 와서 세 마디만 한다는 우리나라 경상도 남자들처럼 무뚝뚝하다.
하지만 마이클이 읽어주는 책을 들을 때 그녀의 표정은 꿈틀꿈틀 살아 움직인다. 마치 안 쓰던 근육을 쓰는 것처럼 어색했으나 절절했다. 그렇게 감정훈련을 받던 중 한나는 마이클에게 그 어떤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진다. 왜 이별은 이렇게 불친절하고 폭력적인 것일까. 사랑하는 여인에게 버림받은 15세 소년은 그렇게 처음 사랑을 배운 탓에, 이후 누구와도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 연애불구자가 된다.
8년 후,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수업을 위해 참관한 2차 세계대전 전범 재판장에서 한나를 발견한다. 그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크라카우 근교의 작은 수용소에서 2년 동안 여성 경비원으로 일했던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난 그저 내 일을 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한나. 5.18에 발포명령을 내린 전두환도 그의 일을 한 것일 뿐이다. 피고인 한나는 자기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사고하고 인지하는 능력이 차단된 것처럼 보인다. 애초에 길거리에 아픈 마이클을 도운 걸 보면 인간에 대한 연민이 없는 사람은 아닌데. 아마 마이클과 한나의 연애기간이 더 길어서 그녀가 더 많은 책을 읽었다면, 수백 명의 목숨이 불타죽는 일에 저렇게 사무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어쨌든 모든 죄를 뒤집어 쓴 한나. 마이클은 ‘그녀를 위해’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눈물을 흘린 채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그녀를 떠나보낸다. 그리고 한나의 거처를 아는 마이클은 감옥의 그녀에게 10년 동안 책을 읽은 녹음테이프 보낸다. 그녀와의 사랑의 끈을 지구를 몇 바퀴 돌만큼 길고 길게 이어간다. 그렇게 산더미처럼 수북이 책을 쌓아가며 책을 읽어준 마이클. 그의 지극한 사랑에 자극받은 한나는 독학으로 글자를 깨우친다. 짧게 한 줄씩 편지도 보낸다. 삐뚤삐뚤한 첫 편지는 충분히 감동적이었을 텐데 마이클은 어쩐 일인지 답장하지 않는다. 한 번도.
그리고 가석방을 앞둔 한나와 마이클은 재회한다. 한나는 반가운 얼굴로 “왜 나에게 답장을 쓰지 않았냐”라고 묻는다. 그런데 마이클은 이에 답하지 않고 “죽은 자들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느냐”라고 질문한다.
난 정확히 이 대목에서 한나의 죽음을 예감했다. 그냥 '직감적으로' 나라면 죽을 거 같았다. 마이클은 한나를 조금 친절한 판사가 죄인 다루듯 대했다. 그의 말투와 표정에서 한나에 대한 사랑의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가슴 안에 에베레스트산보다 더 높이 책으로 쌓은 공든 사랑탑이 무너지는 느낌. 마이클은 왜 대답하지 않았을까. 복합적인 감정을 표현할 마땅한 언어를 찾지 못한 것일까.
아무튼 만남부터 헤어짐까지 ‘자초지종’을 터놓지 않던 소통불능 커플의 비극적 사랑은 말년까지 이어졌으나 결말은 쓸쓸했다. 아니, 속 시원히 전후사정을 ‘솔까말’하지 않아서, 그 결핍을 동력으로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사랑이 이어졌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