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지휘를 위해서는 음악을 얼마나 완벽하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하지 여성이기 때문에 오페라 지휘가 어렵거나 더 쉬운 건 없어요. 남성이라도 섬세하고 감성적인 사람도 있듯이 성별보다는 성향이나 기질과 역량이 문제지요. 그간 여성지휘자가 없었던 것은 의지와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지휘자의 카리스마는 단원을 잘 이끌고 음악을 잘 다스릴 줄 아는 너른 포용력과 음악적 색깔에서 발현되는 것이지 남성의 전유물은 아니잖아요.”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가 베일듯하다면 그는 녹일듯하다. 태양처럼 환한 표정과 열띤 자태로 천상의 화음을 빚어낸다. "나는 악보에 적혀 있는 것을 그대로 소리로 옮기고 있다"고 말한 토스카니니처럼 정교하고 섬세한 지휘로 압도한다. 피아노 치는 소녀에서 우리나라 유일의 여성 오페라 지휘자로 서기까지, 그의 음악과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희고 기다란 손가락에 손 때 묻은 낡은 지휘봉이 들려있다. 촉망 받던 피아니스트가 오페라의 본고장 이태리로 건너가 오페라지휘자가 되어 돌아왔다. 궁금하다. 대체 어떤 운명의 지침이 있었을까. 선천적으로 타고났을까. 후천적인 노력파일까. 아니, 과연 예술가로서의 천부적 자질이란 게 있는 것일까. 그는 “있다”고 답한다. 음악적인 테크닉을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해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를 가르쳐주기도 전에 열을 가늠하고 둘을 가르쳐주면 스물을 깨우치는 ‘신통함’의 소유자들. 채지은이 그랬다. 일곱 살 때, 피아노 배우는 동네 언니가 부러워 피아노를 시작했는데 ‘어린이 바이엘 상하권’을 뚝딱 해치웠다. 손가락도 기다랗고 연주력도 탁월했고 음악적 호기심도 왕성했다. 새 악보를 꺼내서 이곡저곡 쳐보기를 좋아했다. 학교에서 교회에서 동네에서 가는 곳마다 ‘피아노 잘 치는 아이’로 두각을 나타냈고 인정받았다.
서울예고 피아노과에 입학한 그는 2학년 때 한 달 간 미국연수기회를 가졌다. “연수 가서 레슨 받은 다음부터 음악이 읽혀지고 음악이 무엇이란 걸 깨달았다.” 그 후 ‘날고 기는 대한민국 피아노 신동들’을 제치고 실기시험에서 줄곧 상위권을 차지했다. 무난히 서울음대에 들어갔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끈덕지게 앉아 하루 종일 피아노만 치는 ‘독종’은 아니었다. 집중력이 짧았다. 솔리스트보다는 다양한 소리가 어우러지는 합주를 좋아했다. 특히 성악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에서 성악을 공부하는 이규성을 만나 결혼했고 전도유망한 음악가 부부는 이태리로 유학을 떠났다.
성악가 남편의 반주자 10년 “음악 깨우쳤다”
“원래 유학가면 성악을 전공하려고 했어요. 상황이 여의치 않아 못했지만 그만큼 성악을 좋아했어요. 남편의 성악 반주를 따라다니면서 발성 코치법을 배웠죠. 남편의 어깨너머로 귀동냥으로 배운 것들이 10년 세월이 지나니까 퍼즐처럼 딱 맞춰지더라고요. 음악을 알겠더라고요. 오페라 지휘를 하려면 음악 자체를 이끌어야하는데 반주자를 많이 한 것이 전체를 아우르는 안목과 풍부한 감각을 기르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남편 이성규는 1995년 세계 3,4대 콩쿠르로 꼽히는 아테네의 마리아 칼라스 콩쿠르에서 1등으로 입상한 실력파다. 부창부수. 그는 ‘반주를 잘하는 피아니스트’로 인기를 끌었다. “반주자는 단순한 보조자가 아니다” 주인공의 리듬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늘어지고 어색한 부분을 챙겨주고 이끌어주어야 좋은 반주자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제 아무리 좋은 반주를 하더라도 ‘반주자’의 말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는 그가 오페라 지휘과정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는 계기가 됐다.
로마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피아노과를 졸업한 그는 가곡과, 오페라 피아노과, 성악 교습법 및 코치 과정, 오케스트라 지휘과정 등의 분야를 하나씩 섭렵해가면서 오페라 지휘자로서 전문성을 쌓아갔다. 그리고 유학 10년째에 접어들 무렵 남편 이규성과 함께 사단법인 밀라노오페라스튜디오를 설립했다. 남편은 연출을 맡고 그는 전공인 피아노와 오페라코치를 살려 음악감독을 맡게 됐다. 드디어 지휘봉을 잡은 것이다.
“한국인 성악가들은 외국인들이 혀를 내두르고 부러워할 정도로 목소리가 뛰어나고 노래를 잘해요. 성악 배우려면 한국 가야한다고 말할 정도에요. 이렇게 좋은 성악가들이 많은데 정작 오페라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죠. 그래서 ‘우리가 한번 해보자’하고 의기투합해 오페라단을 꾸렸어요.”
오페라 본고장 이태리에서 지휘봉 잡다
오페라의 본고장 이태리에는 크고 작은 극장이 많다. 우리가 영화 보듯 팝콘 먹으면서 오페라를 즐긴다고 한다. 소규모 공연장을 중심으로 공연을 시작했고 호응은 좋았다. 그는 처음 이태리 사람들 앞에서 지휘를 할 때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동양인이고 여성이라는 것 때문에 편견과도 부딪쳤다. 하지만 결국 실력이 중요하기에 그만큼 자신감도 있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실력을 인정받아 이후 계속 공연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대구 밀라노 자매결연 1주년 문화교류 공연으로 <나비부인>을 무대에 올려 성황리에 마치는 기염을 토했다.
여기에 얽힌 재밌는 일화가 있다. 당시 그는 지휘학교를 다니던 중이었다. 두 살 바기 아이를 기르며 공부하던 중이라 이태리 학생들만큼 수업을 충실히 따라가지 못한데다가 동양인이라 주목받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공연 전날 지휘과 교수에게 <나비부인> 공연 티켓을 주었더니 시큰둥하고 의아한 표정이었다. 공연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같이 간 학생들에게 나비부인 같은 3류 소설은 싫어한다고 투덜대던 교수는 급기야 눈물까지 흘리며 공연을 관람했다고 한다.
“오페라 지휘를 위해서는 음악을 얼마나 완벽하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하지 여성이기 때문에 오페라 지휘가 어렵거나 더 쉬운 건 없어요. 남성이라도 섬세하고 감성적인 사람도 있듯이 성별보다는 성향이나 기질과 역량이 문제지요. 그간 여성지휘자가 없었던 것은 의지와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지휘자의 카리스마는 단원을 잘 이끌고 음악을 잘 다스릴 줄 아는 너른 포용력과 음악적 색깔에서 발현되는 것이지 남성의 전유물은 아니잖아요.”
채지은은 ‘악보대로 끌고간다’는 소신을 가진 지휘자다. 일단 악보를 잘 이해하고 그대로 표현하는 기본에 충실하다. 어릴 때부터 팝, 가요, 클래식 등 모든 음악을 편식 없이 들었고, 또한 반주자로서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 등 모든 관현악기의 레슨과정에 함께 하는 과정에서 모든 악기의 소리를 자연스레 체화시켰다. 게다가 성격까지 소탈하다. 늘 스스로 에너지가 생성되는 낙천적 타입이다. 힘든 일이 있어도 “이번엔 안 됐네. 다음엔 잘 할 거야.” 라며 넘긴다. 모든 변수를 다 동원하여 머릿속을 거미줄로 만들 시간에 하나씩 행동으로 풀어간다. 긍정의 힘은 운명의 수레바퀴를 힘차게 돌았고 어느 순간 그는 당당한 ‘오페라 지휘자’가 된 것이다.
‘허물없는 음악회’ 어때요?
15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2004년 귀국한 그는 서울 삼성동에 '밀라노 오페라 스튜디오' 음악원을 개원했다. 이태리 현지에서의 풍부한 경험과 축적된 노하우를 나누는 음악교육의 장을 마련했다. 같은 해 10월, 아산올림픽국민생활관 개관기념 공연 오페라 <휘가로의 결혼>에서 지휘봉을 잡으며 국내 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오페라의 막과 막 사이에 치마로자의 <궁정악장>과 같은 오페레타를 넣어 지루함을 더는가 하면 이탈리아 대사를 한국어로 바꾸고 내용이나 인물도 한국정서에 맞게 적당히 각색함으로써 대중적인 재미를 더했다. ‘친절하고 재밌는 오페라’는 그의 숙원사업이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오페라 코치과와 상명대 반주과에 강의를 나가며 후학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다들 오페라를 어려워하잖아요. 그래서 ‘허물없는 음악회’를 상상해 봤어요. 노래, 피아노, 기악이 학예회처럼 차례차례 무대에 서는데 공연 전체는 하나의 스토리가 되는 거예요. 재밌겠죠? 또 더 많은 분들이 음악을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여유가 없는데 좀 기반이 닦이면 소년소녀가장돕기 자선음악회 타이틀을 걸고 뜻 있는 공연을 많이 하고 싶어요.”
꿈꾸는 소녀같이 초롱초롱 환한 웃음을 짓는다. 피아니스트에서 여성지휘자로 변신하는 동안 까칠하고 새침했던 ‘피아노 치는 공주’는 따뜻하고 속 깊은 ‘오페라 지휘자’로 거듭났다. 알을 깨는 아픔이 변신의 즐거움이자 진화의 기쁨이었음을 고백한다. 행복점수 10점 만점 중에 “10점”이라고 주저 없이 답한다. 늘 지금이 가장 행복하단다. 왜? 음악이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