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정신이 악기가 된다면 그는 깊은 음색의 첼로가 아닐까. 나눔과 순환의 사랑방 ‘아름다운가게’ 대표로, 서민들의 애환과 웃음을 전하는 라디오 진행자로, 무대에서 뜨거운 열정을 불태우는 연극배우로 살아가는 손숙. 붉은 단풍색 카디건을 걸치고 카페에서 시집을 읽는 그에게서 ‘텅 빈 우아함’의 첼로선율이 들리는 듯하다.
젊음과 문화의 거리 대학로, 금요일 오후의 북적이는 인파 사이에서 그가 걸어오는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극적이다. 주변의 모든 소란과 소음이 지워지고 그의 동선 따라 천연조명이 쏟아진다. 20대부터 체중변화가 거의 없는 날렵한 체구, 해바라기처럼 큰 키, 주먹만 한 얼굴, 눈가의 웃는 주름은 잘 여문 생의 아름다움을 여실히 드러냈다.
온갖 장신구로 치장하고 돈방석을 깔고 앉아 늙어가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은 ‘아름답게 나이 드는 것’. 손숙은 “나이 들어가면서 나누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백한다. 평소 신뢰하는 박원순 변호사가 추진하는 일이고 환경에 관심 있었기에 ‘아름다운가게’ 대표직을 기꺼이 맡게 됐다고. 아름다운가게는 ‘누구나 다 나눌 수 있다’는 점에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대개 사람들은 ‘형편이 안 된다’ ‘나중에 하겠다’며 나눔과 봉사를 미루지만 아름다운가게를 이용하면 손쉽게 나눔과 환경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눔과 순환이라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에요. 헌 물건부터 우리의 생각, 손길, 웃음 이런 모든 것이 모두 나눌 수 있는 것이지요. 안 쓰는 물건을 버리면 쓰레기가 되어 공해지만 잘 손질해서 내놓으면 나눔이 되고 그 물건을 사는 것은 기부가 되고 매장에서 봉사하는 것도 활동기부가 됩니다.”
‘나눔 사랑방’ 아름다운가게의 나라로
2003년 시작된 아름다운가게는 쑥쑥 성장하여 전국에 90여개의 매장이 생겨났다. 아름다운가게가 벤치마킹한 영국의 옥스팜은 영국 관광가이드 지도에 좋은 물건을 싸게 사는 곳으로 소개될 정도로 성공적으로 정착했다고 한다. 손숙은 우리나라도 전국 마을 마을마다 아름다운가게가 하나씩 있어서 사람들이 그곳에 와서 정보도 나누고 어려운 일도 나누고 책도 보고 차도 마시면서 마을(공동체)의 중심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피력한다.
이웃을 위한 에너지를 만들어주는 데 익숙한 사람 손숙. 그는 자신이 가진 부분을 에너지로 만드는 것에 능하다는 점에서 진정한 삶의 프로다. 연극계의 프리마돈나 자리를 40년간 지켜왔다. 환경부장관을 역임했고 아름다운가게 대표 외에도 CBS FM ‘손숙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 진행과 결혼정보회사 (주)웨디안 운영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부차적이다. 그 무엇도 연극과 비견될 수는 없다며 “내 인생은 연극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문학소녀이던 그가 연극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다. 연극을 처음 봤는데 문학과는 전혀 다른 벅찬 감동을 느꼈다. 연극에 대한 호기심으로 고3때 학교 연극회에 참여해 스태프로 일했고 그것이 40년 연극인생의 출발점이 됐다. 고려대학교 사학과에 재학 중에 ‘고대극회`라는 연극동아리에 들어가 본격적인 배우생활을 시작했다.
"배우를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연기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지금까지 계속해온 것인데 벌써 40년이 됐어요. 무대에서 느끼는 희열은 장관이나 대표에 비할 바가 아니죠. 연극은 너무 소중해요. 관객과 한 공간에서 만나고 호흡한다는 것이 연극만의 매력이죠. 연극은 온전히 배우예술이에요. 내가 살아볼 수 없는 인생을 살 수 있고요. 필름으로 남지 않고 순간의 열정을 다 태우니 또 좋고요.”
혼자놀기의 달인은 늙지 않는다
손숙은 여성적이다. 늙지 않고 나이 든다. 어머니 같은 자상함과 소녀 같은 섬세한 감수성을 두루 지녔다. 느티나무 같은 관대함을 드러내다가 얼핏 봉선화의 여린 향을 내비친다. 비결은 무얼까. 손숙은 나이 드는 것은 자기얼굴을 자기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며 눈썹 붙이고 성형한다고 예뻐지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두 가지를 강조했다. 하나는 내면을 가꾸려는 노력이고 나머지 하나는 버리려는 노력이다.
“저도 잘 안 되고 어려운 부분이에요. 사람이 나이가 들면 안 되는 건 포기할 줄 알아야 해요. 굳이 욕심내고 움켜쥐는 건 사람을 추하게 만들죠. 물질과 집착을 나이순으로 버려야 해요. 몸도 가볍게 가진 것도 가볍게. 갈 때는 아무것도 안 가져가잖아요. 세상을 위해서라도 마음을 열고 나누어야죠.”
손숙은 자신이 도회적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점점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커진다고 터놓는다. 가끔 해질녘 한강의 장엄한 풍경에 넋을 잃는다. ‘내가 얼마나 저런 풍경을 볼 수 있을까’ 생각하면 더욱 애틋하다. 한 때는 사계절을 몹시도 탔다. 예전에 같이 라디오를 진행하던 김승현이 “누님은 가을이면 가을 타고 봄이면 봄을 탄다.”고 놀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자연에 대한 ‘안달’마저 슬며시 놓아버렸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즐기는 건 ‘혼자 놀기’다.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책도 본다. 어제는 영화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카페’를 봤다. 영화를 보고나니 탱고가 배우고 싶어졌다. 일 년에 한 번씩은 혼자서 해외로 여행을 간다. 작년에는 하와이를 다녀왔다. 일본 카페 순례 여행도 가보고 싶다. 이런저런 꿈의 목록을 읊는 사이 바깥은 어둑해졌다. 가로등 따라 긴 그림자를 남기며 <잘자요 엄마> 연극무대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말한다. '일상은 남루하여도 황혼은 아름다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