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지도에 없는 섬이다. 하늘에 홀로 뜬 달이다. 홍대 앞 재즈클럽 문글로우(moon glow). 한 남자가 피아노를 친다. 고요하고 시린 달빛 선율이 흐른다. 재즈의 황무지를 일궈낸 저 유장한 40년 울림. 반달이 온달로 차오르듯 완숙한 정취를 자아내는 재즈계의 전설 신관웅의 행복한 느낌, 흐느낌이다.
지나온 자리마다 고통의 우물이 군데군데 패였다. 고통의 시간이었으되 돌이켜보니 그 자리에 행복의 샘물 찰랑인다. 신기한 일이다. 그에게 행복이란 과거의 불행을 소급해 구성한 아련한 추억들이다. “어렸을 때 불행했다.”며 말문을 연다. 여섯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새엄마는 동화 속에서 그려진 대로 푸근하진 않았다. 게다가 아버지가 편찮으셨다. 풍금이 유일한 벗이었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셨던 아버지 덕분에 풍금을 칠 수 있었다. 엄마 잃은 동심은 쓸쓸함과 외로움과 적적함을 풍금으로 달랬다. 벽촌이었던지라 밤이면 전기도 나가고 촛불도 없었다. 암흑천지였다. 오로지 달빛에 비추어 풍금을 두드렸다. 그게 행복이었다. “달빛을 벗 삼아 풍금을 치는 동안 무아지경에 빠졌다.”
원래는 클래식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를 꿈꿨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사경을 헤매는 등 상황이 악화됐다. 부유한 집 아이들은 외국유학을 떠나기도 하고 저마다 음악의 꿈을 펼치는데 이렇게 주저앉으려니 절망뿐이었다. 그즈음 우연히 미8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한 흑인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었다. 멜로디, 하모니, 리듬 음악의 3요소를 전부 바꿔서 연주하고 악보도 없는 즉흥연주였다. 그 순간 어둠이 걷히고 ‘신천지’가 열렸다. “내가 할 음악은 바로 저거다.” 소위 말하는 재즈에 필이 꽂혔다. 이것이 또 고통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두 번째 행복의 기억이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재즈는 황무지였다. 선생님도 없고 교재도 없고 음반도 없고 연주장소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재즈를 들어주는 사람이 드물었다. 하지만 좋아했으니까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한 번 해보자 싶었다. 4명이 연주하면 1명이 듣고 10명이 연주하면 2명이 들었지만 그 한 사람을 위해 혼신을 다해 열심히 했다. 또 음악적 양분을 제공해줄 선생님이 없으니 오로지 음반만 파고들었다. 음반이 재즈를 배우는 유일한 통로였다. 음반을 구하기 위해 청계천 바닥을 헤매고 다녔다. 미군부대에서 내놓은 음반들을 넝마주이가 쓰레기더미 뒤지듯이 찾아냈다. 하루 종일 땅거미가 지고 손이 시커멓게 되도록 뒤졌다. 그러면 한 달에 음반 한 장을 건졌다. 그 때의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꿀맛 같은 세 번째 행복을 지나 네 번째의 행복은 짜릿함으로 다가왔다. 풍금으로 연습을 하다가 처음 피아노를 한 번 만져본 순간이다. 스스로 도둑피아노, 동냥피아노라고 이름 붙였다. 문이 잠긴 남의 피아노 열쇠를 몰래 열고 쳤으니 도둑이고, 주인집 아이 피아노를 가르치고 그 조건으로 한 번 쳐보곤 했으니 동냥이다. 피아노는 그렇게 절실했다. 여름에도 한 번 앉으면 3-4시간씩 엉덩이에 땀띠가 나도록 피아노를 쳤다. 결핍만큼 피아노에 대한 열망은 커져만 갔다. “만약 집에 피아노가 있어서 아무 때나 칠 수 있었으면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지도 않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점점 세월이 좋아져서 재즈가 대중에게 알려졌다. 재즈가 예술의 한 분야로 인정받고 재즈피아니스트로 인정받았을 때가 또 너무 행복했다. 다섯 손가락을 꽉 채운 행복의 목록은 “어찌된 일인지 다 가장 깊은 절망에 허덕이던 시기”였다.
물론 2006년 펼쳐진 ‘신관웅 재즈 40주년’ 기념공연에서도 벅찬 행복을 느꼈다. 하지만 저 어렵던 시절의 절실한 행복에 비하면 “게임도 안 된다.” 외려 지금은 행복이 고스란히 압박감으로 느껴진다. 재즈1세대인 선배 연주자가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후배연주자들이 늘어가는 상황에서 가장 윗세대로서의 책임감과 소명의식이다.
재즈의 메카 ‘문글로우’ 한평생 연주의 행복
7년 전, 재즈라이브클럽 ‘문 글로우’를 만들었다. 죽을 때까지 재즈를 실컷 연주할 ‘나만의 공간’이 절실했다. 재즈를 사오십년 해오니 이젠 몸의 일부 같고, 그걸 안 하면 못 견뎌서 지금도 매일 무대에 선다. 무대에서 쓰러질 때까지 연주할 것이다. “내가 설 무대가 있다는 것”은 뮤지션에게 가장 근원적인 행복이다. 후배와 선배와 어우러지고 재즈마니아들이 함께 할 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현실적인 어려움은 견뎌낸다.
신관웅의 재즈는 꿈이다. 다양한 음악적 실험은 지속적으로 추구됐다. 드럼 대신 사물놀이를, 스윙리듬 대신 락리듬을 넣는 등 퓨전재즈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민요, 클래식, 락에 이어 가톨릭 신자인 그는 성가와 재즈의 만남을 시도했다. 이미 세 장의 앨범을 냈고 10월 말 4, 5집이 출시된다. “재즈성가를 듣고 감동해서 자연스럽게 발길이 향하는 사람이 단 한 분이라도 있다면 굉장한 행복이 아닐까."
재즈가 어렵다면, 그것은 이해하려 들기 때문이다. 편히 들어야 들린다. 보컬이 있는 쉬운 재즈부터 곁에 두고 자꾸 들으면서 즐기면 재즈와 통할 수 있다. 한 가지 더. “재즈는 명곡은 없다. 명연주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만의 사운드’를 찾아 떠난다. 달빛을 벗 삼아. 글 김송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