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연구공간 수유+너머’ 카페는 텅 비어 있다. 음악도 없고 사람도 없는 그곳은 얼핏 영화 <바그다드카페>의 첫 장면처럼 스산했다. 커다란 창문만이 초여름 흐린 공기와 서울풍경을 덤덤히 담아내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왔다. 주인 없는 카페. 그래서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는 카페에서 그는 서툰 솜씨로 커피를 갈고 뜨거운 물을 받아 커피를 내렸다. “커피를 별로 안 좋아했는데 커피를 잘 내리는 사람이 해준 맛있는 커피를 먹고는 좋아하게 됐습니다. 그 뒤로 직접 해 먹기도 합니다. 뭐든지 그런 거 같아요. 잘 하는 사람을 통해 진짜 맛을 느끼고 좋아하게 되잖아요.”
어쩌면 그는 커피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서 ‘커피’ 대신 ‘니체’를 넣으면 고스란히 고병권이 설명된다. 니체라는 쓰디 쓴 원액을 특유의 손맛으로 우려내 ‘니체의 참맛’을 선보인 장본인이 바로 그다. 고병권은 <니체, 천개의 눈 천 개의 길><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을 쓴 최고의 ‘유쾌한’ 니체주의자다. 저작 및 강연활동을 통해 철학책 속 니체를 ‘커피처럼’ 일상으로 불러왔고, 까칠한 니체를 ‘커피처럼’ 향기롭게 뽑아 숱한 나른한 영혼들을 일깨웠다. 그는 손수 내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곧 생애 첫 기억부터 내밀한 시간의 자락을 들추었다. 이야기가 시작되자 영화 <바그다드카페>의 마술처럼, 카페에 웃음이 솟고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시골아이 고병권 “어린아이는 신성한 긍정, 순진무구한 망각, 새로운 시작, 하나의 놀이, 스스로 굴러가는 수레바퀴다.”
그는 열 살 이전까지 흙길을 밟으며 자랐다. 처음으로 아스팔트를 본 건 초등학교 5학년 때다. 까맣고 평평한 땅, 신작로가 신기해 눈을 떼지 못하던 깡촌 아이였다. 때문에 “MT를 가면 살아난다”. 나무 해오고 장작불 떼고 풀피리 불고 등등 자연을 무대로 활보하던 유년시절의 추억이 많다.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키가 작아서 앞에서 세 번째였지만 5학년 때 광주로 전학가기 전까지 내내 반장을 도맡아 했다. ‘참 잘했어요’ 도장의 전권을 쥘 만큼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숙제도 안 해오고 능청스럽게 자기공책에 ‘참 잘했어요’를 쾅 찍었다. “거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엄석대 캐릭터였다”
그러다가 광주 입성과 동시에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도시생활의 새로운 문화적 충격에 휩싸이면서 성적도 기세도 한풀 꺾이고 만다. “시골에서 남녀구별 없이 아이들끼리 고무줄놀이와 총놀이를 섞어 했다. 그런데 전학 간 교실에는 남녀가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앉아 있더라. 너무 충격이었다. 그 때 처음으로 남녀성구별에 대한 개념이 생겼다.”
그렇다고 완전히 기죽어 지낸 건 아니다. 빈번히 도시와 시골의 ‘게임의 법칙’이 충돌을 일으키던 즈음 묘한 긴장감이 돌았고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오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결국 발야구 시합을 하다가 경기규칙에 관한 시비가 붙었다. 그는 홧김에 친구의 얼굴을 주먹으로 쳐버렸고 안경 값을 물어주어야 했다. 또 아버지는 그 친구의 부모님에게 몸을 90도로 굽혀 사과했다. 그 뒤로는 절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싸움은 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에게 아버지는 각별하다. “생애 첫 기억은 땀이 촉촉이 밴 아버지의 등에 업혀 있던 것이다. 정지영상으로 생생히 남아 있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이장을 지냈지만 자식들 교육을 위해 광주로 옮기면서 궂은 일 마다 않고 헌신했다. 5남매 중 내가 유독 아버지를 좋아하고 많이 이해하는 자식이었다.”
광주소년 고병권 “내 안에는 어떤 것, 즉 내일과 모래 그리고 장래의 것이 있다.”
중학생이 된 깡촌의 깡다구 소년 병권은 점차 말수가 적어졌다. 마침내 새색시란 별명까지 얻었다. 학업성적도 중상정도. 그가 다시 피어난 건 고등학교 때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성적은 전교랭킹에 꼽히게 됐다. 군대 갔던 형들이 돌아오면서 집안 분위기는 안정되어 갔으나, 세상과 학교는 그렇지 않았다. 광주의 도심은 연일 시위의 함성으로 물들어갔다. “스쿨버스가 시위대를 뚫고 지나가기 일쑤였으며, 학교도 3년 내내 학내 민주화 문제로 들끓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물만 난 고기마냥 다시 팔딱 거렸다. 뛰어난 언변과 논리체계를 갖춘 덕에 학내 민주화운동 주도세력으로 급부상했다.
그러자 소싯적처럼 다시금 그의 학내 입지는 확고해졌다. 친구들은 ‘공부도 잘하고 나서기도 잘 하는’ 그를 신망했다. “당시는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서너 명만 남아서 공부했다. 갑자기 한 친구 녀석이 노래를 가르쳐주겠다더니 칠판에 ‘반전반핵가’ 가사를 적었다. 한 소절씩 가사를 익히고 따라 불렀다.” 공부와 투쟁이 일상적으로 공존하던 시절, 그의 꿈은 뜨겁게 이리저리 꿈틀댔다. 원래 문예반으로 활동할 만큼 문과성향이었으나 이과로 진로를 정했다. 뇌수종으로 고생하는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 의사가 되려한 것이다. 다시 유전공학으로 관심사가 바뀌었고 친구들과 괴물을 만들자는 둥 엉뚱한 미래를 설계하기도 했다. 결국 전공은 화학과를 택했다. 고병권은 일 년의 재수 끝에 1991년 서울대 화학과에 입학했다.
애국청년 고병권 “네 자신을 스스로의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 먼저 재가 되지 못할 때 어떻게 새로워지길 바라겠는가”
사촌형에게 입학선물로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를 받았다. 민주화의 고장에서 나고 자란 탓에 일가친척은 거의 ‘운동권’이었다.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는 고3때 급우에게 배운 ‘반전반핵가’를 불렀다. 학과 선배들은 그를 하염없이 사랑하고 신뢰했다. 그 역시 이공계인데도 세상문제에 관심을 갖고 현실에 참여하는 선배들을 존경했다. 동문회 역시 운동권 선배들이 주도했다. 교정 어디서나 부단히 읽고 쉼 없이 토론했다. 그는 분자구조보다 사회구조에 관심이 더 많았고 책꽂이에는 전공서적 대신 사회과학서적으로 채워져 갔다. 책은 밥이었고 세미나는 삶이었다.
1992년은 강경대 열사와 김귀정 열사가 연달아 죽음을 맞고 대선이 치러지던 해다. 그 역사의 격랑기를 그는 연세대에서 보냈다. 총학생회에서 밥 먹고, 거리에서 싸우고, 노천극장에서 노래를 불렀다. 노동운동하는 친구를 따라 구로역에서 선동활동도 했다. 그 즈음, 두 가지 충격적인 일을 겪었다. 하나는 지나가는 노동자에게 아주 세게 뺨을 맞은 일이다. “너희가 노동자를 알아!”하는 대사와 함께. 다른 하나는 노동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잠 안 오는 약 (타이밍)의 복용 실태를 적나라하게 목도한 일이다.
“어느 노동자가 팔뚝이 고무장갑 낀 것처럼 빨갰다. 원래 타이밍을 한 알만 먹어야하는데 추석 앞두고 연일 계속되는 철야로 쏟아지는 잠을 이기고자 두 알 먹었다고 했다. 신체의 감각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그만 아주 뜨거운 물에 손을 넣고 데인 것이다.”
운동가요 노랫말로만 접하던 타이밍의 실상은 너무 참혹했고 잔상은 강렬했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딱히 현장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학생신분의 안락한 삶이 죄스럽고 불편했다. 결국 부모님에게 학교를 그만 두어야겠다는 편지를 썼으나 중간에 형이 가로채는 바람에 무화됐다. 점차 뜨거움은 사그라졌다. 시대의 불길도 애국청년의 가슴에 타오르던 불꽃도. 91년도에 소련이 붕괴되고, 92년도에 선거에 패배했다. 선배와 친구들도 다 사라졌다. 퍼즐조각처럼 흩어졌다. “뚜렷하게 저지른 일도 없이 한 시절 열심히 따라다니다가 덩달아 반성만 한 세대”인 그로서는 모든 게 멍했다.
맑스주의 고병권 “중심은 곳곳에 있다. 영원의 오솔길은 곡선이다.”
세상 밖을 한참이나 떠돌다가 학과로 돌아왔다. 교정도 친구도 한 없이 낯설었다. 그런 상태에서 학회장을 맡았다. 일상 곳곳에 투쟁의 잔열이 남아있었다. 교정에 조성만 열사 추모비를 세우는 것을 두고 교수들과 대립했다. 최초의 성희롱 사건인 서울대 우조교 사건을 겪기도 했다. 다사다난한 그의 청춘시대는 점차 검은 낯빛으로 물들어갔다. “세상 짐 다 진 사람처럼 무겁고 심각했다. 공부하러 간 친구들과 살길 찾아 떠난 선배들을 탓하고 원망했다. 니체 말대로 원한의 정신으로 살았으니 심신이 건강했을 리가 없다.”
졸업 후 그는 사회과학대학원에 들어갔다. 서울사회과학연구소(서사연)를 가기 위해서다. 그 때 그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누구나 혼자 공부하면 자기 환상에 빠진다. 좁아지고 고집스러워지고 원본주의자가 된다. 대학원 동기들이 거의 87학번이었는데 그들의 생생한 현장경험과 곁들여 넓게 공부할 수 있었다.”
당시 서사연의 이진경 씨는 자기성찰을 통해 새로운 진로를 찾는 중이었다. 서사연은 들뢰즈와 푸코, 스피노자 등을 읽으며 탈근대 담론을 꽃피우고 있었다. 열린 분위기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니체를 만났다. “맑스 원전을 읽는 모임에서 누가 휴식삼아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을 읽자고 가져왔다. 처음엔 화가 났다. 한 우물 파는 스타일이라 옆길로 새는 게 싫었다. 니체도 못마땅했다. 문체가 경박하고 그의 파시즘적 사고에 분노했다. 그런데 발끝까지 맑시스트인 나로서도 도저히 반박이 안 됐다.”
니체주의 고병권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니체를 확 버리지도 와락 안지도 못하고 낑낑대던 그는 결정적으로 [이 사람을 보라]에서 니체에게 매료됐다. ‘이런 책을 쓰는 나는 얼마나 훌륭한가!’ ‘내 책을 읽고 나면 다른 책은 읽지 못할 것이다’와 같이 천진하게 자기 자랑하는 글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버렸다.” 고병권은 ‘웃음’으로 니체와 접속했다. 마침 방학을 맞아 니체 전집을 싸들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전남대 도서관에서 책상의 그림자가 바뀌는 것을 보며 니체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이해되고 감동적인 문장만 타이핑을 했다. A4용지로 50장 분량이었다. 그는 니체를 좋아하지만, ‘니체가 좋은 사람이다. 부럽다’고 생가해본 적이 없다. 좋으면 바로 나의 생각으로 삼았으니 니체와 거리는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그는 니체로 인해 시간도 바뀌고 건강도 바뀌었다. 일단 웃음이 많아졌다. 세상이 달라보였다. 나이가 멈춰갔다. 걸음걸이가 달라졌다. ‘긍정의 화신’이란 별명도 생겼다. “당연히 니체를 주제로 석사논문을 썼다. 대학원에서 니체를 같이 공부하던 동기가 3명인데 누구도 니체를 주제로 논문을 쓰지 않았다. 사회학과에서 철학자로 논문을 쓴다는 건 통념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공부한 게 니체밖에 없었으니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김진균 교수의 격려와 도움 속에 니체와 베버를 혼합하여 논문을 작성했고, 예상대로 교수들 사이에 논란이 있었으나 심사대기 중에 박사과정에 미리 합격하는 바람에 논문이 통과됐다. “어찌 보면 제도의 허점을 뚫고 통과한 거다. 점수는 최저점이었다. 운이 좋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던 게 아니다. 항상 한 가지 길이었다. 무작정 좋아하는 걸 따라오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 같다.” 학문적 사유의 계통 없음을 무기로 강단 있게 돌파한 그는 훗날 교수들에게 ‘사회학의 지평을 넓혔다’는 칭찬까지 들었다.
수유너머 고병권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운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고병권. 인생의 마디마디, 그의 성장을 촉진시킨 것은 인연과 우연이다. 책과 사람이 보약이었다. 그는 특히 박사과정 때 지도교수에게 공부하는 법을 확실히 배웠다. 지도교수의 책상에는 부처님 그림이 크게 걸려 있었는데 인내와 몰입을 위한 장치였다. 또 지도교수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음식을 시켜먹었다. 그런 스승을 곁에서 지켜본 것은 그가 ‘공부의 달인’으로 살아가는데 귀한 밑거름이 됐다.
“교수님이 두 가지 말씀을 해주셨다. 첫째는 절대 무릎을 꿇지 마라. 젊어서 함부로 무릎을 꿇으면 습관이 된다. 4.19세대인 교수님은 팔팔하고 대쪽 같던 벗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는 걸 지켜봐왔던 거다. 둘째는 대가 한 사람을 잡고 그의 높이에서 공부하고 세상을 보아라. 아마도 대가의 시선으로 보면 모든 게 달리 보일 거다.”
대가의 시선을 좇던 서른 즈음, 운명적으로 지식인공동체 수유+너머에 합류했다. “이게 나의 길이구나. 크게 벗어나지 않겠구나.”고 판단했고 수유+너머를 중심으로 삶을 설계했다. 임시 거처가 아니라 생활공동체로 확장했다. 밥을 해먹고 강의로 돈을 벌었다. 삶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그렇듯 그는 스스로 “인복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고 인복의 절정은 수유+너머에서 꽃피운다. 고미숙 선생 등 평생 벗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들과 함께 공동체를 꾸리고 삶의 틀을 갖추어 갔다.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 되고 앎이 삶이 되는 지식인 생활공동체는 6월의 나무처럼 나날이 빛깔을 달리하며 푸르러갔다.
“이대로 끝까지 살아도 여한이 없다. 정말 좋다. 무엇보다 바로 내 옆의 동료를 선물로 대할 수 있는 게 가장 좋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옆 사람을 긍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의 성공이 나의 손해가 되는 세상이다. 그러나 이곳에선 동료를 긍정하고 그 긍정을 통해 또 나를 긍정하게 된다.” 그는 니체의 말을 인용했다. “저 학자가 내 동료라는 사실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별들의 우정에서는 고독이 해소의 대상이 아니다, 고독이 친구를 갖게 되는 거다” 서로 아름다운 거리를 두고 제 몸을 빛내는 거인들의 커뮤니케이션, 연구공간 수유+너머는 공통의 리듬을 갖고 한 하늘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소수자적 고병권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지난 2006년 5월, 그는 연구공간 수유+너머 동료들과 함께 신자유주의 재편에 반대하는 행진을 벌였다. 세 개의 큰 사건이 계기가 됐다. 새만금 간척사업,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선언이다. 전라도에서 서울까지 2주 간 매일 10시간을 걸으면서 많은 슬픈 장면들을 보았다. “삶의 한계지대에 내 몰린 사람들이다. 불안정과 위기는 삶의 기본조건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매번 죽음을 체험했다. 원한과 공포, 슬픔 속에서 그들은 개발의 유혹과 같은 더 강한 환상과 허구로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있었다.”
그는 권력과 자본이 자행하는 대중들의 폭력적 추방을 보면서, 또 그에 대응하는 대중들의 악착같은 투쟁을 보면서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절망만큼이나 큰 희망을 보았다. 그 때의 귀한 경험과 사유의 결과물들을 부지런히 글로, 책으로 엮어내고 있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 대해 투쟁하는 방법이다. 새만금 사람들이 조개와 싸우듯이, 장애인이 거리를 온몸으로 기듯, 그는 펜으로 외치며 싸운다.
“슬픔의 표상을 하나로 묶고 단체로 대변하던 시대는 갔다. 전대협, 전노협이 학생을, 노동자를 대변하지 못한다. 대의의 불가능성, 대의 시스템에 질문을 던질 때가 왔다. 매 시대마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보편적 진리일수록 위험하다. 싸움의 양상은 계속 달라지고 있다. 예전의 싸움은 중단이었다. 비상사태였다. 삶의 터전을 텅 비워두고 광장에 모였다. 그러나 지금의 싸움은 그렇지 않다. 화염병 쇠파이프 등 일회성 즉자적 상황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기터전에서 살아가는 것이 존재론적으로 최고의 투쟁이다.”
그는 대중들과 만나면서 정치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현재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다. 권력과 삶이 부딪히는 영역에 대해 사유한다. 있는 권리를 누리는 투쟁이 아닌 권리의 확대와 창안에 대해 고민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어떻게 슬픔에서 기쁨으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모색이다. 전공에 구애됨 없이 니체 공부하고 싶으면 하고, 화폐가 궁금해서 경제학을 했듯이 이번엔 정치학이다. “외부에 나를 개방하고 살면 얼마든지 변화가 가능하다. 나는 매우 자연스럽게 산다.”
일상투사 고병권 “혁명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다”
매번 새로 시작되지 않는 혁명은 더 이상 혁명일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런 그에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삶’이란 무엇일까. 그는 인간답게 산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아주 정치적이고 계급적인 부분이라고 했다. 때문에 “어떤 의미에선 인간답게 살고 싶지 않다.”는 도발적 선언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를 들어 말이 다리가 네 개 이다가 하나가 부러져 세 개가 됐으면 그를 덜 말이라고 부르는가? 여전히 말이다. 그런데 사람은 덜 인간으로 취급받는다. 장애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비장애인이 되려 한다. 이처럼 인간에 대한 ‘정상인 담론’이 있어 차별을 받는 거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에서 ‘인간’의 의미를 규정하는 게 싸움이다. 인권은 권리가 아니라 능력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완전하고 결핍이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서양철학이 ‘완전성의 신화’를 만들어 냈고 그 결핍이 권력을 만든다는 것이다. 자기 자리에서 최대 행복을 만드는 게 중요할 뿐, 인간답게 산다는 건 어쩌면 폭력이다. 사상, 신념, 철학 등 인간을 규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투쟁과 싸움이란 말을 그처럼 자주 사용하는 사람이 있을까. 학생 때 운동하던 친구들이 ‘너 아직도 그러고 사니’라고 치켜세울 때는 조금 으쓱하기도 했지만 그는 사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삶을 꾸려나가는 것일 뿐 대단한 건 아니라고 말한다.
“80년대 싸웠던 선배들은 회환과 추억이 너무 많다. 그래서 새로 일어난 일을 못 본다. 국민주권을 논하기 전에 국민의 구성이 바뀐 걸 인지해야 한다. 뭘 해도 세상이 안 바뀐다는 이유로 내 삶을 안 바꾸는 게 가장 문제다. 사회악의 재생산에 일조하는 거다.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면 사소하게 홈페이지에 글 쓰는 거부터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각자가 자기 선 자리에서 ‘15도 틀기’가 이뤄질 때 세상은 바뀔 수 있다.”
인문지기 고병권 “나 창조하는 자, 추수하는 자, 축제를 벌이는 자들과 벗하리라”
고병권은 어느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말로 싸우기 힘든 것은 저 너머에 있는 적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적이고, 나를 위협하는 적이 아니라,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적이라고. 그에게도 적이 있다. 아주 문득 출연해서 순간 마음을 휘젓기도 한다. “애가 갑자기 아파서 돈이 필요한데 돈도 한 푼 없을 때. 그냥 주는 월급 받으면서 편히 살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니체가 딛고 서야 할 마지막 계단은 자기머리라고 했다. 본디 나를 있게 해주는 게 나를 제약하고 짓누르는 법이다. 그러니 생은 고민을 넘어서면 그 다음 단계는 없는 게 아니라 매번 넘어서는 거, 즉 영원회귀의 시험에 드는 거다. “이 시험을 즐겨야 한다. 그래서 충분히 강하지 않으면 철학을 하지 말라고 했다. 똑 바로 보고, 그 안에서 힘을 발견하고 키워야 한다. 가장 슬픈 것에서 명랑성을 찾아낼 줄 알아야 한다.”
사람 좋아하고 이야기 좋아하는 그는 요즘 인문학 전파에 더욱 힘쓰고 있다. “세상을 바꿀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 인문학은 무기가 된다. 인문학은 생산재다. 세계가 필요한 사람에게 사상이 던져져야 한다.”는 소신에 따른 거다. 곧 해인사 스님들에게 인문학 강의를 하러 떠난다. 내년엔 청소년 아이들과 인문학 공부를 해 볼 계획이다. 공부방, 문화센터, 교도소까지 어디든지 ‘좋은 앎’을 나눌 계획이다. “앎과 삶은 일치한다. 두 개의 바퀴다. 잘 알면 잘 살게 되고, 잘 사는 게 잘 아는 거다. 누구나 아는 만큼 행동하게 돼 있다.”
마지막으로 그에 대해 누벨바그의 거장, 트뤼포 식으로 증언해보자. 트뤼포는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고, 그 다음은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고, 마지막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니체의 저작을 두 번 이상 보았고, 니체에 관한 글을 매우 많이 썼으며, 또 다른 니체를 만들기 위해 뛰어다니는 사람 고병권. 그가 니체를 가장 완벽하게 사랑한 사람이 아닐까.
* 2007년 6월에 쓴 것입니다. 니체전집을 쩔쩔매면서 공부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와 두 차례 긴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때 나눈 이야기를 토대로 쓴 이 글은 어느 매체에도 발표하지 않고 고병권에게만 선물한 '개인소장용'원고입니다. 21세기 민중자서전을 막연히 염두에 두고 '쓰고 싶은 대로' 쓴 글입니다. 제 눈에 멋진 '민중1'로 다가온 고병권은 현재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대표로 있으며 위의 니체관련 책 2권 외에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화폐, 마법의 4중주>를 썼습니다. 곧 <추방과 탈주>가 발행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