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 공이 돌아갈지 개의치 않는다면 당신은 인생에서 그 무엇이라도 성취할 수 있다.’ 이는 내려놓아야 얻는다는 인생의 역설이 담긴 얘기다. (주)뷰쎄의 신용진 대표가 그렇다. 두툼한 손, 두꺼운 스크랩북, 두터운 신뢰로 헤어디자이너의 성공신화를 이룬 그는 승승장구의 정점에서 후배에게 자리를 내줌으로써 사업가의 안목과 꿈을 얻었다. 트렌드 변화가 심한 미용업계에서 25년간 ‘실시간 인기검색어’로 그의 이름이 오르내릴 수 있었던 비결이다.
제오헤어 압구정점. 입구에서부터 가을을 꺾어다 놓은 듯 갈대향이 은은하다. 탁 트인 공간감, 나무의 결이 그대로 살아 있는 벽면과 커다란 꽃문양은 따뜻하고 아늑한 공간미를 연출한다. 카페의 낭만과 마루의 편안함이 공존하는 자연친화적 분위기에, 그의 질박한 미소가 너무도 잘 어울린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신개념 뷰티살롱 ‘제오헤어’와 ‘프랑크프로보’ 등 30여 개 프랜차이즈를 운영하는 (주)뷰쎄의 신용진 대표다.
무명설움 딛고 미용대회 출전 그는 헤어디자이너 출신이다. 무릇 드라마틱한 스토리의 처음이 그렇듯이 그가 미용사가 된 것도 우연과 예외 속에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밥벌이를 위해 이것저것 기술을 배우던 참이었다. 자동차 정비에서부터 알루미늄새시, 파이프 공장 등을 전전했지만 무엇 하나 3개월 이상 지속하지 못했다. 어느 것도 흥미를 유발하지 못했다. 세상살이의 녹록치 않음을 알아갈 즈음 어머니가 미용학원을 추천해주었다. 남자가 왜 그런 걸 하느냐며 반발했지만 딱 한 달만 다니기로 약속하고 등록을 마쳤다. 그러나 미용학원 역시 인연이 아닌 듯싶었다. 손가락이 두꺼우니 손놀림이 둔탁하여 짧은 파머를 말기조차 힘들었다. 그런데 잘 안 됐던 게 연습을 통해 하나씩 가능해지자 재미가 붙었다. 작은 희열을 느끼면서 미용사로서 기본기를 닦아갔다.
그렇게 어렵사리 남들보다 긴 스태프 생활을 마치고 헤어디자이너가 된 그는 동료와 미용실홍보물을 들고 명동, 을지로, 남대문, 동대문 등을 발로 뛰는 등 적극적으로 고객을 끌어 모았다. ‘정성을 다해’ 고객의 머리를 해주자 단골이 늘었다. 소위 ‘잘 나가는 미용사’가 된 그는 다른 미용실로 스카우트됐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매니저가 고객을 보내 주지 않아 6개월 동안 거의 일손을 놓는 지경에 처한다. 매일 옥상 가서 먼 산 쳐다보고 눈물 섞인 한숨을 지었다고 회상한다.
“디자이너로 인정도 안 해주고 스태프들한테도 무시당하고 설움이 컸죠. 그러다가 오래 노니까 기술 잃어버리겠다 싶어서 커트 연습을 시작했어요. 미용대회 나가서 실력을 보여주자고 마음먹었죠. 또 300페이지짜리 스크랩북을 4권 만들었어요. 책에서 머리모양을 오리고 축소 복사해서 빽빽하게 붙여놓았더니 1만 스타일 정도 됐어요. 그랬더니 어떤 사람 얼굴을 보면 어울리는 스타일이 자동으로 떠오르더라고요.”
첫 살롱 오픈, 고객 없자 카메라 들고 거리로 6개월의 인내와 노력을 자양분으로 그는 국제미용대회 IOC에서 은상이라는 멋진 열매를 거둔다. 자신감을 얻고 물오른 실력을 발휘한 그는 미용계에 본격적으로 ‘신용진’ 이름 석 자 알린다. 상승무드를 타자 행운까지 찾아왔다. <자니윤 쇼>등 6-7개 방송에 출연하게 된 것이다. 유명세에 힘입어 손님이 몰려왔고 스태프 5명을 둘 정도로 미친 듯이 일에 빠져든다. 최고의 디자이너로 인정받은 그는 1990년 압구정동으로 자리를 옮겨 자신의 이름을 내 건 첫 살롱 ‘헤어케어’를 오픈했다.
“명동과 강남은 분위기가 완전 달랐어요. 고객이 머리해주면 맘에 든다고 하고는 다음엔 안 오더라고요. 처음엔 왜 고객들이 다시 찾지 않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어요. 이대로 가다가 문 닫겠다 싶어서 카메라를 샀죠. 망원렌즈로 인근지역 잘 나가는 미용실에서 나오는 고객의 머리를 일일이 사진으로 찍었어요. 그 땐 수동카메라니까 밤마다 현상해서 미용실 바닥에 쫙 깔아놓고 분석을 했죠. 한 달 반 정도 했더니 확실히 트렌드가 보이더라고요. 직원들이랑 같이 죽도록 연습했지요. 거짓말처럼 몇 달 후 매출이 두 배로 뛰더라고요.”
한번 단계를 넘어올 때마다 쉽게 된 적이 없었던 것 같다는 신용진 대표. 막 헤어디자이너가 됐을 때와 첫 살롱을 오픈했을 때 등 어김없이 위기를 겪었지만 그는 ‘고난의 시기’를 더없이 가장 값지게 생각한다. 어려움을 견디고 극복하는 과정은 기량과 내면이 한층 성숙해지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트렌드와 편안함이 공존하는 신개념 프랜차이즈 그 후로는 순조로웠다. 살롱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마침 영화 <쉬리><할렐루야><퇴마록>등의 헤어디자이너로 일하는 기회가 찾아왔다. 활동반경을 넓힌 그는 스타마케팅 등 진취적 경영으로 미용업계에서 확고한 입지를 구축하게 된다. 그리고 97년, 트렌드를 주도하는 탁월한 감각과 탄탄한 인지도를 기반으로 ‘제오헤어(XEO HAIR)’라는 프랜차이즈 사업의 닻을 띄운다. 또 한 번 사업가로서의 도약을 시도한 그는 어느 날 ‘거짓말처럼’ 가위를 내려놓는다.
“고객들이 저만 찾는 거예요. 이대로 가다간 안 되겠다 싶었죠. 매출의 반이 오너에 의해 이뤄지는 기형적인 구조를 개선하고자 일을 그만 두었죠. 그리고 제가 빠진 공백을 만회하기 위해 새벽마다 청담동과 압구정동 일대를 돌며 전단지와 리플렛을 돌렸습니다. 신규고객이 늘었을 뿐 아니라 제 그늘에 가려져 있던 직원들이 자기 색깔을 드러내고 쑥쑥 성장해나갔습니다. 모두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하니까 금방 빈자리가 메워지더라고요.”
‘사람이 가장 큰 자산’이라는 소중한 깨달음을 얻은 신용진 대표. 이때부터 변함없이 그에게 1차 고객은 직원이다. 직원이 만족했을 때 그것이 살롱을 찾는 고객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CEO의 사람중심의 가치관과 소탈한 이미지를 반영한 듯 제오헤어의 문턱도 높지 않다. 고급살롱과 같이 호화시설에 의한 소수고객의 취향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닌 다수대중에 대한 일대일 서비스가 특징이다. 매장 인테리어도 기존의 메탈과 아크릴, 유리 같은 차가운 소재에서 벗어나 친환경 소재를 택했다. 고객들이 “집안의 거실 같다”며 편안해 한다. 이러한 부담 없는 환경에 독자적인 교육시스템과 단계별 승급시험 등을 통해 배출된 인력으로 최상의 균질한 헤어서비스를 제공한다. 토종브랜드 ‘제오헤어’를 성공적으로 운영해온 그는 2005년 트렌드를 선도하는 것으로 정평이 난 세계 2위의 미용기업 프랑크프로보를 론칭하며 세계를 무대로 시야를 넓힌다.
선진기법 도입, 후배들과 미용선진화 이룰 것 “프랑크프로보는 제가 갖고 있던 프랜차이즈와 기업에 대한 개념을 바꿔주었습니다. 그곳의 환경이나 체계적인 교육시스템은 혁신적이었습니다. 제 스스로가 틀 안에 갇혀있음을 알았죠. 또 미용역사가 200년 된 프랑스 미용인들을 보면서 기본기의 중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원숭이처럼 남이 해 놓은 거 흉내만 내서는 결코 넘어설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손재주는 뛰어나서 몇 번만 보면 잘 따라하지만 스타일을 창조해내는 상상력과 창의성이 부족합니다. 한계를 알았으니 노력해야죠. 선진기법 도입과 후진양성을 통해 우리 미용산업의 발전을 이루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신용진 대표는 일 년에 대여섯 번은 프랑스와 일본을 오간다. 프랑스의 테크닉과 일본의 비즈니스 노하우를 익히고 돌아와 후배들과 귀한 정보를 나누고 꿈을 분양한다. 이미 (주)뷰쎄는 일본 삼손기업과의 자매결연을 통한 경영기법과 인성 교육프로그램을 도입했다. 뷰쎄 페스티벌 등 내부 컨테스트를 개최하고 있으며, 곧 뷰쎄미용아카데미도 개원할 계획이다. 또 단순히 지점수 늘리기에 치중하는 주먹구구식 운영에서 탈피해 체계적인 미용기업으로 이끌어가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스태프에서 헤어디자이너로, 헤어디자이너에서 CEO까지, 진화를 거듭한 신용진 대표. 그는 이제 일신의 안일을 넘어 후배들의 성장에서 보람을 느끼고 미용산업 발전의 사명감을 띤 위치에 이르렀다.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미용기업으로의 도약을 꿈꾼다. 행복하고 설렌단다. 돌이켜 보면 시시때때로 고비와 난관이 있었지만 지나고나니 “나는 운이 좋은 거 같다”고 말한다. “다행이어서 고맙고 감사하니 이뤄질 것”이라고 주문을 건다. 세련된 멋과 탁월한 감과 신비한 운을 거머쥔 그가 숭고한 꿈을 이루기 위해 천상의 복을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