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생이었다.악기 하나 둘러메고 유랑하는 무정처의 발길이었다. 물 위에 시를 쓰듯 길 위에 음악을 뿌렸다. 황금들판 물결치고 난분분 낙엽 흩날리는 가을이면 몸은 그대로 악기가 되었다. 쓸쓸함을 머금고 넉넉함을 삭히어 길어 올리면 그것은 절로 음악이 되었다.삶은 길을 주었고, 길은 자유를 허했고, 자유는 재즈를 낳았고, 재즈는 이정식을 키웠다.
세상에 없던 음악 재즈를 만나다 70년대 말 이정식이 음악을 시작했을 즈음, 재즈는 국내에서 생소한 분야였다. 재즈를 몰랐던 그는 의정부와 동두천 등 미8군부대 인근 살롱에서 연주를 하다가 미군들과 친분을 맺고 그들을 통해 재즈음반을 접했다. 이정식은 문화적 충격에 휩싸인다. 지금까지 들어온 음악들은 노래와 반주라는 간단한 구조였지만 재즈는 차원이 달랐다. 관악기 드럼 콘트라베이스 등 다양한 소리들이 어우러져 계속 연주가 이어졌다. 음악을 사랑한 스무 살 청년의 가슴은 꿈틀거렸다. 먹고 자는 걸 잊은 채 온종일 음악을 들으며 재즈에 빠져들었다. “이왕 음악을 하려면 재즈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던 중 82년에 김광섭의 KBS악단에 들어가 재즈이론을 체계화하는 행운을 얻었다.
“운이 좋았죠. KBS악단에는 국내의 일인자들만 모였으니까요. 선배들이 잘 이끌어주었습니다. 재즈는 모든 뮤지션의 꿈이니 꼭 해내라. 중간에 어려워서 포기를 할지도 모르고 배는 고프겠지만 재즈는 음악인으로서 명예와 자존심은 지킬 수 있는 음악이니 도전하라고 격려해주었습니다.”
혹독한 연습과정이었지만 재즈에 대한 갈망이 컸던 그는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빨아들였다. 주 1회 레슨을 받았는데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면 바로 다음날 다 해버리고 다음 레슨 갈 날만 손꼽아 기다릴 정도였다. 점점 숙제도 많아지고 어렵고 힘들어 그만 두고 싶을 만큼 위기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지치게 한 음악에서 다시금 위로를 받았다.
“음악은 마약 같아요.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죠. 악기를 쳐다보기도 싫고 만지는 것조차 넌더리가 나서 제쳐두었다가도 금세 찾게 되더라고요. 결국 재즈의 힘이죠. 재즈는 포근하게 어루만지고 위로해주고 강렬하게 울부짖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애틋한, 에너지가 풍부한 음악이에요.”
재즈에 혼을 불어넣다 조곤조곤 낮은 음성으로, 그는 시를 짓듯 재즈를 예찬했다. 이정식은 순수국내파 재즈뮤지션 1인자로 꼽힌다. 코드의 변화와 정교하게 밀착되어 있는 탄탄한 즉흥 연주를 들려주는 '스탠더드'한 정통재즈 뮤지션이며, 또한 프리 재즈를 구사하는 기교파이기도 하다. 색소포니스트로 무대에 서는 일 외에도 12년 째 CBS FM ‘올댓재즈’를 진행하고 있으며 수원대 실용음악과 교수로 강단에도 선다.
“재즈는 음악의 모든 이론을 알지 못하면 연주할 수 없습니다. 록이나 클래식 등 다른 음악은 원본이 있고 최대한 똑같이 그대로 따라하면 되지만 재즈는 들려오는 것에다 자기 것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그 독창적인 것을 끌어낼 수 있어야 잘한다고 말할 수 있죠. 재즈에서 ‘즉흥성’은 중요하고 그 자유로움은 재즈의 철학이기도 하죠.”
마치 끓일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김치찌개의 맛처럼 재즈는 같은 곡이라도 연주자에 따라, 또 같은 연주자라도 상황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 능란한 경지에 이르기는 쉽지 않다. 곡의 화성이 어떻게 흐르고 이럴 땐 어떤 스케일이 적합하고 어떤 스타일로 애드립을 넣는지 등등 치밀한 계산이 뒷받침 돼야한다고 그는 말했다.
뮤지션이 쉬이 다가갈 수 없는 음악 재즈는 청자에게도 낯을 가린다. 대개 음악애호가들은 이삼십 대에 록과 메탈 등 다른 분야의 음악을 섭렵하다가 중년이 되면서 재즈로 귀착하곤 하는데, 이는 음악의 깊고 풍부한 맛을 받아들일 만큼 감성이 원숙하게 무르익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진단했다. 이처럼 여백은 많고 모범답안이 없는 ‘재즈’에 대해 장콕도는 “재즈는 빈 곳을 채우고 내일의 모습을 예감할 수 있는 음악”이라고 정의했다. 세상살이의 녹록치 않음을 알아버린 나이, 삶에 대한 물음표와 느낌표가 가슴을 수놓는 생의 가을녘에 재즈는 좋은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풍요로운 황금빛 선율을 찾아 떠나다 재즈와 가을. 가을과 이정식. 이정식과 재즈. 어떤 조합도 어색하지가 않다. 계절과 음악에도 궁합이 있다면 가을과 재즈는 천생연분이다. 우주만물의 에너지가 농익어 세상이 은은한 빛을 발하는 계절에 재즈의 선율은 더욱 고혹적으로 심연을 파고든다. 10월이면 <이정식의 올댓재즈>에도 가을과 관련된 재즈음악의 신청이 밀려든다고 한다. 물론 그에게도 가을은 남다르다. 재즈 입문 전 그는 서커스음악을 하는 유랑 악단으로 전국을 떠돌았다. 이 땅의 산수절경, 사계절 아름답지 않은 날이 없었으나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들판은 그 중에서도 단연 최고였다고 회상한다. 영화 ‘서편제’의 주인공이 아리랑을 부르며 황금들판을 지나가듯 가을을 겪은 그는 들판의 풍성한 아름다움이 유독 강렬한 잔상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그 기억으로 지금도 ‘황금색’을 가장 좋아한다며 “들판의 넉넉함처럼 재즈도 마음의 풍요를 주는 것 같다”고 말한다.
“젊을 땐 가을이면 괜히 울컥하곤 했죠. 지금도 그런 맘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젠 절제할 줄 알게 됐어요. 음악도 그래요. 재즈를 하다보면 감정에 취해 오버하기 쉬운데 나이가 들면서 절제가 되더라고요. 재즈를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하거든요. 재즈연주인들의 음악스타일을 보면 연주인의 인생이 보인다고 말하죠. 저도 연주하면서 제가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껴요.”
이러한 내면의 변화는 올 들어 발매한 두 장의 음반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실험성이 강한 아방가르드 스타일의 ‘달의 착시(Moon Illusion)’와 올드팝을 연주한 ‘Oldies & Memories’가 그것이다. 특히 ‘달의 착시’는 동양적이고 명상적인 느낌이 강해 마음을 다독여주는 치유의 음악으로 사랑받고 있다. 어느 팬은 임종을 맞이할 때 ‘달의 착시’를 듣고 싶다는 숭고한 소감을 전해왔다고 한다.
이 가을, 이정식은 ‘황금빛 색스폰’ 둘러메고 ‘나’라는 우주를 향해 길을 떠난다. 자신만의 소리를 찾고자 남의 음악은 듣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음악과 색스폰 연습에만 매달리고 있다고 터놓는다. “연습을 하면 할수록 더 좋은 소리가 나고 또 하면 더 좋은 소리가 나니 안 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마냥 신기하고 신통하다는 표정이다. 갓 재즈계에 입문한 청년처럼 환한 웃음을 짓는 이정식. 그의 주름진 눈가를 타고 그윽한 가을정취가 피어난다. 글 김송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