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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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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채식으로의 이행 * 채식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지는 이삼년 됐고 실행에 옮긴 지는 이삼주 됐다. 불판에서 뜨겁게 지글거리던 돈육,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육식은 끝이 났다. 40년 넘게 이어온 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다. 생이 너무 무겁던 차다. 육신의 무게감. 최근 몸무게가 2키로 그람 정도 늘었는데 청바지가 꽉 끼어 불편했다. 의지의 둔중함. 뭐가 의적으로 수행되는 일은 없고 작업은 해도해도 쌓이니 답답했다. 왜 내 인생인데 내 맘대로 되는 게 없는가 하는 불만이 목끝까지 차오르던 차에 채식으로의 이행은, 단기간에 나의 변화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채식을 통해 나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기분을 누리게 해주었으니 매우 유효한 선택이라 하겠다. 소돼지닭. 네발두발 짐승을 안 먹고 있다. 우선은 어식은 ..
돌아나오다 아르바이트를 끝냈다. 4개월이 지났다. 사계절 같이 길고 변화무쌍했던 시간을 철수하기 위한 준비는 삼사일 전부터 시작되었다. 사무실에서 신던 신발을 집에 갖다 놓고, 컵을 치웠다. 렌즈보존액도 가방에 챙겼다. 벽에 붙여 두고 보던 '불취불귀' 시도 떼었다. 마지막 날엔 사무실에서 쓰던 다이어리와 수첩과 명함을 버렸다. 나의 필체와 기록과 신상정보가 적힌 그것이 휴지통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노라니 기분이 처량했다. 컴퓨터를 열고 문서를 정리했다. 기존에 있던 것, 내가 작업했던 것으로 자료를 나누었다. 작업폴더의 문서 100여 개를 일일이 열어보고 필요와 불필요를 구별해서, 불필요 판정이 난 것은 휴지통으로 직행. 처음에 몇 번은 클릭해서 휴지통까지 드래그하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내가 하루를 다 바쳐 ..
스마트폰으로 바꾸다 새해 들어 두 가지를 바꾸었다. 핸드폰과 안경. 핸드폰 매장 옆이 안경점이다. 순식간에 처리했다. 폴더폰에서 스마트폰으로. 흘러내리는 안경에서 흘러내리지 않는 안경으로. 안경 바꾼 거는 남들이 잘 모르고, 핸드폰 바꾼 거는 소문이 다 났다. 나보다 더 간절히 엄마가 스마트폰을 갖기를 바랐던 딸아이는 바로 내 스마트폰에 카카오톡을 깔았다. 그랬더니 상대방 폰에 내가 '새로운 친구'로 이름이 뜬 모양이다. 지방에 사는 사촌 언니에게 몇 년만에 전화가 왔고, 아들 한 살때 윗집 살던 언니한테도 "놀러 오라"고 연락이 왔다. 무슨 유적 발굴도 아니고, 오랜 인연의 부활에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스마트폰으로 드디어 바꾸었구나!" 며칠 동안 메시지가 답지했다. 웃음이 났다. 내가 마치 감옥에라도 있다가 풀려난..
나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1 대한문 앞 함께살자 농성장에 있는 의자다. 고추장이 연구실 홈페이지에 올린 사진을 보고 뭉클해서 저장해놓았는데, 시청앞을 지나면서 실물로 봤다. 한 10분 앉아 있다가 오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춥고 용기가 없어서. 비닐 천막 앞에 저 의자에 새겨진 말이 그 어떤 구호나 걸개그림보다 육박해온다. 며칠 전 어떤 공연 뒷풀이에서 이곳 농상장에 계시는 분과 담소를 나누었는데 나는, 실없이 같은 말만 반복한 거 같다. "춥지 않으세요?" "추우시죠..." "추워서 어떡해요?" 그분은 "지낼만 하다"고 하셨다. #2 마포구립강서도서관에서 강연회 사진. 나로서는 유명하지도 않은 작가와의 만남에 누가 올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많이 와주셨다.^^; 특히 할아버지가 세 분이나 오셨다. 질문도 활발히 해주시고. ㅎ..
겨울날 아침, 물고기자리 - 이안 ... 저기 하늘 끝에 떠있는 별처럼 해뜨면 사라지는 그런 나 되기 싫어요 사랑한다면 저 별처럼 항상 거기서 빛을 줘요 그대 눈부신 사랑에 두 눈 멀어도 돼 ... 나타나기만 하면 무슨 소원이든 이루어지는 요정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러나 자기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를 기억해 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중에 그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도 거의 없다. -벤야민, '겨울날 아침' 중에서 추위가 살짝 누그러진 겨울날 아침, 물고기자리를 듣는다. 책을 뒤적거린다. 이슬 한 모금 마시고 별 한번 쳐다보는 사람처럼 그런다. 노랫말이 별같다. 사랑한다면 저 별처럼 항상 거기서 빛을 줘요. 초겨울이었을까. 술 마시는데 노래가 부르고 싶어져서 불렀다. 당신도 울고 있네요. 아주 옛날 노..
선물같은 일들 '생기랑 마음달풀'에서 글쓰기 수업했던 분들과 만났다. 나의 책이 나오기를 기다려주고 발매일 날 당장 달려가서 사주고 저자 사인 받겠다며 소녀들처럼 호들갑스럽게 책을 챙겨온 그녀들. "내가 여기 오니까 작가가 된 거 같다"며 팔푼이처럼 좋아하는 나. 들고 기념 촬영. 사진에 안 나온 생기, 광년, 타기, 원사까지 반가웠고, 상다리 부러지는 음식들 맛있었고, 면전에 대고 말 못했지만 고마웠음. 나도 연말시상식에 수상의 기쁨을 일찌감치 누렸다. 연말자식사랑상. 내 표정에서 귀찮음이 얼마나 티가 났으면 딸아이가 '귀찮음 하나 없이' 자식을 돌보았다고 썼을까 싶어 깊이 반성했다. 내년에도 자식사랑상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자. 시세미나 같이 하는 바람도리님이 선물해준 장갑. 그의 동생이 몸이 불편해서 집에 있는데..
나를 떠난 일주일 # 글쓰기수업이 몽땅 다 끝났다. 연구실, 도봉여성센터, 그리고 이문동 반찬팀. 물론 반찬팀 친구들은 방금 전에도 메일이왔다. "선생님 이것 좀 봐주세요~" 무엇이든 요청가능한 이 관계가 오랠 것 같기도 하다. 밤이고 낮이고 평일이고 주말이고 나를 귀찮게 하는 친구들을 참 오랜만에 만났고, 그래서 예쁘다. 기력이 딸려 즉각 답은 못해줄 때도 많지만 그럼에도 꿋꿋이 온존재로 안겨오니, 손을 꼭 잡은 것마냥 마음이 축축한 거다. 내가 한참 힘들 때 진행한 수업이라서 애착도 미련도 많다. 도봉여성센터 수업 마치고 나오는 날은 눈물이 핑 돌아서 꾸역꾸역 웃느라고 애먹었다. 샘 책 좋아하시잖아요, 라며 도서상품권도 주고 쿠크다스 과자도 챙겨주고 립스틱도 쥐어 주었다. 또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처음 수업 ..
문필하청업자의 희비의 쌍곡선 집을 막 나서려는데 문자가 띠리릭 왔다. 아침 댓바람부터 누군가 봤더니, 어제 수업 너무 좋았다고. 그 얘기 하고 싶었다는 애정고백이다. 나도 그대들이 좋다고 화답했다. 이문동에서 오랫동안 어르신들 반찬봉사한 친구들이, 어르신들 인터뷰해서 사람책을 만들 예정인데 내가 그걸 돕는 단기강좌를 하게 됐다. 어제 첫 수업을 했다. 수업보다도 수업 후에 그 친구들이 들려준 어르신들 얘기가 난 더 좋았다. 애잔하고 뭉클하고. 그놈의 불쌍병 연민병 측은병이 또 돋아나려해서 문제지만, 나는 오래 견디는 것들에 끌린다. 아르바이트로 사보일을 하는 회사에 가는 길이었다. 업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교육을 받으러 오라고 연락이 왔다. 이번달 본부장 인터뷰 원고가 좀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담당자를 만났는데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