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올드걸의시집]


이것이냐 저것이냐
. 삶은 선택의 앙상블이다. 어떤 결정도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일은 없지만 그래도 매번 고심하게 된다. 선택이 어려운 까닭은 내 안에 머무는 것들, 내가 몸 비비고 사는 것들이 많아서일 게다. 존재가 곧 필연이고 나눔이거늘 무엇을 덜어낼까. 내게 가장 난처했던 선택은 6년 전 일이다. 집을 반으로 줄여 이사하느라 면적에 맞게 가구를 선별해야 했다. 안방에는 장롱을 놓을까 침대를 놓을까. 거실에는 소파가 낫나 식탁이 낫나. 책꽂이냐 피아노냐. 이 문제로 도면을 그려가며 수일을 고심했다. 결국 장롱, 식탁, 피아노를 싣고 왔다. 자기만의 방이 없는 내게 거실은 주무대였고 식탁은 작업대였다. 원형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거액을 주고 장만한 오래된 식탁. 거기서 아침 먹고 그릇 치우고 책 보고 점심 먹고 글 쓰고 저녁 먹고서 한쪽에 밀어두었던 책과 노트북을 펴고 긴긴 밤을 보냈다. 둥근 모서리에 배를 붙이고 앉아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이유식을 먹였던 그곳에서 나 역시 더운 밥덩이를 넘기고 매운 책뭉치를 삼키고 비린 언어들을 게웠다 

일명 생계형 글쓰기. 밥상에서 밥을 위한 글을 쓰면서 나는 밥의 절실함과 서러움을 배웠다. ‘쓰러진 것들이 쓰러진 것들을 위해서 운다. 배 굶고 아픈 것들이 더 잘 눈에 들었다. ‘빗방울처럼 몸을 둥글린 시간들을 공유한 나의 반려 가구. 그 식탁이 아프다. 의자 한 개는 삐걱 거려 두꺼운 테이프로 붙여가며 버티다가 결국 버렸다. 다른 하나는 쿠션이 푹 꺼졌다. 멀쩡한 의자가 두 개 뿐이다. 식탁도 다리 쪽 부품이 빠져서 살짝 괴었다. 내용연수 15년 만에 늙고 병들었다. 이제는 한계상황에 다다랐다고 판단하여 직사각형 식탁을 구입했다. 그런데 둥근 식탁을 내 손으로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다. 회장님 저택도 아니고 20평형 좁은 집에 식탁이 두 개다. 영화나 소설에서 두 남자와 한 여자의 동거는 더러 나오지만, 두 식탁과의 동거는 없던 설정이다. 이 난감한 상황은 정신보다 몸이 극복해야하는 문제였다. 미로찾기가 되어버린 공간을 식구들은 아랫배에 힘주고 몸을 길게 늘려 연필심처럼 날렵하게 지나다녔다 


아픈 것들이 자꾸 보인다는 그녀 배시시 웃으며 가
끔 말하네 

내가 기르는 천사 볼래?
(천사는 웬?) 

신신파스 붙여준 낡은 의자
가끔 장롱일 때도 있네

장롱 문짝에 나란하게 붙여진 신신파스 두 장
작고 흰 날개처럼 보일 때도 정말 있네  

잠도 쌔근쌔근 아기처럼 자는,
내 맘이야 얼른 몸 털어 나았으면 싶지만 

그녀가 천사를 기르지 않았으면
가구가 아픈 걸 까맣게 몰랐을 거네  

- <내가 기르는 천사 볼래?>


몇해 전 남편과의 불화 국면에서 식탁은 종종 눈물의 씨앗이 되었다
. 밥 먹는 곳에 책 좀 늘어놓지 말라는 그의 말이 그렇게 싸늘하고 서러울 수가 없었다. 식탁이면서 식탁이 아니기도 했던 모호함이 나에겐 숨구멍이었지만 그에겐 매끈히 정리해야할 간척지였다. 식탁의 난은 남편이 내 생일선물로 책상을 사주면서 종료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다시 묻는다. 언제까지 식탁을 이렇게 두려하냐고. 한층 협조적이고 다감한 어조이지만 울컥했다. 서러움보다는 구슬픔. 어쩌자고 나무토막에 살붙이 같은 정이 들어버린 마음을 나는 설명하지 못했다. 최승자 시인의 말대로 나의 존재를 알리는 데는 이 울음이라는 기호밖에 없는가. 이 혼돈과 불편, 비합리와 비효율의 상황을 설득할 수 없었다. 긴박한 궁리로 보내기를 사흘. 시세미나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 딸아이가 들뜬 목소리로 전화했다. “엄마! 동그란 옛날 식탁 버리지 않아도 되게 아빠랑 잘 옮겨놨어!” 
 

이 틈이 좋아요
내 살과 당신의 살 사이, 서로 다른 육즙의 신선한
향내
뭍으로도 가고 바다로도 가는
여기는 시들지 않는 신접살림이 바람개비처럼 까
불거리죠
이쪽이기도 하고 이쪽 아니기도 한, 소슬한 틈새의
배갯머리에서
시간이 숨구멍처럼 휘는 이곳의 혼돈이 좋아요

- <뻘에 울다> 부분


돈암시장을 지나다가
딸기 한 팩 5000이라고 적힌 좌판을 보면 발길이 멎는다. 딸기 먹고 싶다던 아이들의 말이 음성지원 되면서 지갑이 열린다. 사는 김에 단감도 같이 사고 이왕지사 채소가게에서 부추까지 산다. 까만 비닐봉지 양손에 들고 뒤뚱뒤뚱 지하철을 탄다. 그럴 때면 팔뚝 굵어지고 뒤태 무너지는 소리 들린다. 그렇게 오며가며 찬거리를 장만하고 씻고 다듬고 조리하면, 된장찌개에 두부 한 귀퉁이도 버리기 아깝다. 식구들이 남기면 원망스럽다. 아무래도 반찬가게에서 구입한 완제품 반찬은 쉬이 버린다. 아무래도 이성적 판단이라기보다 정서적 밀도와 관련이 깊다. 편리하고 합리적으로 관계할수록 과감해지고 난폭해지는 걸 느낀다. 맑스가 자본주의 분업체제에서 인간의 감성이 일면적이 된다고 우려했던 문제이기도 하다. 농부가 배추 겉껍질 하나 버리지 못하고 살뜰히 챙겨먹는 걸 생각해보면, 결국 밥에서 입까지 그 윤리적인 거리에 얼마나 참여하느냐 따라 삶의 태도와 양식이 결정되는 듯하다.

어떤 이는 눈망울 있는 것들 차마 먹을 수 없어 채
식주의자가 되었다는데 내 접시 위의 풀들 깊고 말간
천 개의 눈망울로 빤히 나를 쳐다보기 일쑤,...

문제는 내가 떨림을 잃어나간다는 것인데, 일테면 만
년 전의 내 할아버지가 알락꼬리사슴의 목을 돌도
끼로 내리치기 전, 두렵고 고마운 마음으로 올리던
기도가 지금 내게 없고 (시장에도 없고) 내 할머니들
이 돌칼로 어린 죽순 밑둥을 끊어내는 순간, 고맙고
미안해하던 마음의 떨림이 없고 (상품과 화폐만 있
) 사뭇 괴로운 포즈만 남았다는 것.

- <깨끗한 식사> 일부  

울 엄마를 비롯해 아줌마들이 늘 무거운 걸 들고 다니는 이유, 빈자리만 보면 달려가는 이유, 불어터진 떡국을 꾸역꾸역 먹는 이유 등등이 궁금했는데, 생의 비밀이 조금씩 풀린다. 엄마처럼 미련하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그러려니 무감각하게 살게 되는 아이러니에 직면한다. 그나마 딸아이가 나의 둔감함을 일깨운다. 우연히 집에서 키우기 시작한 구피. 딱 볶음멸치만한 물고기를 딸아이는 납싹이, 등싹이, 꼬리흑이로 이름을 붙여주고 조석으로 끼니를 챙기고 극진히 돌본다. 특히 생선을 먹을 때 표정이 자못 진지하다. 고등어를 보고는 납싹이의 오백년 전 조상님이라며 조심스레 살을 발라 먹는다. 납싹이가 새끼를 낳으면 엄청 흥분한다. 나 역시 점 두 개 찍힌 그 작은 햇몸들이 신통방통 신비롭고 애처로워 한참을 들여다보곤 한다.

딸아이는 새끼가 죽자 제사를 지낸다고 수선을 피웠다. 식탁 위에 양초 켜고 휴지로 싼 시신을 놓고 물고기 밥을 접시에 소복이 담아 제사상을 차리고는 나더러 백팔배를 같이 하자고 권한다. 얼결에 따라하면서 숨차고 웃기고 슬펐다. 모녀의 몸뚱이가 접혔다 펴지면서 거실 바닥이 채워졌다 비워졌다를 반복했다. ‘오십일 배.. 오십이 배.. 오십삼 배..’ 물고기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나는 그 다가옴에 응답한다. 마침내 사유 돋았다. 어항 물갈기가 귀찮다고 물고기 없던 시절로 돌아가길 바랐던 나의 게으름과 나태함을 반성했다. 내 안에 사는 것들이 다 사라지면 나라는 개체도 해체되겠구나. 인간은 항상 자기 아닌 자에게 열려있을 수밖에 없구나 등등. 납싹이 새끼의 사망이 함께-있음의 존재론까지 뻗어가자 푸푹 웃음이 났다. “엄마, 너무 작은 생명이 죽었는데 절하려니까 웃겨?” “아니, 아니...”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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