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올드걸의시집

김혜순, 납작납작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도시에서는 길을 헤매도 그다지 큰일은 아니다. 하지만 숲속에서 길을 잃듯이 도시에서 길을 잃으려면 훈련을 필요로 한다. 이 경우 거리이름이 마른 나뭇가지가 똑 부러지는 소리처럼 도시를 헤매는 이에게 말을 걸어주어야 하며, 도심의 작은 거리들은 산골짜기의 계곡처럼 분명하게 하루의 시간을 비추어주어야 한다.’

벤야민의 자전적 에세이 <베를린의 어린시절> 일부이다. 평소 싸돌아다니기를 즐겨하는 나로서는 이 암호 같은 문장에 일순 매혹되었다. 아는 길도 물어가는 게 아니고 길 잃는 훈련을 하라니…이 책에서 벤야민은 일상적인 장면을 은밀하고 정교하게 본다. 대도시의 부산함 속에서도 동상, 건물, 모퉁이, 골목 등에게 끊임없이 말하고 들으며 유년시절 이미지를 불러낸다. 집안의 가구 등 물건들과도 마찬가지. 그런데 단순히 사물과의 대화를 넘어서 기억의 결을 맞추고 꿈의 판본을 해독하는 과정은 무척 에로틱하다. 벤야민의 몸을 통과한 사물이 말을 하고 사물의 몸을 통과한 벤야민이 말을 하는 시선의 순환. 감각의 작용. 기억의 소생. 이는 또한 급진적이기도 하다. 벤야민이 어렸을 적 꿈의 에너지를 복원하는 이유는 그 잃어버린 시간에 바로 구원의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 이 세계에서 사라지고 배제되고 용도 폐기되어버린 것들의 소리를 듣는 일이 벤야민에게는 혁명과업인 셈인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가 단결하는 것만큼 내게는 실천이 막막했다.

생각해보니 나도 가끔 길을 잃는다. 혼자 운전할 때. 두물머리 드라이브 아니고 마트에 장보러 가는 길이라도 그 시간이 좋다. 어수선한 집안에서 빠져나와 아늑한 차안에 웅크리고 있자면 존재감 태동한다. 자궁 속 ‘은밀한 익사체’가 된 나. 탯줄타고 영혼에 시동이 걸리면 부르르 몸 깨어난다. 굽어보는 세상. 보이는 것이 이전과 다르다. 하루는 동네 어귀를 빠져나오는데 저 앞에서 리어카가 느릿느릿 전진했다. 아니 산처럼 쌓인 폐지가 작은 섬마냥 둥둥 떠갔다. 리어카를 끌고 있을 이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저 폐지섬을 쌩하고 앞지르자니 죄송하고 저속주행하려니 뒤에 차 눈치가 보였다. 시속5km로 졸졸졸 따라가다가 조심스레 추월했다. 어쩐지 신호위반하는 기분이 들어 오른쪽 사이드미러를 힐끔거렸다. 리어카는 차도 옆에 바싹 붙어 나를 바라보았다. 리어카 손잡이 사각 링에 배를 댄 아저씨가 꼭 대롱대롱 매달려가는 것처럼 위태롭다. 들숨날숨 뱃심으로 밀고나가는 생. 항상 노랑 유치원버스나 빨강 학원차가 아이들을 한 무더기씩 쏟아내던 그 거리. 거주연한 20년 된 동네가 한없이 낯설었다. 상어처럼 민첩하게 내달리는 차들 사이에서 점점 더 멀어져가는 폐지섬. 바라보아야 비로소 떠오르는 섬.

내가 풍경을 바라보는 줄 알았는데
풍경이 날 째려보고 있었다는 걸 안 순간 질겁했습니다
내가 성의 계단을 오를 때
내 시선의 높이가 변하면서 풍경이 다르게 보이는
줄 알았는데
줄곧 풍경이 눈빛을 바꿔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안 순간
뺨을 한 대 얻어맞은 듯했습니다

- <풍경의 눈빛> 일부

그날 이후 리어카를 자주 본다. 리어카가 나를 먼저 알은 채 한다. 나 또 왔어. 이런다. 벤야민 말대로라면, 우리는 우리를보는 것만 본다. 서울 도심에 의외로 폐지 줍는 분들이 많다. 주로는 아저씨나 할아버지. 성별분업화인가. 버스정류장에 쭈그리고 앉아서 보리, 완두콩, 호박, 가지, 냉이 파는 분들은 거의 여자다. 남자 어르신들은 죄다 어디 있나 했더니 리어카 몰고 계셨다. 며칠 전 연구실에서 집에 가는 길. 볕이 좋아 걸었다. 돈암동에서 삼선교 지나 혜화동로터리로 향하는데 한 할아버지가 구릿빛 얼굴이 되어 낑낑 리어카를 몰고 올라왔다. 연달아 또 한 대. 박수근 그림처럼 납작납작 눌린 아저씨가 이번에는 조금 작은 구루마를 끌고 출현한다. 약간 오르막이다. 이 가파른 길에 어찌된 일인가 싶어 두리번두리번 살펴봤더니 내가 걸어온 길에 폐지집하장이 두 군데나 있었다.

왜 못 봤을까. 작년 가을부터 일주일에 서너번 여기를 지나갔다. 의도적 무지. 의도적 외면인가. 아무리 버스에 앉아있었다 하더라도 창밖으로 커피전문점, 예쁜 소품가게, 음식점, 은행 등은 다 훑고 눈도장 찍어두었던 참이다. 자본과의 현혹관계에 물든 감각이 볼 수 있는 것은 이토록 뻔하다. 아마 내가 어린아이였으면 폐지집하장을 놓쳤을 리 없다. 깎아지른 절벽처럼 높게 쌓인 하얀 종이벽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테고 곱추난쟁이처럼 등 굽은 할아버지를 보았을 것이다. 어린시절 벤야민이 그랬듯이 말이다. <베를린의 어린시절>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가스버너의 지직거리는 소리같은 그의 목소리가 세기의 문턱 너머로 나에게 속삭이고 있다. 꼬마야, 부탁이니 곱추 난쟁이를 위해서도 기도해주렴!’

드문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들이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가끔 심심하면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 놓고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입술도 없이 슬그머니.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 놓고
가이없이 한없이 펄렁펄렁.
하나님, 보시기 마땅합니까?

- <납작납작-박수근 화법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