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

[올드걸의시집]


서른다섯. 일자리가 필요했다. 이력서를 썼다. 세 바닥을 채워도 시원찮을 판에 네댓 줄 쓰니 끝이다. 쉼표 없이 달려온 마라톤 인생인데 어쩜 이리도 이력서가 빈곤한가. 화폐화 되지 않는 노동-활동은 언어화도 불가능했다. 궁극적으로는 존재증명이 난감했다. 아무튼 자기소개서에 금칠과 덧칠을 해서는 두 군데 지원했다. 은행파트타이머랑 지역신문기자. 결과는 둘 다 낙방. 물 한 바가지씩 연거푸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민망하고 처량하여 고개돌렸다. 내 인생에서 슬그머니 찢어버리고픈 한 페이지. 곧이어 커피전문점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았는데 이번에는 나이제한에 걸렸다. 노년 재취업도 아니고 삼십대 중반에 이럴 수는 없었다. 그 때 확실히 알았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는 정말 늦은 거다! 젠장. 어차피 궁지였다. 인생역전이 가능한 직업도 아닌 바에야 꼭 하고 싶은 일을 하자며 입장을 굳혔다. 글밥 먹는 일을 고집했고 자유기고가 명함을 얻었다. 결초보은을 위해 밥 한 끼 대접하는 자리. 구직을 도운 선배가 평소와 달리 진지한 눈빛으로 말문을 열었다.

“지나고 보니 그동안 나한테 닥친 일을 처리하기에 급급했는데 그랬더니 남는 게 없구나. 너는 일을 새로 시작하니까 길게 내다보고 해라. 봉사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중심으로 글을 쓴다든가 분야를 정해서 집중해봐. 십년 후에 네 작업을 집대성할 수 있게 맥락을 잡아가도록 해. 나는 그런 얘기를 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장기적인 안목을 갖지 못했는데 지금 와서 후회되네.”

뼈아픈 후회의 말들. 누군가가 자기 삶을 걸고 이야기를 하는 모습은 얼마나 쓸쓸한가. 구슬처럼 흩어진 나날들 어언 20년 세월이다. 주말마다 집회 및 행사에 가느라 휴일 없이 살아온 그다. 대기업·정규직·남성 중심의 노동운동판에서 여성활동가 입지는 좁다. 조직 내부의 부조리한 문화에 가슴앓이 다반사다. 높고 큰 벽. 정면돌파 하기에는 선배의 기초체력이, 권력의지가, 약했다. 원래 목표지향적 감각이 여성에게는 부재하다. 그래서 하루하루는 바빴으나 청춘시대는 허술해진 형국이 되어버린 거다. 매일 일해도 평생 가난할 수 있듯이. 아무튼 그랬던 그가 갑자기 조직선거에 출마한다고 연락이 왔다. 영문은 모르지만 환영. 내 일처럼 들뜨고 설렜다. 나는 당장에 선배를 만나서 “뜨면 덕 좀 보자”는 조건을 내걸고 유세용 검정재킷을 사주었다. 선배는 좋아라 고마워하며 출마 결심의 변을 터놓았다.

“오랜만에 친구 어머니 댁에 갔는데 회 뜨고 매운탕 끓여서 한 상 차려주시는 거야. 횟집 하면서 밭 가꾸고 여전히 그 많은 일을 다 하시더라고. 이제 연세가 있는데 좀 쉬시라고 했더니, 어머니가 그러더라. 가만히 있으면 뭐하느냐고, 사람은 ‘나쁜 짓’이라도 해야 한다고, 그래야 하나라도 배울 게 있다고. 와, 그 말을 듣는데 정신이 번쩍 들더라. 나는 나이도 젊은데 잔뜩 움츠리고 살았더라. 항상 방어적이었지 망가지고 실패하고 상처받는 상황에 나를 한번도 놓아둔 적이 없었더라고.”

서성거렸다, 꽃이 지는 시간을
빗방울과 빗방울 사이를
가랑비에 젖은 자들은 옷을 벗어두고 떠났다
사이만을 돌아다녔으므로
나는 젖지 않았다 서성거리며
언제나 가뭄이었다
물속에서 젖지 않고
불속에서도 타오르지 않는 자

- <청춘1> 부분

어느 필모의 인생철학 “나쁜 짓이라도 하라”는 말이 선배의 생을 등 떠민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 맞장구쳤다. “어, 그거 니체가 한 말인데? 악행이라도 저질러라.” 그렇다. 니체는 악행을 권한다. 속 좁은 생각을 하느니 차라리 악행을 저지르는 게 낫다고 한다. 행위의 과정에서 문제를 터뜨리고 해결해주고 다른 지평이 열리기 때문이다. 또 작은 악행의 쾌감이 큰 악행을 막아준다고 했다. 더 엄밀히 말하면 니체에게는 악행도 선행이다. “악행과 선행 사이에는 종류의 차이란 없다. 기껏해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삶의 유용성 전략에 따라 이뤄진다. 악행과 선행은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것으로 어떤 상황에서는 복수, 악의, 교활 같은 악한 모습을 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동정, 희생, 인식의 선한 모습을 띤다고 본다. 니체에게는 행-하기, 의욕-하기가 중요하다. 자기보존은 죽어있는 상태이며, 살아 있는 것은 본디 주인이 되고자 하고 더 강해지기를 원하는 의지작용을 일으킨다는 것. 일명 ‘힘에의 의지’로 니체는 세계의 작동원리를 설명한다. 온몸이 귀가 되어 니체의 철학을 빨아들이던 선배는 그럴수록 어머니의 지혜에 탄복했다. 나도 신기했다. 서해안 작은 섬에서 평생을 살아온 분이다. 나쁜 짓이라도 하는 게 낫고 그러면서 하나라도 배워야한다는 믿음. 그 ‘깨달음의 높은 돛대’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모진 풍파를 겪으셨을까.

흰 셔츠 윗주머니에
버찌를 가득넣고
우리는 매일 넘어졌지

높이 던진 푸른 토마토
오후 다섯 시의 공중에서 붉게 익어
흘러내린다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해
열쇠 잃은 흑단상자 속 어둠을 흔든다

우리의 사계절
시큼하게 잘린 네 조각 오렌지

터지는 향기의 파이프 길게 빨며 우리는 매일매일

- <우리는 매일매일>

선배는 선거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로 부위원장에 선출됐다. 더 이상 젖지 않는 자, 불타지 않는 자의 모습은 없다. 지금은 환희에 젖고 의욕에 불탄다. 내부 상황은 어지럽지만 해보고픈 일 해나가겠다며 악행론을 폈다. “정말 그렇더라. 내가 조직에서 고립됐을 때 그들의 악행 덕분에 대학원에서 공부할 결심도 했고 또 내가 채용직 활동가라는 관례를 깨고 선거에 나가는 악행을 저질러서 조직에서 여성운동 해볼 기회가 마련됐고. 악행이 꼭 악행이 아니더라고.”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니체 깔대기로 마무리했다. “그래서 니체가 창조하는 자만이 비로소 어느 것이 선이고 악인지를 결정한다고 했지.” 선배는 당선 후 어느 매체와 인터뷰를 했다며 기사를 보여주었다. 몇몇 문장이 눈에 띄었다. ‘ 경계에 놓인 사람으로서 그 경계를 없애는 역할을 하고 싶다… 노동운동 내 자본주의적 질서를 없애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월가 점령시위에 참여했던 한 여성활동가가 ’저항을 통해 이루려는 것은 저항의 과정에서도 실현돼야 한다‘는 말을 전하며…’ 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오르락내리락 밀어가며 세 번쯤 읽었다. 검은 기계가 ‘주황 지느러미가 빛나는 금붕어’ 같은 어록을 쏟아냈다. 아름다운 힘들의 바다. 우리의 철학자 니체-어머니의 말이 쏴아쏴아 파도쳤다. 머뭇거리는 생이여, 늦었다고 생각할 때 재빨리 악행을 저질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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