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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봄이 와도 봄은 오지 않고 / 이태수 '바람이 분다'

 

 

봄이 와도 봄은 오지 않고
내 마음의 깊은 골짜기, 바람이 분다.
지난해 사시사철 잉잉대던 그 찬바람이 분다.
그는 돌아오지 않고, 그를 기다리는 마음은
이토록 붉은데, 세상은 여전히 뒤죽박죽 돌아간다.
사람은 벌써 그를 까마득히 잊어버렸는지,
그도 이젠 어디로 영영 가버렸는지, 꿈속에서조차
보이지 않는다. 기다리던 봄이 다시 오고
산과 들판, 뜨락에 갖가지 꽃이 피었는데도
내 마음에는 봄이 돌아오지 않는다.
풀잎도 꽃들도 안 보이고, 냇가의 얼음도
처마 밑의 고드름도 녹지 않는다.
거리로 내몰리는 사람들의 처진 어깨,
초점 잃은 눈동자, 그래도 아랑곳없는 사람들.
공장의 기계들은 잠을 자고, 집들이 흔들린다.
거리에서 새우잠을 자는 사람들은
가슴에 별빛을 끌어들이지만, 따스한 밥을 꿈꾸지만,
밥그릇을 사이에 둔 아귀다툼이 날로 드세진다.
벼랑에 선 사람들의 아우성과 그 아우성 사이로
여전히 찬바람이 분다. 눈보라가 몰아친다.
봄이 왔는데도 봄은 오지 않는 이 세기말의
어둠 한가운데서 그래도 하염없이
봄을 기다린다. 그를 기다린다.

 

- 이태수 시집 <내 마음의 풍란>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