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기 없는 낭랑한 울림, 달착지근한 깊은 맛, 꼿꼿한 선비의 품격. 배한성의 목소리는 지적이고 맛깔스럽다. 이는 삶의 반영이다. 그는 ‘배한성 대본은 너덜너덜하다’란 말이 나돌 정도로 자신의 일에 엄격했고, 민속품, 도자기, 고가구 전시회를 열만큼 우리전통문화에 대한 사랑이 깊다. 공명정대와 온고지신의 인생철학은 그의 목소리에 깊은 울림과 향기를 불어넣었다. 지난 40여 년 우리 곁을 지켜온 국민성우, 배한성을 만났다.
"오래 일한 게 자랑은 아니다...
정정당당 실력으로 일한 게 훈장이다."
봄이 올락 말락 하는 길목, 여의도 KBS본관에 화사한 웃음꽃이 무리진다. ‘가족오락관’ 녹화를 마친 배한성이 막 건물을 빠져나오는 방청객과 마주쳤다. “어머니들, 아직도 안 가셨수? 조심해서들 가세요.” 그가 인사를 건네자 “저희랑 사진 한 장 찍어주세요.”라며 주부팬들이 모여든다.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져 정겨운 장면을 연출한다. 언제나 친근한 미소와 미더운 목소리로 기분 좋은 만남을 이끌어내는 그다.
배한성은 서라벌예술대학 방송연예과를 졸업하고 1969년 동양방송 2기 성우로 데뷔하였다. 그간《아마데우스》《맥가이버》《굿모닝 베트남》등의 수많은 외화에서 주인공 목소리로 출연했다. 성우뿐만 아니라 교통방송의 라디오 교통안내 프로그램《함께가는 길》을 16년 간 진행했다. 현재는 CBS FM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를 맡고 있다. 부침이 심한 방송계에서 여전한 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친다. 어느 덧 예순을 넘긴 그는 “노구를 이끌고 낑낑대고 있다”며 운을 뗐다.
고시생 법전처럼 너덜너덜한 ‘배한성 대본’
“사회가 조로화 되어 가니까 나이 많은 게 적인 시대죠. 저마다 경쟁력을 얘기하고 몸값을 말합니다. 저는 40년 째 방송생활을 합니다만 애초부터 지연, 학연 등 소위 말하는 빽이 하나도 없었어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좋은 여건에서 공부하지도 못했고요. 다들 저보고 목소리가 좋다고 하는데 성우에게 목소리는 좋은 조건의 하나입니다. 결코 전부는 아닙니다. 저는 ‘남과 다르게 하자’라는 것을 모토로 일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창조성이 중요합니다. 차별화를 시도해야죠. 제 경우는 배한성의 대본은 지저분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나만의 색깔과 연기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가 맥가이버 더빙할 때를 예로 든다. 보통의 경우 성우들은 프로그램을 한 시간 시사하고 녹음을 한다. 하지만 그는 대본과 테이프를 미리 받았다. 그리고 여러 번 돌려봤다. 프로그램을 보면서 ‘한쪽 눈을 찡긋했다.’ ‘손을 흔들었다.’ 등등 인물의 표정과 억양, 몸짓을 대본에 깨알같이 기록했다. 대본은 금세 손때가 묻고 고시생의 법전처럼 너덜너덜해졌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그를 있게 한 배한성 대본이다.
그렇다고 일벌레처럼 일만 파고든 건 아니다. 배한성은 미술품, 공예 등 고가구 수집가다. 그가 우리 것, 전통의 아름다움에 반해버린 건 초등학교 시절 창경궁에 갔을 때다. 당시에는 창경원이라 해서 동물들도 있었다. 하지만 어린 성한의 마음을 지배한 것은 호랑이보다 더 위엄 있는 웅장한 궁궐, 그리고 앵무새보다 더 빛깔고운 형형색색 단청이었다. ‘문화적 충격’을 경험한 셈이다.
“누가 저보고 DNA를 타고났다고 하던데 그런가 봐요. 자꾸 그런 쪽으로만 눈길이 갔어요. TBC 동양방송 신입 성우 시절에도 점심시간이면 인사동엘 갔어요. 당시 수입으로는 물건을 사는 건 엄두도 못 냈지만 날마다 나갔지요. 그렇게 고미술을 보러 다니면서 안목이 길러진 거 같아요.”
그의 첫 구매품은 엿장수 아저씨에게 산 화류장이다. 누가 내다버린 거라 값이 무척 쌌다. 기쁨에 들뜬 그는 값이 비싸 먹기도 힘든 호두와 잣을 사서 기름을 짜내 화류장을 닦았다고 회상했다. 그 후로 지속적으로 고가구 거리를 시계추처럼 오갔고, 돈이 생길 때마다 ‘골동품’을 하나 씩 사 모았다. 고가구에서 도자기, 민속품으로 꾸준히 관심의 지평을 꾸준히 넓혀간 것이다.
40년 일과 사랑 자축하는 ‘옛 사랑전展’ 열어
“갈수록 우리조상의 예지와 미감의 세계에 빠져들게 됐습니다. 오묘하고 깊거든요. 기계로 찍어낸 게 아니라 손맛이 살아있죠. 다 달라요. 같은 게 없어요. 이목구비가 반듯반듯하고 작지만 당당하고, 소박하면서도 귀티가 흐르죠. 무늬 하나도 예사롭지 않아요. 보고 있으면 아주 신기해요. 편안하면서 여유가 생기죠.”
지극하고 정성스러운 그의 고미술 사랑을 지켜본 어느 지인이 물었단다. 이런 취미생활이 연기에도 도움이 되느냐고. 그는 “그렇다”고 자신한다. 반듯하면서도 여유 있고 위엄 있으면서도 온화한 우리 옛 것을 감상하노라면 내 연기도 저렇게 닮아가야지 하는 마음이 들더란다.
“선비정신의 뜻과 기품이 우러나니까 그 기운을 아무래도 조금씩 받지 않겠어요. 선비처럼은 아니더라도 껄렁껄렁 살지는 말아야지 생각했죠.”
사실 방송인은 분주하다. 일정도 불규칙하다. 취미생활의 짬을 내기가 그리 쉽지 않다. 더군다나 그는 교통방송에서 16년 간 생방송을 진행했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오히려 바쁘기 때문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고. 어디 멀리 여행을 떠나기도 어려운 형편 아닌가. 그래서 어쩌다가 자투리 시간이 나면 어김없이 고미술품을 만나러 달려갔다. 육체적인 떠남이 허용되지 않는 조건이 오히려 ‘영혼의 나들이’를 더욱 부추긴 것이다.
“물론 아주 비싼 건 못 샀어요. 지금도 콜렉터 수준도 못되고요. 자잘한 거까지 한 80여 점 있나요. 그냥 좋아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좋아하는 관심사에 빠지고, 원하는 것을 얻고, 하나하나 자식처럼 보살피면서 얻은 게 많아요. 에너지가 충전되죠. 한국적 미감은 무궁무진 하거든요. 그 힘으로 방송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긴 세월, 즐겁게 때론 눈물겹게 모아온 고미술품들은 평소 집에서 세간으로 사용한다. 꽃도 올려놓고 못도 넣어두고 약도 보관한다. 그러다가 지난 2006년 11월에 그의 분신들이 대대적인 외출에 나섰다. 아트선재센터에서 전시회를 연 것. 배한성의 40년 일과 사랑 ‘옛사랑 展’이다. 엔틱가구부터 서안, 약장, 지장책장, 백자누리 해태연적, 백자 항아리, 돌거북 조각상, 찬탁 등을 전시했다. 그 즈음 발간한 자서전 <열정을 담은 천의 목소리, 배한성>의 출판기념회도 함께 했다. 그는 ‘40년 간 열심히 살아온 나를 칭찬하고 기념하기 위한 이벤트’ 였다고 소회했다. 그에게서 당당한 눈빛과 나지막한 미소가 스친다.
정정당당 노력으로 ‘박수 받는 삶’ 일궈내
“중학교 때 신문배달을 했습니다. 당시 3·15 부정선거도 있고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죠. 부정, 부패, 복지부동과 같은 말들이 신문지면을 뒤덮었습니다. 그런 걸 보면서 반면교사로 많이 배웠던 거 같아요. 우리사회에 부정부패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과거에 비하면 점점 투명해지고 있다고 봅니다. 또 다행히 제가 일하는 방송 쪽은 비교적 공정한 편입니다. 실력으로 승부를 하지 않으면 살아남질 못하거든요. 제가 방송인으로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정정당당한 노력 때문입니다. 손가락질 받는 삶을 택할 것인가, 박수를 받는 삶을 택할 것인가는 중요합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과정에서는 모르지만 나중에는 결과가 말해주거든요.”
오래 일한 게 자랑이 아니라 실력으로 했다는 점을 명예로운 훈장으로 여긴다는 배한성. 그는 현재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때문에 항상 자신을 최고의 고급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경주한다고 말했다. ‘포장도 새롭고 안을 열어보니 내용도 새롭더라.’는 말을 듣도록 말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지금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 최고가 될 것이다’라는 오프라윈프리의 말을 전하며 인생 9단의 단단한 소신을 밝혔다. 최선의 삶에서 우러난 최고의 목소리가 도톰한 봄 햇살 사이로 스민다. 김송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