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경력 14년, 정치부만 9년 차다. 여의도가 들썩일 때마다 그의 펜도 춤을 추었다. 일 년에 1500건, 하루 세끼 밥 먹듯 기사를 써왔다. 제 31회 한국 기자상도 받았다. 언론계와 정계에선 이미 ‘나비처럼 취재해서 벌처럼 쓰는’ 맹(猛)기자로 통한다. 논리 날카롭고, 유머 풍부하고, 인물 훤하다. 연합뉴스 정치부 맹찬형 기자. 기억해두자. 호통 찬형? 소통 찬형!
석가탄신일, 오후 7시 서울의 한 초등학교. 하늘엔 눈물이 그렁하고 바람은 쌀쌀하다. 텅 빈 운동장엔 나뭇잎만 가냘프게 몸을 떨고 있다. 5월의 한 복판에 가을내음이 진동한다. 운치 있다. 귀밑부터 흰머리가 번식하는 불혹의 그가 벤치에 기대어 앉으니 전체적인 풍광은 한결 그윽하다. 웃으며 한 컷, 걸으며 한 컷, 기대어 한 컷. 그가 액션을 취할 때마다 세상은 기꺼이 코러스를 넣어준다. 어둑해지기 전에 서둘러 사진촬영을 마치고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하러 가는 길, 기다렸다는 듯 빗방울이 손등을 적신다. 그렇게 ‘비와 당신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졸음수강생 2명, 입사수강생 3명 배출
“며칠 전에 강의를 하는데 두 명이 졸더라고요. 그동안 조는 사람은 없었는데 그 날은 오십 명 중에 두 명이나...(웃음)”
민언련의 대학언론강좌와 글쓰기강좌 강사를 맡고 있는 맹찬형 회원. 2004년부터 연6회 정도 강의를 하는데, 그간 수강생들의 수업태도는 매우 양호했다고 한다. 게다가 수강생 제자들 중 3명이나 연합뉴스에 입사했다는 깜짝 통계치를 제시한다.
“근데 그 때 저한테 배운 내용이 기사작성에 도움이 됐다는 말은 아무도 안 하더라고요.”
그래도 좋단다. 사실 강의가 기사 쓰기보다 더 힘들긴 하지만 가진 걸 나눌 수 있는 소통의 자리니 값지다고 말한다. 대화 첫머리부터 ‘졸음수강생 발생사건’ ‘수강생 입사사건’등 맛깔스런 안주거리를 꺼내놓은 그는 곧 ‘핫이슈-맹찬형’의 자전적 스토리를 풀어갔다.
그가 기자의 꿈을 꾼 건 스무 살이 넘어서다. 엄혹하던 시절, 문패도 번지수도 변변히 없는 지하서클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철학도는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한다. 장소는 강원도 양구. 산간벽지에서 밤새 보초 서다보면 고참은 옆에서 코를 골고... 멀뚱히 서서 “할 일이 없으니” 주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난 세월을 반추하고 앞날도 계획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생이 온통 물음표와 느낌표로 가득한 불안한 청춘에겐 오직 ‘진로모색’이 주된 화두였다.
사회부 동료기자와 특종 쾌척, 상금은 酒님께
"밥벌이도 하면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최적의 직업은 ‘기자’라고 판단했습니다. 일이학년 때는 학사경고도 받고 성적이 엉망이었는데 복학 후에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재밌더라고요. 내리 과수석을 했지요. ‘인식론’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던 게 기억에 남아요. 그 때 치열하게 배운 것들이 지금 기사 쓸 때도 도움이 많이 됩니다.”
열렬히 사유했고, 유유히 합격했다. 94년 2월 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연합뉴스에 입사했다. 호남취재본부에서 2년 6개월을 보내고 96년11월부터 만 3년간 사회부에서 근무했다. 현장경험도 충분히 쌓고 일에 대한 재미도 한창 무르익을 물오른 7년 차, 그는 특종을 터뜨렸다. ‘기름대신 물주입-어이없는 공군기 추락원인’ 기사다. 사회부 동료 김병수 기자가 기초조사를 마치고 그가 집요한 취재과정을 거쳐 특종으로 엮은 것. 이 기사는 당시 ‘맹물 전투기’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며 한동안 우리사회를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그는 김병수 기자와 함께 한국의 퓰리처상으로 불리는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이 밖에도 ‘삼성언론상’, ‘홍성연언론상’ 등 총 8개의 상을 수상했다. 거의 조용필의 전성기 수상기록을 능가하는 수준이다. 물론 상금도 꽤 짭짤했다. 한국기자상으로 일천만 원을 받았는데 “전액 술값으로 나갔고, 집에는 현금서비스로 50만원을 급조달해 갖다 주었다.”고 터놓는다.
“정치인은 오직 정치적 선택으로 말한다.”
이후 99년부터는 줄곧 정치부 소속이다. 새정치국민회의 말기부터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통합민주당 등 맹찬형 회원은 독특하게도 한 개 정파만 맡고 있다. 정당 역사의 산증인인 셈이다. 때문에 초선이나 재선의원들은 ‘과거’를 속속들이 잘 아는 그를 약간 부담스러워할 정도라고 한다. 실제로 386의원들을 향해 애정의 쓴 소리도 거침없이 해대는 그다.
“얼마 전 추미애의원을 만났는데 아픔을 겪고 나더니 한결 깊어진 게 느껴졌습니다. 학생운동만 하고 사회경험을 못한 정치인들도 이번 낙선기회를 인간적 성숙의 기회로 활용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카펫 펴놓으면 두루마기 입고 등장해서 연설만 하면 됐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거든요. 한 번은 의원들 모인 자리에서 ‘386대표주자들은 총학클럽에 불과하다.’ 고 말했더니 그 자리에 있던 보좌관 등 당직자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더라고요.(웃음)”
뒷담화가 아니라 면전담화다. 비판의 핵심은 일부 386의원들의 ‘서클주의’다. 과거의 동지였다는 이유로 그릇된 정치적 판단이나 선택도 감싸는 행위는 서클주의에 매몰돼 대중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것. 매사 이런 식으로 하도 신랄한 직언을 서슴지 않자 막역지우인 임종석 씨는 그에게 “너처럼 386의원들 욕하고 다니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무려나, 정치인은 오직 ‘선택’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정치적 선택, 삶의 선택이 바로 그 사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후배기자들이여, 한 건 하고 싶을 때 참아라!
“사실 ‘유권자는 단 한 번도 보수화된 적이 없습니다. 진보세력이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데에 따른 유권자의 적극적 포기일 뿐이죠.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 유권자가 ‘보수화 됐다. 무관심하다’라고 책임을 돌리는 건 잘못이죠. 그런 논리는 옳지도 않고 그 틀에서 사고해봐야 답도 안 나옵니다. 암튼 386의원들은 대거 탈락했지만, 그 세대들 자녀교육 하나는 잘 시켜놓았습니다. 쇠고기정국을 주도한 어린 학생들에게서 희망을 봅니다.”
한편 언론계와 정치계의 접점에서 일하는 그가 새 정부 들어 느끼는 안타까움은 더 크다. 지금처럼 드러 내놓고 언론과 정권이 챙겨주고 도와준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언론시장 개편과 관련된 거래도 짐작할 수 있다며 “언론계 내에서는 이를 당연시하는 분위기”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대선과정에서 사주와 편집국의 직렬체제가 강고히 된 후 이런 풍토는 더욱 노골화됐다고 한다. 잠시 후 그가 담배를 꺼낸다. “건너편 자리에 있던 ‘영유아’가 이제야 갔다”는 말과 함께.
쉼 없이 레이더를 돌려 사방을 살피는 오지랖 정신, 철학으로 다져진 냉철한 이성, 대중에 대한 무한한 신뢰, 일에 대한 단단한 자부심 등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자스러움’으로 무장한 그에게 ‘좋은 기자되는 법’을 물었다.
“기자의 제1조건은 체력입니다. 글재주, 분석력, 예리함 다 좋지만 타고난 건강체가 아니면 힘듭니다. 또 (특종)한 건 하고 싶은 유혹이 있을 때 참아야 합니다. 자기이름 걸고 쓰는 거니까 한 건 하는 거보다 독자들로부터 신뢰 쌓는 게 훨씬 중요합니다. 회사를 떠나서 개인의 네임밸류를 지켜야합니다.”
“정치커뮤니케이션 공부하고파”
맹찬형 회원은 대학 때 같은 지하서클에서 운동하던 동갑내기 친구와 결혼했다. 반평생 든든한 동지로서 그의 곁을 지키는 그녀는 민언련 전 협동사무처장이자 신문비평분과의 대모로 불리는 김은주 회원이다. 그가 민언련 회원이 된 것도 아내 덕분이다.
헌데 한동안 “아내를 민언련에 빼앗겼다”며 ‘잃어버린 10년’을 호소하던 그가 요즘은 즐거이 외조를 돕는다는 후문이다. 신문분과 출신 언론인 모임에 아내를 대신해 참석하는 것. 물론 처음엔 아내 후배들의 위탁관리 차원에서 만났다. 그런데 점차 동종업계 종사자들의 세대를 넘는 우정의 회합으로 자리 잡아 “최소 분기에 1회 정도 모임을 갖는다”고 한다.
폭탄주 안주삼아 벗을 마시며 긴 밤을 보내는 낭만논객 맹찬형 회원. 술 가뭄 없는 날들을 보내면서도 어김없이 7시 30분이면 국회를 통과하여 하루를 여는 그는, 앞으로 “정치커뮤니케이션 공부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다.
“정치공간은 소통이 잘 안 됩니다. 거기서 항상 사고가 나고 말썽이 생기죠. 왜 그런가에 대해서는 제가 체험적으로는 안다고 생각합니다.” 소통정치전문기자 맹찬형, 기억해두자. 글 김송지영
*민주언론시민연합 회원통신 '날자꾸나 민언련' 2008. 6
# 맹기자님과 인터뷰를 한 건 5월 12일. 한달 전이다. 촛불이 소녀들에 의해 막 점화되고 예쁘게 타오르던 즈음이다. "대중은 보수화된 적 없다"는 그의 말을 새록새록 확인해가던 한 달이었다. 386의원과의 친한 386기자인 그가 권력의 자장에 '통합'되지 않고 외부의 시선을 유지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