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를 사랑한 성대모사 논객, 배칠수 10년 전, 그는 한 뮤지션의 패러디로 이름을 알렸다. 곧 웃음주고 사랑받는 방송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행보는 남달랐다. 장시간 연출된 다이내믹한 ‘고화질 쇼’ 대신 짜릿한 몰입의 기쁨을 주는 ‘생방송 라디오’를 고집했다. 시청자의 변덕스런 리모컨 작동으로 마모되는 게 아니라 청취자의 진득한 주파수 선택으로 신망을 쌓아갔다.
깨어 있는 의식과 재치만발 입담으로 김대중, 손석희, 허재 등 다양한 인물을 흉내 낸 그는 성대모사의 달인으로 등극했다. 경계를 가로지르는 ‘그 분, 목소리’ 따라 상상의 말풍선을 띄우다 보면 웃음보가 절로 터지고, 갑갑한 시사문제의 체증이 풀린다는 평을 듣는다. 진중함과 유쾌함을 두루 지닌 배칠수. 그는 어느새 상종가를 구가하는 우리시대 ‘라디오 빅스타’가 되었다.
SBS 목동사옥. SBS FM 103.5㎒ <배칠수·전영미의 와와쇼>방송이 한창이다. 금요일 오후인 만큼 여러 명의 게스트가 나와 기타치고 노래 부르는 등 흥겨운 자리가 마련됐다. 자칫 산만해지기 쉬운 여건이건만 그는 ‘식초 한 방울’ 같은 말 한마디로 분위기를 산뜻하게 넘기곤 했다. 그렇게 두 시간 여 방송을 마쳤다. 그의 주위로 막 연주를 마친 악기처럼 미세한 파장이 감돌았다.
“라디오는 현장감이 살아있어요. 제가 방송 한 시간만큼이 전부잖아요. 입 밖으로 뱉은 말이 100% 나가죠. 멈칫해서 타이밍을 놓치면 안 되니까 찰나의 싸움이기도 하고요. 두 시간 동안 집중하는 게 간단치 않은 일이예요.”
SBS <배칠수·전영미의 와와쇼>103.5㎒ 최장수 진행
2002년부터 6년째 그는 <배칠수·전영미의 와와쇼>를 맡고 있다. SBS FM103.5㎒에서는 최장수 프로그램이다. 일 년에 두 차례 개편 때마다 프로그램과 진행자 교체가 잦은 방송사의 특성을 감안할 때 이는 극히 드문 경우다. 그는 또한 MBC <최양락의 재밌는 라디오> ‘3김 퀴즈’에도 7년 째 고정출연 중이다. 진행자 최양락이 퀴즈를 내면 그가 DJ, YS, JP의 성대모사로 답을 맞추는데 가장 인기가 높은 코너다. 이밖에도 MBC FM<배철수의 음악캠프> KBS FM <황정민의 FM대행진>등의 게스트를 맡고 있다. TV프로그램은 <정선희 이재용의 기분 좋은 날>에 출연한다.
이렇듯 배칠수의 방송활동은 라디오의 비중이 월등히 높다. 주로 교양프로그램의 나래이션과 성대모사로 전부 생방송이다. 여럿이 나와 온몸 개그를 선보이는 TV 예능프로그램은 거의 출연하지 않는다.
“저는 철저히 라디오가 중심이에요. 나름대로 소신껏 지켜온 노선이지요. 라디오가 더 좋으니까요. 소위 잘 나가는 예능프로에서도 섭외가 많이 오는데 다 거절해요. 그것 때문에 욕도 많이 먹었죠. 글쎄요. 열심히 했으면 어쩌면 대박이 났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대여섯 시간씩 녹화가 늘어지는 예능프로그램이 기질에 맞지 않더라고요. 성격이 급해서 그런지 정해진 시간 동안 열심히 하고 딱 끝나는 게 좋아요.”
비유하자면, 오래 찍고 길이 남는 영화보다는 한 번 불꽃처럼 생의 에너지를 태워버리는 연극 같은 삶을 선호하는 셈이다. 그런 열정 덕분에 그는 MBC 연기대상 라디오부문 특별상(2005), SBS 연기대상 라디오부문 우수상(2002), MBC 코미디대상 신인상(2003) 등을 수상, 라디오 진행자로서 확고한 입지를 구축했다.
“자극적 예능프로보다 친근한 라디오가 우선”
그의 본명은 이형민이다. 사회체육을 전공한 그는 한때 헬스클럽의 오너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1999년, 인터넷음악방송 레츠캐스트에서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패러디한 '배칠수의 음악텐트'라는 음악과 시사패러디를 결합한 내용으로 인터넷 방송계에서 대박을 터뜨리며 주목받았다.
예전의 한 인터뷰에서 그는 아버지도 남의 목소리 흉내 내는 걸 잘 했다며 아무래도 “타고난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개그맨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는데, 몸이나 표정으로 웃기는 슬랩스틱 코미디에는 재능이 없는 것 같아서 치열하게 성대모사를 연습했다고. 그가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는 성대모사는 “완벽해지려면 최소한 몇 달은 걸려야 나온다.” 또한 시사정보 파악을 위해 아침에는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듣고 밤에는 ‘마감뉴스’는 꼭 챙겨본다고 한다.
타고난 끼를 씨줄로, 꾸준한 노력을 날줄로 인생의 황금기를 엮어가는 배칠수. 그는 자고나면 위대해지고 자고나면 ‘용도폐기’되는 방송계에서 어느새 10년을 넘겼다. 세월 따라 한 겹 한 겹 축적된 관록은 그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확립해주었다. 연예인임에도 유능한 직장인처럼 큰 굴곡 없이 점진적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편안하고 익숙한 것’과 ‘지루한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연예계는 들어오기는 무척 힘들고 쫓겨나기는 엄청 쉬워요. 어렵사리 데뷔한다고 해도 굉장히 성공확률이 낮은 게임이죠. 방송에서 필요 없는 사람을 왜 쓰겠어요. 예쁘게 출시되는 신차가 항상 대기 중인 상황과 같은 거죠. 자칫하다간 구형 그랜저처럼 돼요. 고급차인 것은 맞고 기름도 세금도 많이 드는데 아무도 찾지 않는 묘한 상황이 되기 십상이에요. 연예인이 선택당해 쓰이는 건 운명이에요. 그런데 능동적으로 쓰여야죠. 기회가 찾아왔을 때 재밌어서 못 빼도록 그 기회를 딛고 활용해야 합니다.”
직업으로서 연예인의 이런 처지에 대해 누구는 불안감을 동력으로 삼는다고도 말한다. 안 넘어지려고 중심을 잡으면서 잠재력의 최대치를 뽑아낸다고 얘기한다. 또 예술가는 배가 고파야 한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일상의 여유로움 속에서 우러나는 잉여감정, 즉 안정적인 환경에서 더 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시사풍자 프로그램 진행자로서 원칙을 밝혔다. 마음속으로는 지지하는 쪽이 있지만 표현하지 않는다. 그걸 드러내는 순간 자신이 하는 풍자는 더 이상 풍자가 아닌 ‘편들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노골적 ‘편들기’로 도덕성을 잃어가는 언론계의 현실을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요즘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문화제’를 폄하·매도한 기사를 볼 때마다 몹시 씁쓸하다고.
과거청산도 건강한 보수도 없는 정치판 아쉬워
“우리 사회는 여러 가지 문제가 고리처럼 연결돼 있습니다만 과거청산이 가장 시급한 것 같습니다. 과거가 청산되지 않고는 밝은 미래도 없습니다. 과거 청산하지 말자는 사람은 다 과거가 부도덕한 사람들이죠. 또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에 건강한 보수가 없다는 점이에요. 원래 보수는 국수적일 정도로 자기나라를 위하는 거죠. 국익을 위해서라면 진보와 맞서는 게 보수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보수정당은 군대 안가는 사람이 제일 많은 집단이죠. 보수를 외치는 사람들만 있지, 진정한 보수는 없어요. 또 일부 언론들은 대놓고 그들을 감싸고 있고요.”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그의 관심은 폭넓고 비판은 매서웠다. 비단 그가 방송에서 시사정보를 원료로 요리해내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민’으로서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매니저 조영훈 씨는 “배칠수 씨는 개그맨 친구보다 아나운서 친구가 더 많다. 한두 번 대화해보면 말이 통하고 재밌으니 가까워지더라.”고 귀띔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지만 그는 의외로 술과 담배는 전혀 하지 않는다. 배칠수는 야구광과 자동차마니아로 유명하다. 한화이글스 명예홍보대사를 맡고 있으며 연예인 야구단과 인천 사회인 야구단 등 소속 리그만 해도 세 개가 넘는다. 자동차는 거의 전문가 수준이라 웬만한 정비는 스스로 하고 그가 직접 튜닝한 차는 항시 ‘매입대기자’가 있다는 후문이다.
배칠수는 별명이 ‘3학년’인 예쁜 딸 솔이(7)가 있다. 여섯 살 때는 별명이 2학년이었는데 해가 바뀌어 ‘진급’했다며 웃는다. 솔이의 동생이 이달 말에 태어난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와 시간도 갖고, 또 앞만 보고 달려온 날들에 쉼표도 찍을 겸 올 들어 방송을 좀 줄였다고 한다. 물론 내년부터는 다시 왕성한 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기대해도 좋을 듯싶다. 건강한 신체에서 건강한 삶이 나오고, 깨어 있는 정신에서 살아 있는 목소리가 나온다. 배칠수를 보니 그렇다. 김송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