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다닐 때부터 그렇게 읽고 싶었는데 이제야 읽었다. 와. 진짜 재밌더라.” 세미나 시간. 쥐-그래피티 이후 예술가를 참칭하고 다니는 박모강사가 들떠 말한다. 예술적 감성이 폭주하는지 요즘 들어 음악에도 부쩍 관심을 보이는 그. 예술가연 한다고 나한테 놀림을 당하는데, 카프카 소설마저도 솜사탕처럼 스르르 소화시킨 모양이다.
나는 푸념했다. 소설은 역시 나랑 안 맞는다고. 읽고 있으면 따분하다고. 특히 카프카는 난해하다. 내러티브가 익숙하지 않다. 골짜기를 탐험하면서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는 구조. 정상은 끝까지 나오지 않고 어둠도 걷히지 않다가 종말에 와서는 무죄를 밝혀내지도 못하고 맥없이 죽는 주인공이라니. 한 없이 건조하다. 물론 해설서를 보면 ‘작품의 의의’를 이해는 하지만 읽으면서 책에 머리 박고 흠뻑 빠져들 수는 없었고 책장을 덮고는 뭘 읽었는지도 모르겠어서 당황스러웠다.
그가 끄덕끄덕 거리며 끼어들었다. “그래. 소설 안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렇더라. 아내도 그래. 이만한 두께의 이론서에 비해 읽고도 남는 것이 없어서 싫다고. 나도 젊을 땐 그랬는데 이젠 나이가 드니까 블랑쇼. 벤야민. 카프카. 뭔가 풍부한 의미를 끌어낼 수 있는 이런 게 좋아. 세상이 그렇게 이론으로 재단이 되나? 안 되잖아.”
동의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론대로 안 되는 인생이 소설대로는 되던가. 이론서는 이론서대로 소설은 소설대로 읽는 자의 신체 상태나 영혼의 회로에 따라 와 닿는 강도가 다른 것 같다. 어쨌거나 나는 카프카와 극적인 만남을 성사시키지 못했지만, 카프카와 진하게 내통한 박모강사의 안내에 따라 조금은 흥미가 유발됐다. (이래서 책은 같이 읽으면 좋다.)
첫째는, 과정의 무한성. 제목이 핵심이다. 우리나라에서 <심판>으로 번역되었다가 근래 <소송>으로 바뀌었다. 심판은 종교적이 뉘앙스가 강하게 풍기며 뭔가 끝장내는 단어인데 소송은 영어로 process. 과정이다. 생일 아침에 느닷없이 체포된 30대 은행간부K가 영문도 죄목도 모른 채 소송에 얽힌 이야기가 지속된다는 점에서 제목은 <소송>이 훨씬 적합하다.
소설에서 법원은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도 불확실성의 공포로 K를 순치시키고 권위에 복종시킨다. 오늘날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과 같다. 법은 ‘처벌’의 형태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처벌’을 지연함으로써 항구적으로 작용한다. 지속적인 ‘채무감’의 원리로 작동한다. 한 인간을 느닷없이 (소송이라는) 과정 안에 묶어두는 힘이 권력이다. <소송>은 무엇을 위한 과정이 아니라, ‘과정의 무한성’을 의미한다.
둘째는, 알레고리로 읽지 말자. 카프카의 소설은 근대적 환상소설 법칙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사건이나 인물을 종적 차원의 인식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익숙한 방식으로 독해해버리면 충분한 의미를 향유할 수도 독창적으로 발명할 수도 없다. <변신>에서 벌레로 변한 남자는 비유가 아니라 진짜 그 자체의 탈-인간화다. 마치 맑스가 대공장 노동자는 기계일 뿐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이 존재론적 기계를 말한 것이다. 원래 인간인데 기계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은 형이상학적 착각이다. 컨베이어벨트의 배치에서는 ‘기계’다.
마찬가지로, <변신>에서도 벌레가 된 남자가 아니라 벌레다. 벌레는 인간의 부정태가 아니다. 가장의 삶에서 이탈하여 벌레로 변신한 것은 욕망 때문이다. <소송>도 탈-인간화의 프로세스로 읽을 수 있다. 평범한 직장생활 하던 남자의 일상이 중지된다. 그를 자본주의적 관계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힘이란 측면에서 <변신>과 궤를 같이 한다.
나에게 남은 물음. <소송>에서 ‘모든 피고인은 매력적이다’란 문장이 나오는데 그 매력의 실체는 무엇일까. 자본주의적 일상의 자장, 관계의 이탈자란 측면에서 접근해야할까. 이 의문을 품고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어졌다. 익숙하지 않은 건 불편하고 불편한 건 나쁜 것으로 인식된다. 내가 카프카를 대하는 태도도 그러했을지 모르겠다. 일상도 지리멸렬 '과정의 무한성'을 살면서, 소설에서만 똑 떨어지는 구조를 탐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자유가 아니라 출구라고 했던 카프카의 말을 맥락 없이 가져다 쓰곤 했는데, 벌레와 소송이 출구라니. 카프카가 낯설었는데 이제 현실이 낯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