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쌍용차 노조원이 임씨가 죽었다. 13번째 사망자다. 쌍용차 사태 당시 1년 후 복직이라는 약속을 받고 무급자로 있던 조합원이 ‘차일피일 복직을 기다리다’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자신의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더 안타까운 사연은, 이 노동자의 아내가 지난해 4월 우울증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둘 있다. 고2아들과 중3 딸. 부모가 일 년 사이 잇달아 세상을 등졌다.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이다. 졸지에 고아가 된 충격도 크겠지만 지난 2년간 부모의 피폐한 처지를 겪어내는 동안 아이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쌍용차 노조원 부부 죽음의 사연연이 전해지면서 모금이 전해진다고 한다. 공지영씨가 500만원 보내고 정혜신 전문의가 아이들 상담치료를 지원한다고 기사가 났다. 나도 일단 소액이지만 돈을 보탰다. 송금하면서도 마음이 무겁다. 돈으로 해결하고는 알량한 부채감을 털어버리고 잊을까봐 걱정이다. 십시일반 물심양면 아이들을 도우는 게 중요하지만, 일시적 관심에 그치면 아이들은 더 외로울 거다. 가난의 대물림, 고통의 대물림, 소외의 대물림이 자명한 상황. 아이들이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지 않는 방법은 좋은 이웃들과 삶이 오밀조밀 엮이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의 모금이 아니라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다.
이래저래 요즘 공동체에 관심이 많이 간다. 자살공화국 대한민국. 현기증 나는 죽음의 행렬을 멈추기 위한 대안은 어울려 살면서 서로의 삶을 돌보고 가꾸는 것이 아닐까. 정상적인 삶이란 척도를 공유하지 않은 채, 다양한 특이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의 삶을 촉발하고 지혜를 나누고 밥을 같이 먹는 일상을 꿈꾼다. 수유너머에는 비슷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친구들이 모였다. 그들과 최근 유익한 책을 봤다. 블랑쇼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와 낭시의 <마주한 공동체>가 묶인 책이다.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 이 책은 바타이유의 어록으로 시작한다. 문제의식은 이렇다. 우리가 지금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수 있는 전체주의적 공동체 이념에 대한 비판이다. 왜 공동체에는 어떤 원리 기준 이념, 즉 어떤 동일성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생각될 수 없는가? 전체주의를 넘어서 있으며 전체의 고정된 계획을 갖고 있지 않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우리 삶은 도처에 공동체다. 인간 개체도 공동체로 구성됐다. 전태일의 몸에는 여공과 학생과 혁명가가 공존했다. 가족 역시 중요한 공동체다. 연인공동체, 연구공동체 등등. 그런데 우리가 왜 모였는가 따지면서 취미가 비슷해서, 이념이 같아서 등등의 이유를 끌어낸다. 하지만 이는 사후적으로 규정된 사실일 뿐이다. 블랑쇼에 따르면, 타인과의 관계는 하나로 묶이는 어떤 기준 동일성에 따라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나와 타인의 관계는 전체의 본질을 전제하지 않는다." 다만 관계 그 자체에 의해서만 발생한다. 개체의 영역으로도, 전체의 영역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우리’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공동체. 동일성에 근거를 두지 않고 동일자의 억압을 거부하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는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에 대한 응답으로 쓰인 것이다. 낭시는 훨씬 꼬장꼬장하게 논의를 밀고 나갔다. “사실 나는 그 말. ‘공동체’보다 ‘더불어-있음’ ‘공동-내-존재’ 그리고 결국에는 ‘함께-있음’과 같은 볼품없는 표현들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공동체라는 말 사용 자체에 위험이 내포됐다고 판단했다. 공동체란 말을 쓸수록 같음을 은연중에 지향한다는 얘기다. “그 말은 어쩔 수 없이 충일한 것, 나아가 실체와 내면성으로부터 부풀려진 것으로 들려왔다.”
내가 살면서 경험한 공동체가 흥한 경우는 이질적인 존재들이 어우러졌을 때다. 서로 다른 색깔과 향기가 공존할 때 숲처럼 아름다웠고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타인을 자기동일성의 자장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결국 비슷한 종자만 남으면 공동체는 급격히 힘을 잃고 쇠락한다. 가족공동체에서도 불화의 원인은 동일화의 요구다. 배우자가 나와 같아질 것, 자식들이 나를 따를 것. 그런데 살아보니 ‘함께-하기’에는 다름에 대한 낯섦에 대한 신뢰와 불편함의 수용, 적절한 거리두기가 기본이다. 성패의 관건이다. 낭시는 이렇게 멋지게 말했다. ‘함께 있기는 내밀성과 가까움 안에 간격두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함께 있기는 가까움 안에 거리두기다. 그리고 불편과 낯섦을 견디면서 인간은 성장한다.
쌍용차 노조원과 가족들의 가슴 아픈 처지는 우리 사회 대표적 환부를 드러낸다. (임씨의 죽음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3월 1일에 희망퇴작자 조씨가 자동차 안에서 자살함으로써, 쌍용자동차 해고사태로 지난 2009년 4월 이후 사망한 근로자 및 가족은 모두 14명이 됐다.) 삶의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들. 그럴수록 더 배타적이 되어가는 사람 사이의 관계. 소외. 가난. 고립. 죽음의 쓰나미까지 덮친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난할수록 뭉쳐 살아야 한다. 혼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적다. 인간은 결코 자유롭지 않으며 타인에 의해 제약된다.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를 결정할 수 있는 개인은 없다” (박준성) 그러니, 쌍용차조합원과 가족들은 불행을 작정하고 결정할 수 없다. 가난이 문제가 되지 않고 부모 없음이 성장에 지장을 주지 않아야 좋은 사회가 아닌가. 죽지 않는 세상, 좋은 삶을 낳은 좋은 공동체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