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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선셋책방

<김예슬 선언> 사라진 물음, 이상한 물음, 필요한 물음


지난 봄 ‘시대의 양심을 찌른’ 김예슬 선언이 한 달 뒤 책으로 나왔다. 크게 궁금하지 않았다. 대자보의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스럽고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계절이 바뀌었다. 그날의 가슴 뛰고 울컥하던 감동이 서서히 잦아들 즈음이 되니 ‘읽어볼까’ 마음이 동했다. 그런 거 보면 확실히 책도 시절인연이 있다. 만약 출간 즉시 읽었으면 지금처럼 차분히 새록새록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 같다. 
 



시대의 양심을 찌른 빛나는 시어(詩語)

내용은 대자보에 붙은 김예슬 선언을 줄기로 부연 설명하는 식으로 구성됐다. 나의 이야기, 적들의 이야기, 거짓희망에 맞서기 등. 그런데 아니, 이럴 수가.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쉰다. 이건 조단조단 풀어낸 산문이 아니라 날카롭게 벼려낸 빛나는 시어다. 물 흐르듯 읽히는데 뜨거운 불덩이가 느껴진다. 그가 왜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하는지 ‘누가 내 삶의 결정권을 가져갔나’고 따지는지 ‘살아있다는 것은 저항한다는 것이다’라고 외치는지, 숨죽이며 다음 문장을 쫓게 된다. 
 나는 휴가가는 차 안에서 책을 보다가 감동에 겨워 아들에게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대학과 시장은 우리를 값비싼 ’지식상품‘의 고객으로 만들었다. 이에 질세라 다른 기관들도 각자 자신들의 교육적 사명을 발견하고 개척해 나가고 있다. 신문, TV, 인터넷은 자신들이 가진 영향력으로 평생학습 시대를 전파하며 광범위하게 지식을 판매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스스로 무언가 알아내고 배우는 기회와 만남은 잃어버렸다... 내 몸으로 내가 하지 않은 것조차 안다고 믿게 하며 그런 자신을 지식 엘리트라고 착각하게 한다...

언제부터인가 떠돌기 시작한 평생학습이라는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나는, 이제야 그 실체가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건 사람은 죽는 날까지 힘써 배우고 정진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평생을 지식상품의 소비자로 연명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스스로 경험하고 해낸 것이 없이 퇴화되어 버린 존재는 모든 영역에 걸쳐 ’소비자‘가 되었다. 이것이 국가와 대학과 시장이 만들어낸 최종의 인간상이다.(58)

나는 아직 사회에 대해 잘 모른다고 말하는 아들은 멀뚱멀뚱 창밖만 바라보고 남편이 껴든다. “그러니 덕윤이를 대학에 보내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나는 맞섰다. 그건 아이가 선택할 문제이다. 고등학교 자퇴하고 음악 한다고 다 서태지 되는 거 아니고 피겨 한다고 다 김연아 되지 않는다. 대학거부한다고 김예슬 되나. 어떤 절실함이 없이 부회뇌동 기분에 휩쓸려 내린 결정은 결코 삶의 내적 동력이 될 수 없는 법이다. 왜 쉽게 말하느냐. 아이가 스스로 판단하도록 다양한 정보를 주고 조언하고 지켜봐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거늘... 말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볼륨이 커져버렸다.  

남편이랑 애들 교육문제만 나오면 다툼이 난다. 원래 남편은 사고구조가 단순해서 섬세하게 사유하지 않고 꼭 극단적인 결론을 내려버리고 얘기를 시작하니까 답답하다. 저번에도 딸내미랑 셋이 연대캠퍼스엘 갔다. ‘대우관’ ‘삼성관’ ‘GS관’이 곳곳에 생겨나고 건물 이름이 죄다 바뀌어 있었다. 남편이랑 연애할 땐 슬쩍 중앙도서관도 들어갔었는데 지금은 철통경비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 접근금지였다. 이게 바로 자본에 잠식당한 교육, 기업의 인력하청업체가 된 대학의 현실이라고 내가 개탄했더니 남편은 또 “그럼 덕윤이를 대학에 보내지 말자”고 결론을 내렸다. -.-  

사라진 물음, 이상한 물음, 필요한 물음

가든 못(안)가든, 필요한 물음이다. 김예슬은 책의 서두에 말한다. 왜 대학을 꼭 가야하는가라는 '사라진 물음' 그리고 왜 대학을 그만두는가라는 '이상한 물음'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부터 하겠다고. 물음에 대한 답변은 충실하다.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에 이르기까지의 치열함이 녹아있다. 이는 내가 그동안 고민해온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의식과도 맞닿아 있다. 
 

사보기자를 하면서 ‘신의 직장’ 혹은 ‘꿈의 직장’으로 불리는 국내 유수의 기업들을 3-4년 출입했다. CEO부터 촉망받는 신입사원까지 만나고, 아주 깊은 내막까지 관여한 끝에 내린 결론은 ‘내 아들 보내고 싶은 회사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일단 그런 회사에 입사하기부터가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렵다. 서울대 입시준비처럼 앞만 보고 달려서 학점과 자격증에 목숨 걸고 자신을 상품화해야 한다. 회사에 와도 학생때나 삶의 패턴은 비슷하다. 학점의 노예에서 실적의 노예로 바뀔 뿐이다.  

김예슬이 지적한 ‘끝나지 않은 트랙’이다. 경주마는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 회사에 사우나, 헬스시설, 카페를 으리번쩍 하게 갖춰놓으면 뭐하나. 그런 회사일수록 일이 고되다. 세상에 공짜 없다는 말은 진리다. 시설 좋은 감옥일 뿐인데, 직원들은 회사에서 추천하는 자기계발서에 밑줄 그어가며 더 충실한 부품으로 자기영혼의 구조를 조직에 맞도록 세팅한다. 인간세상 경쟁이야 늘 있었다지만 가늘고 길게 ‘만년과장’으로 정년퇴직할 수 있는 회사는 이제 없다고 봐야 한다. 삶의 속도를 기업의 생산 속도에 맞추지 않으면 바로 아웃이니까.  

제 정신 갖고 윤리적 주체로 살아가기가 참 어렵다. 내가 40년 살면서 숱한 시행착오를 경험하고 되도 않는 철학책 뒤지고 낑낑거리면서 어렴풋이 파악한 ‘거대한 예속의 흐름’을 김예슬은 일찌감치 간파해버린 것이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아주 래디컬하게. 래디컬은 근본적인이라는 뜻이다.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뿌리에서부터 파악하는 김예슬의 혜안에 존경을 보낼 뿐이다.  


'나눔문화' 만숙의 열매, 김예슬

처음에 ‘김예슬 선언’ 대자보를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조직에서 훈련된 사람'이란 것이었다. 조중동스럽고 한나라당스러운 '배후'발상과 유사하지만 뜻은 정반대다. 조직의 노리개로 이용당했다는 게 아니라 좋은 동료들과 좋은 공부를 했다는 의미다. 글의 힘이 남달랐다. 이건 개인의 방황에서 나오기 힘든 ‘고통스러운 사유의 훈련’의 결과물이다. 고통스러운 이유는 삶의 틀이 깨지기 때문이다. 예감은 적중했다. 머리말 자기소개에 쓰여 있다. 진리도 우정도 정의도 사라진 대학에서 고민하다가 ‘대학생나눔문화’를 알게 되었고(사진) 사회 불의에 저항하고 국경너머 평화를 실천하고 밤새워 토론했다고.  

김예슬은 지금 ‘나눔문화’연구원으로 일한다. ‘생명, 평화, 나눔’을 기치로 내건 나눔문화는 그 옛날 사노맹의 박노해 씨가 만든 단체다. 재작년 광우병 집회 때 촛불소녀 아이콘을 만든 데도 나눔문화다. 최근 4대강 반대 집회 등에서 나눔문화 회원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완전 성실한 나눔문화에 호감이 갔다. 위클리수유너머에서 언제 한번 취재를 가볼 예정이다. 니체는 문화의 힘을 강조하면서 스스로의 미래를 보증할 수 있는 인간은 좋은 공동체에서 길러진다고 했다.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라고 말하는 저 가슴 시린 오기의 소유자. "자기 자신의 독립적인 의지를 가진 인간, 자기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하나의 잘 익은 만숙의 열매"(니체) 김예슬을 길러낸 토양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