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서울을 사랑하는 이유랑 비슷하다. 백화점을 좋아한다. 그곳에 가면 문화적 자극을 많이 받는다. 아름다운 것들 틈에서 몸이 깨어나는 느낌. 눈이 즐겁다. 잡화, 가구, 그릇, 명품브랜드, 식품매장까지. 국내외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만들어놓은 제품을 맛보는 재미가 크다. 남자 옷 코너가 은근히 쏠쏠하다. 여자 옷은 다양하고 화려하지만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측면이 있다. 치마, 스커트, 원피스, 바지 등등에다가 비즈를 박거나 망사로 처리하거나 꽃수를 놓거나 원색을 쓰거나에 따라 얼마든지 파격적인 실험이 가능하다.
남자 옷은 다르다. 기본 아이템에 디테일한 변형을 추구해야한다. 같은 듯 다름을 빚으려면 고난도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요한다. 단추 모양 하나, 셔츠의 주름 하나, 스티치 색상 하나, 주머니 위치 하나로 미묘한 차이가 생성된다. 평범한 듯 멋스러운 옷들이 많다. ‘나는 옷이 싫다’는 남편이랑 살다보니 또 돈이 없다보니 그 아름다운 것들이 ‘그림의 떡’이지만, 다행히 소유욕이 발동하진 않는다. 유명 화가 전시회 다니는 느낌으로 ‘그냥’ 찬찬히 둘러보는 거다.
그렇게 백화점을 전시장 삼아 쏘다니다가 발견한 브랜드가 <폴스미스>이다. 뭐가 좋을 때는 오로지 느낌이다. 사람이고 옷이고 마찬가지다. 잘생겨서, 친절해서, 똑똑해서가 아니다. 끌림은 ‘총점’이 높은 거다. 폴스미스도 그랬다. 매장 인테리어, 감각적인 디자인, 그리고 머플러와 가방 등 소품의 화룡점정까지 종합적인 첫인상이 산뜻했다. 경쾌하고 따뜻하면서도 전체적으로 기품이 있다고나 할까. 클래식하면서도 펑키한 그 상반된 느낌이 매혹적이었다. 찜했다. 아들 녀석이 스무 살이 되면 폴스미스에서 양복과 셔츠랑 가방을 사줘야지 생각했다. 자유롭지만 고귀하게 살길 바라는 나의 소망에 가장 부합하는 컨셉트의 옷이기 때문이다.
클래식과 펑키 '폴스미스 특이성'
폴 스미스 전시회. 상상도 못했다. 대림미술관에서 영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폴 스미스의 아트 컬렉션을 소개하는 '인사이드 폴 스미스(Inside Paul Smith)' 전을 개최한다는 기사를 봤다. 한달음에 달려갔다. 나는 한 사람이 태어나서 환경과 유전자에 의해 고유성이 형성되고 자신만의 꿈을 펼쳐가는 여정에 대해 호기심이 크다. 특히 예술가일 경우에 더하다. ‘자연의 신비’ 다큐멘터리처럼 사람에 관한 생애가 마냥 신비롭다.
전시장 입구, 기둥을 도는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졌다. 이것이 바로 폴 스미스 스타일 아닌가! 벽면에 폴스미스가 찍은 사진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가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덮쳤다. 이미지가 매장에서 보았던 바로 고전적이면서도 감각적인 그리고 자유롭고도 절제된 그것이었다. 패션디자이너 소장품 전시회라서 크게 기대를 안 했는데 어떤 세기의 화가 전시회보다 더 ‘시각적인 열정’으로 충만했다. 두 가지가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심미안. 그것을 바로 작품으로 연결해 표현하는 구성력.
폴 스미스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지 않았으면 사진작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버지가 아마추어 사진작가였다. 열한 살 때부터 카메라를 만졌단다. 사진을 아주 잘 찍는다. 사진은 '선택적 지각'이다. 그의 선택이 탁월하다. 그림자, 컵, 볼펜통, 오렌지, 철조망, 소방호스, 옷걸이 등등, 그가 아니라면 절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들을 척척 찍어낸다. 길 가다가 여행길에서 오며가며 아무거나 찍어도 폴 스미스의 감각으로 재정의된다.
일전에 이갑철 사진집 <레드>를 보았을 때도 그랬다. 빨간 드럼통인지 화살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굉장히 하찮은 것이었으나 사진집에서는 훌륭한 ‘레드’로 형상화 되어있었다. 그 때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찍었으면 휴지통 직행이었을 텐데 이갑철이 찍으니까 이렇게 멋지구나-.- 작가의 눈이 보배구나.’ 그렇다. “예술은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한다”는 클레의 말도 있듯이, 예술에서는 대상의 재현보다는 지각의 조직화가 중요하다. 타이어 바큇살조차도 폴 스미스의 시각 프레임에서는 의미가 넓고 풍부하게 조직되는데 이는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지각의 조직인 것이다.
폴스미스는 그렇게 찍은 사진을 바로 옷에 새긴다. 싱그러운 오렌지를 찍고 그 문양으로 발랄한 봄빛 스커트를 만든다. 멋진 자동차를 찍어서 뚝딱 가방으로 만든다. 그가 보는 것이 그의 패션이고 그의 삶이다. 스피노자를 공부할 때 배운 ‘다른 성분과 결합해 집합적 신체를 구성하는 능력’ 이것이 뛰어난 것이다. 사진뿐이 아니다. 10대 때부터 수집을 시작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했던 그는 동네 벼룩시장에 가서 포스터나 그림, 조그만 장식품 등을 구입했다. 또 무명작가부터 뱅크시나 앤디워홀 같은 유명작가의 것까지 폴스미스의 아트컬렉션은 폭넓다. 찍고 보고 모으고 만들고. 이것이 폴 스미스의 특이성을 형성하는 원인이 된다.
“그는 한 번도 패션 디자인에 대한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디자인의 거장으로 성공하는 데 가장 중요했던 것이 아트 컬렉션이다”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음. 이 대목이 폴 스미스 디자인 철학의 열쇠 같다. 클래식한 것부터 키치적인 것까지 그의 감각적 흐름에는 막힘이 없다. 통념과 상식에 구애됨 없다. 우주에 고립되어 있는 것을 자기만의 디자인 언어로 거침없이 해석하는 용기와 자신감이 돋보인다. 규율화 되지 않은 감각은 예술가에게는 필수적인데, 정규교육은 그것을 가로막곤 한다. 폴 스미스에게는 그런 장애물이 없었던 것이다.
친절한 도슨트 한수지씨가 설명해주었다. 폴 스미스가 자신을 찾아온 19세 젊은이를 옆에 두고 일해서 그가 지금 영국 에스콰이어지 편집장이 됐다고 한다. 거리의 무명화가도 과감히 발탁하는데 그와 일하면 유명화가가 되어버린단다. 사물에 흐르는 에너지는 물론이요 사람의 열정을 감지하는 안목 또한 탁월했다. 도슨트와 이야기 끝에 결론내렸다. 그는 열린 사람이고 일을 즐기는 사람이고 시각에 미친 사람이다. 참고로, 폴 스미스는 고전적이면서도 위트넘치는 디자인 감각으로 세계인을 매료시킨 공로로 2002년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Sir)를 수여받았다.
전시회에서 공연장 간 것처럼 흥분하는 나를 보면서 폴 스미스는 물론이요 나에 대해서 더 알 수 있었다. 내가 권위적인 것, 가둬두는 것, 틀에박힌 것에 타고난 반감이 있구나. 그래서 열린감각과 장인정신이 공존하는 서태지를 좋아하고, 폴 스미스를 좋아하는가 보다. 폴 스미스 전 이후 길가의 풀꽃 하나, 노트의 스프링 하나도 달리 보였다. 세계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받아들이는 대로 존재한다. 훌륭한 예술가는 그것을 깨우쳐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