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요즘 따라 멜로작품이 보고팠다. 삼복더위엔 공포보다 멜로다. 도대체 일분에 한 장 씩 티슈 뽑아가며 영화 본 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원빈의 아저씨는 큰 기대를 안 했다. 액션물이고 여주인공은 꼬마아이다. 레옹 스타일? 멜로라인이 약할 거라 여겼다. 거기다가 죽고 죽이는 액션물이라니 끔찍하다. 그래서 이번 영화의 관람목적은 오로지 ‘안구호강’으로 삼았다. 일단 원빈의 우수에 젖은 눈동자에 빠져보겠다는 심정.
목적 200% 달성! <아저씨>는 멜로판타지다. 원빈이 제대로 멋지다. 얼굴을 반쯤 가린 헤어스타일은 애처롭고 신비롭다. 검정 수트발은 날렵하고 기품있다. 멜로배우의 요건은 미소보다 눈빛, 대사보다 침묵이다. 무심한 듯 섬세한 표정은 압권이다. 액션이 과해도 수컷스럽지 않은 신기한 배우다. 김새론도 ‘여주’로서 손색이 없다. 카메라에 잡히는 순간 '더 이상 애가 아니다.' 감정의 결이 올올이 살아난다. 그러니 일 분에 한명씩 악당들이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나는 신파 분위기에 휩쓸려 가슴 미어졌고 막판에는 눈물 쏟아졌다. (물론 옆자리 관객은 안 울었지만-.-;)
내용은 진부하다. 볼만한 진부함이라고 하자. 전직 특수요원 원빈은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보내고 세상을 등진 채 어둑한 전당포에서 살아간다. 유흥업소 댄서의 딸인 옆집 꼬마도 엄마의 돌봄을 받지 못한다. 외로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유일한 친구다. 소미의 엄마가 마약사건에 연루돼 소미까지 납치된다. 소미를 구하는 원빈의 눈부신 활약을 담았다. 마약과 장기밀매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내용이 흥미롭고 조연의 연기와 대사발이 재미를 더한다.
그 때 왜 그랬어요?
이 영화가 멜로판타지인 이유는 오해가 완벽한 ‘해결’을 보기 때문이다. 인간사 오해는 필수다. 그런데 애정관계에서 발생한 사소한 일은 우주적인 사건이 된다. 상대방의 언행에 따라 얼마든지 내 세계가 무너질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랑은 온전한 타자체험이다. 내 중심으로 돌던 세상이 다른 사람 중심으로 돌아가니까.
<아저씨>에서도 그런 사건이 있다. 도둑으로 몰려 곤경에 처한 소미가 손을 내밀었는데 원빈은 모른 척했다. 소미는 “아저씨도 내가 창피하죠? 그래도 괜찮아요. 아저씨까지 미워하면 좋아하는 사람이 한 개도 없어.”라며 토라져 가버렸다. 그리고 납치사건이 일어났다. 원빈은 악당의 시체를 넘고 넘어 소미에게 이른다. 마지막에 소미는 감격에 차서 말한다. “아저씨. 나를 구하려고 온 거죠?” 그리곤 또 묻는다. “그 때 왜 나를 모른 척 했어요?” 원빈의 대답. “너무 아는 척 하고 싶으면 모른 척 하고 싶은 거야.”
감히 궁금한 것을 조목조목 물어보다니! 소미가 아이인 것이 새삼 실감났다. 어른이 되면 그게 힘들다. ‘그 때 왜 그랬는지’ 차마 물어보기가 쉽지 않다. 진실은 두려운 것이고, 상처는 두렵고 그래서 덮어두고 싶게 마련이다. 과거 따윈 잊었다는 듯 쿨한 척 엉뚱한 얘기만 하고 어색한 미소만 짓는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원빈의 감성액션과 함축적 대화로 오해가 말끔히 씻긴다. 이는 원빈 혼자 악당을 다 물리친 것보다 내겐 더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들을 제공하는 판타지에 잠시나마 취했으니까.
그는 소통에 목이 마르다
“사람들 간의 관계와 소통, 그 속에 진심이 담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정범 감독의 말이다. 기자간담회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극을 이끄는 줄기는 액션이지만 관계와 소통을 말하고 싶었다고. 왠지 올드한 감수성이 느껴졌다. 직감적으로 우리 또래일 것이라 추측했다. 인터넷을 켜고 이정범을 검색했더니 71년생이다. 적중했다. 도끼, 칼, 총으로 피 튀기는 잔혹함의 극한을 구사하는 와중에도 따뜻함의 심연에 천착하는 정서에 나는 그만 연민이 생겼다. 동지애라고 해도 좋다.
소통. 지겨워서 뒤로 밀쳐놓은 화두이다. 영화를 보고 다시금 사유하게 됐다. <아저씨>의 경우를 소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소통은 어떻게 가능한가. 발신자가 있고 수신자가 있어서 그 내용이 100% 전달되면 소통에 성공한 것인가. 원빈의 진심이 실체처럼 완제품으로 있고 소미에게 정확히 패스되는 형태는 아닐 것이다. 어차피 오해로 단단해진 마음의 응어리는 당사자에 해명 혹은 변명에 의해 풀리는 게 아니다. 성찰을 통해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나의 언어로 세계가 재구성될 때만 해결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소통은 전달이 아니라 변화다. 내가 변하는 만큼 상대방을 수용할 수 있을 때 소통 됐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원빈은 소미로 인해 전당포를 박차고 나와 커다란 어둠의 세계를 목도하고 전직특수요원으로서의 역량을 발휘하며 거듭났다. 소미를 사랑해서 괴력을 발휘한게 아니라, 악의 무리를 소탕하면서 점점 소미에 대한 애틋함이 커졌을 것이다. 부모의 반대에 부딪힌 연인의 사랑이 더 깊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무튼 변용만큼이 소통이라고 볼 때, 한층 성숙한 얼굴이 된 두 사람의 포옹은 아름다웠다. 군더더기 없이 충만한 사랑은 영화에서만 맛볼 수 있는 쾌락이다. 내용과 형식이 서로 맞물려 원활하게 잘 다듬어진 세련된 판타지의 힘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멜로에 목이 마른 게 아니라 소통에 목이 말랐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