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스위스 갈 때 일이다. 인천공항에 근무하는 남편친구가 나와서 수속을 도와주었다. 같이 밥을 먹으면서 '가급적 가방을 줄이라'는 충고에 따라 짐을 통폐합하다가 비행기에서 읽을 책들을 테이블에 올려놨다. 그중 한 권이 <노동을 거부하라>다. 남편친구가 대뜸 묻는다. “아직도 이런 책 읽어요?” 남편친구는 연애할 때부터 나랑 정치적 문화적 취향이 같아서 대화가 통하던 소설가 지망생이다. 난 독일 맑시스트 그룹에서 쓴 건데 재밌고 명료하다며 일독을 권했다. 책을 뒤적이던 그가 웃으며 한다는 말. “어휴, 마누라가 이런 책 읽으면 힘들겠다~”
순간 당황했다.“이게 왜요, 가사노동을 거부할까 봐요?ㅋ” 동시에 남편의 얼굴이 말풍선으로 떠올랐다. 남편은 또래집단에 비해 기적적으로 가부장지수가 낮다. 그래서 가끔 스스로 으스댄다. 자기 같은 남편은 없으며, 친구들이 자기한테 왜 그렇게 ‘바보처럼’ 사느냐고 가엾게 여긴다나 뭐라나. (아들과 산악바이크 타는 남편. 딸내미는 아빠처럼 재밌고 순한; 남자랑 결혼한단다-.-;)
좌우가 따로 없다. 남자의 본능일까. 마치 한번 높아진 생활수준을 낮추기 어렵듯이, 남자들은 결혼해도 기득권을 놓치기 싫어한다. 엄마의 자리를 대신해 아내가 자기에게 봉사와 희생을 아끼지 않기를 기대한다. 그러니 아내가 바깥활동이 많으면 불편하고 못마땅할 것이며, 육아까지 맡아야한다면 최악이다. 가부장의 권위를 내려놓는 자는 ‘바보’가 된다. 이런 얘길 들으면 처음엔 팔팔 뛰었는데 지금은 이해한다. ‘내조의 여왕’인 목동엄마들을 보면서 ‘집에서 아내가 저렇게 해주면 내가 남자라도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남편한테 슬쩍 미안스럽기도 했다.
행복보다 자유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편에게 덕윤이와 서형이를 위해서도 우리는 이렇게 ‘자유와 평등’ 컨셉으로 살아야 한다고 우긴다. 내 아들이 평생을 여자의 수발에 의탁해서 살아가야 하는 ‘약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다른 가족 구성원의 희생과 헌신을 당연시 하는 ‘무감각한 신체’가 되길 원치 않는다. 내 딸이 목동엄마들처럼 가족주의에 얽매여 4인 가족을 우주로 여기고 거기서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기를 결코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아들이 배려남이 되도록, 딸이 행복하기보다 자유하도록 키우는 게 목표다. 내 생각에 행복보다 자유가 백배는 더 어렵다. 행복은 살던 대로 살아도 기본은 누리지만 자유는 매순간 투쟁으로 얻어지는 산물이기에 그렇다. 물적 재산과 지위 등 행복의 요건을 갖추고도 자기가 행복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것은 자유롭게 본성대로 살지 못해서인 경우가 많다.
언젠가 택시에서 라디오 아침프로 청취자 사연을 들었다. 자기 언니가 능력 있는 커리어우먼이었고 성격이 밝고 적극적이었단다. 한 남자랑 결혼을 전제로 동거를 한 모양이다. 시아버지가 병환이 나고 ‘예비 며느리’로서의 감정노동이 시작되면서 어둡고 침울해졌으며 급기야 그 남자와 헤어지겠다고 한단다. 친정식구들은 결혼하라고 설득하는데 언니가 ‘나한테 결혼은 적성에 맞지 않다’며 거부하는 중이라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는 사연을 동생이 쓴 거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세상에 결혼-노동이 적성에 맞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싶었다. 결혼에는 자유가 없다. 구속이 따른다. 뺏겨본 적이 없는 그것을 뺏기려니 억울한 거다. 근데도 다들 뭐라도 있는 양 꾸역꾸역 결혼을 하고 산다. 나도 그렇고. 난 어떻게 흘러흘러 여기까지 살아왔지만 나의 아이들이 잘 살아갈 수 있을지 염려스럽다. 한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고시다. 결혼고시. 혹은 가족고시. 답도 없고 끝도 없어서 난감한 시험. 일제고사처럼 거부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가 기꺼이 치른다고 입실했다가 퇴실도 못하고 전전긍긍한다.
여성은 자유다
그래서 가족영화를 보면 마음이 무겁다. 요즘 우연찮게 가족영화를 몇 편 봤다. <테이킹 우드스탁>은 음악영화인줄 알고 봤다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부모가 나와서 식겁했다. 이안감독은 서양에서 공부했어도 동양 사람으로서의 태생적 정체성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늘 부모의 억압과 자유에 대한 갈망 사이 그 안간힘이 느껴진다. <라임라이프>라는 영화는 엄마처럼 살기 싫은 딸과 아빠처럼 살기 싫은 아들이 나온다. 설상가상으로 그 각각의 부모가 사랑(불륜)에 빠진다. 대개의 불륜영화가 그렇듯이 기어코 사달이 난다. 남자에 의해 남자가 죽는다.
<에브리바디 올랏잇>은 4인가족을 둘러싼 가족영화지만 유쾌했다. 깔끔하고 따뜻했다. 물론 중간에 위기가 있다. 레즈비언 부부가 정자은행을 통해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고 산다. 배우자가 이성애자 남자와 ‘잠시’ 뜨거운 사랑에 빠진다. 자녀 양육, 가사노동 분담, 기질차이, 자아실현 등 이성애 부부에게 일어나는 갈등요소가 그들 가정에서도 반복된다. 그렇지만 지혜롭게 평화롭게 풀어간다. 최소한 여성끼리는 칼부림은 나지 않는다. 이성적인 대화가 통한다는 것이 고마웠다.
레즈비언 부부로 나오는 아네트베닝과 줄리안무어의 연기가 끝내준다. 아들에게 '네가 게이였으면 감성이 더 풍부했을 텐데'라고 말하는 장면이 그렇고 대사가 살아있다 했더니만 감독이 레즈비언이고 자전적 영화였다. 여성들의 에너지가 합하여 시너지로 만개한 영화다. <안토니아스라인>볼 때도 느꼈다. 꼭 레즈비언이 아니더라도 이성애 가족의 대안은 ‘여성가족’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여성성과 권위적인 것은 상극이다. 여성은 명령하는 것보다 공감하는 것을 좋아한다. 정해진 답대로 살기보다 꿈꾸며 살길 희망한다. 그래서 결혼이 적성에 안 맞는 사람도 시도해볼 수 있는 ‘숨구멍’이 나 있다. 남성성이 콘크리트라면 여성성은 갯벌이다. 부드러운 생명의 보고. 21세기 대안가족, 여성-가족에게 희망을 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