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목련이 필 때면 다시 생각나는 사람...’ 거리에서 나도 모르게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으면 봄이 온 거다. 조회 시작할 때 애국가 부르는 것처럼 <하얀 목련>을 부르며 봄을 맞는다. 난분분 낙화하는 양희은의 목소리에 위로받는다. 뭇 생명 약동하는 봄이라지만 언제부턴가 버겁고 부럽다. 나만 그런 건 아닌가보다. 모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곁눈질 하면서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는 사람도 있으니 봄은 잔혹한 계절이라고 어느 시인은 말했다. 기형도에게도 봄은 비생명의 계절이었다.
천생 약한 것들에게 마음 주었던 시인들의 노고에도, 봄은 어김없다. 햇살 푸지다. 기화요초 피어난다. 재작년 봄도 그랬다. <하얀 목련>을 부르던 즈음이다. 평화인문학 졸업식을 취재하러 안양교도소에 갔다. 화사한 봄빛 물든 거리를 지나며 ‘그 자리에서 움질일 수 없는 사람들의 봄’을 생각했다. 담장 안의 빛깔은 어떠할까. 푸르죽죽한 죄수복을 입은 재소자들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서늘하고 음울한 공기가 낮게 깔린 고3 교실 정도를 상상했다. 그런데 웬걸. 활기찼다. 졸업식에서 소감을 발표하라고 했더니 너도나도 손을 들었다.
"처음에 인문학 강의 소식을 듣고는 이젠 교도소에서 별 걸 다 시킨다고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닫힌 공간에 살더라도 마음을 열고 생각하면서 살아야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배운 사람들에게야 철학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저는 초등학교만 졸업했습니다. 4년 동안 이 안에서 컴퓨터 등 여러 가지를 배웠는데 이번 강좌가 가장 특별했습니다."
아이디 ‘바울’의 소감이다. 다음 타자로 남에게 기쁨을 주면 기분이 좋아져 아이디를 ‘복덩이’로 전했다는 한 재소자가 앞으로 나갔다. "그동안 레크리에이션 강사도 해보고 조리사 자격증도 따고 봉사의 삶을 살기 위해 안 해본 게 없습니다. 열정을 쏟았지만 마음에 큰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문학 강의를 듣고 다시 한 번 '복덩이'의 삶에 도전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대학교에서 철학과 과대표를 하다가 왔다는 '아나키스트'는 비록 나이가 어리고 인생 경험이 짧지만 영국 처칠 수상이 강연에 했던 한 마디를 나누고 싶다며 "포기하지 마라.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 힘냅시다!"라고 말해 우렁찬 박수를 받았다.
2부에는 피자와 음료수를 놓고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둥그런 원탁에 예닐곱 명씩 모여 앉아 편안하게 담소를 나누었다. 발표만 잘 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살갑고 붙임성도 좋았다. 강사로 갔던 고추장(고병권)에게 “추장보단 족장이 낫지 않아요?” 라며 말을 걸었다. 평소 술이나 몇 모금 들어가야 입이 떨어지는 대사인 ‘고맙다’는 말도 서슴없이 전했다.
"교도소에서 여러 가지 교육이 있거든요. 그렇고 그런 거려니 했는데 이번엔 정말 특별했습니다. 무엇보다 여기 강의 오신 선생님들이 우리를 색안경 끼지 않고 봐주니까 고맙더라고요." 옆자리 재소자는 나에게 동료들을 소개하며 자신도 색안경을 꼈었음을 고백했다. “우리 방 사람들이 다 좋아요. 처음엔 그렇게 안 봤는데 지내보니까 다 너무 좋은 사람들이에요.”
‘좋은 사람’이란 말이 그렇게 낯설게 들렸던 적이 없지만 또 그만큼 절실하게 들린 적도 없다. 안양교도소는 전과 3.7범이 있는 곳이란 걸 나중에 알았다. 애잔했다. 우리는 누구나 누구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들도 그랬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그랬던가. 인간이 무슨 일을 하든 그는 언제나 선행을 한다고. 즉 그의 지성의 정도에 의해서 또 그의 이성의 그때그때의 척도에 의해서 그에게 선하게 여겨지는 그것을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생의 어느 한 시기에 잠시 죄수복 걸친 그들은, 얽혀버린 삶의 가닥을 풀어갈 지혜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매번 살아보려고 발악하지만 번번이 사는 법에 실패하여 예까지 떠내려 온 게다. 그러다가 평화인문학을 만났고 "감옥 밖에서도 못 배운 걸 감옥 안에서 배울 줄 몰랐다"며 웃는다. 졸업식에서 '삶과 꿈'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눈빛은 생의 의지로 반짝였다. 3.7범이란 통계치의 무거운 그림자는 잠시나마 사라진 듯싶었다.
쇠창살 뚫고 꽃이 피려는가. 한 재소자는 고추장에게 인문학을 더 공부하고 싶은데 좋은 책을 권해 달라 했다. 꾹꾹 눌러 주소를 적는 두툼한 손등은 이 봄날 싹을 틔우려는 새싹의 안간힘처럼 눈물겹게 따스했다. 모두가 행복했으리라. 사는 법을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를 곁에 둔 그 순간만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