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은 ‘겁나게 화창’ 다음날은 ‘가볍게 우울’ 파리에 머무는 이틀 동안 날씨가 그랬다. 내가 하늘에 대고 리모콘이라도 누른 것처럼 파리는 확연히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나의 오랜 동경을 알기라도 한 듯.
브레히트 말대로 살기도 힘들지만 떠나기도 힘든 곳, 도시. 시골의 목가적인 고요함보다는 도시의 북적이는 쓸쓸함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메트로폴리스의 원조’ 파리에 달려가 안기고 싶은 맘 굴뚝이었다. 그 뿐인가. 나의 베스트무비 ‘비포선셋’의 배경이고 파리를 숭배하면서 혐오했던 보들레르가 기침처럼 시를 토해낸 고장이며 도시관상학자 벤야민이 살고 싶어 한 도시. 직업 선호도 1위가 예술가인 멋진 나라의 심장부.
공기가 궁금했다. 단, 파리를 가거들랑 혼자서나 혼자 같은 둘이서 좀 긴 호흡으로 ‘딩군다’는 느낌으로 여기저기 자유롭게 쏘다니길 원했다. 그래서 스위스를 가면서도 파리를 들를지 말지를 일주일 전까지 고민했다.
지난 6년 동안 분기별로 연락해서는 ‘언니가 파리에 오면 좋아할 텐데’ 라며 입맛 다시게 하던 후배에게 메일을 띄웠다. 실은 내가 스위스에 가는데 애들이 있어서 몸이 무겁고, 졸업 앞두고 공부에 여념 없을 네게 민폐가 될까봐 미안하고, 이틀만 가자니 감질나고, 또 그렇다고 안 가기는 좀 아깝다고 썼다. 그랬더니 전보라도 친 것처럼 금방 전화가 왔다. 마침 스키방학이라서 시간이 되니까 무조건 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넙죽 갔다.
“언니, 파리 어디어디 가고 싶어요?” “파리면 돼.” “그래도 테마를 말해 봐요. 덕윤이도 있으니까 박물관으로 할까요?” “글쎄다. 난 누가 서울 오면 남산은 안 데려갈 것 같아. 에펠탑이나 루부르 안 가도 괜찮으니까, 그냥 어디든 걷자. 이틀을 뭘......”
기어코 에펠탑부터 갔다. 지난번 미술학원에서 에펠탑을 그려본 꽃수레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다. 사실 나도 실물이 좀 궁금하긴 했다. 에펠탑이 가장 잘 보이는 장소로 갔다. 아침 햇살에 샤워하는 에펠탑이 눈부셨다.
“우와, 크다!” 진짜 컸다;; 멀리서 보고 앞에까지 걸어갔다. 줄이 하도 길어서 올라가지는 않고, 애들 성화에 에펠탑 열쇠고리만 샀다. 절대 파리에서 산것처럼 안 보이는;; 남대문표로 손색없는 금빛 모형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개선문과 콩코드 광장, 오페라하우스, 루브르박물관까지 '주마간산식'으로 훑으며 관광지 가족사진대형으로 ‘인증샷’만 남겼다.
상제리제거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더니 명성이 헛되지 않았다. 8차선 도로만한 인도가 나있었다. 아름다웠다. 크고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들. 시원스러운 길, 너른 광장이 어우러졌다. 그것은 단지 규모와 스케일이나 견고함의 문제가 아니다. 공들임과 조화로움이 돋보였다. 200년, 300년 된 건물들이 믿어지지 않게 말짱했고 제각각 색달랐다. 이 화려한 도시를 건설하느라 힘 없는 백성들이 죽어났겠다 싶으니 프랑스에서 혁명이 자주 일어난 까닭을 알 것 같았다. 마리앙투와네트가 처형당한 콩코드광장, 나폴레옹이 통과한 개선문 등등 곳곳에 피냄새가 진동했다. 널찍한 광장은 ‘여백의 미’와 ‘역동의 미’를 동시에 자아냈다. “여긴 집회할 만한 장소가 참으로 많구나!” (파리의 집회장소는 콩코드광장 ㅋ 오밸리스크상이 커다란 연필같다.)
샹제리제 거리에도 맥도날드가 있었는데 간판이 ‘황금빛’이다. 티가 안 나서 몰라볼 뻔했다. 우리나라 곳곳마다 불쑥 내걸린 도시미관을 해치는 맥도날드 노란 간판이 늘 거슬렸던 지라 절로 눈길이 갔다. “여긴 왜 M자가 노랑이 아니네?” “허가가 안 나서요. 맥도날드가 굴복했어요.” 후배 말이 파리에는 건물 하나 짓는 걸 허가 맡는 데도 십년이 걸린단다. “그렇구나...” 일 년 내내 거리에서 굴삭기를 봐야하는 삽질공화국 국민은 부러움에 할 말을 잃었다. 자연이든 사물이든 모든 것은 시간이 담겨야 아름다워진다. 시간의 가치. 피의 가치. 그것이 파리의 관상을 기품 있게 만들었나 보다.
마지막 코스 루브르박물관은 압도적이었다. 이렇게 클 줄 몰랐다.--; 대형 돋보기로 본 세상 같았다. 웅장함 그 자체. 다 보려면 7박8일이 걸린다길래 주저앉았다. 박물관에 삼면으로 둘러싸인 광장에서 아이들은 '달리기시합'을 하고(사진) 나랑 후배는 다리쉼을 했다.
저 멀리 에펠탑이 보였다. “근데 도시 한복판에 철제탑이 삐죽 솟아있으니까 좀 흉물스런 느낌도 든다?” 나의 중얼거림에 후배가 답한다. “그래서 에펠탑 처음 생겼을 때 파리사람들이 에펠탑 2층 커피숍에만 갔대요. 거기선 에펠탑이 안 보이니까.” 재밌었다. 에펠탑이 보기 싫어서 에펠탑엘 가다니. 또 한 가지 설. 파리가 너무 음기가 세서 에펠탑을 세웠다는 얘기도 있다고 한다. 남근의 상징으로. 후배가 그런다. 파리여자들 정말 기가 세다고. 학교에서도 토론할 때 당최 지는 걸 못 봤다고. 남친에게 ‘여자마초’로 불리는 후배지만 “그래도 파리여자들에 비하면 네가 나은 편”이라는 평가를 받는단다. 가히 짐작이 갔다. 그럼 파리남자는 어떨까. “파리 남자요? 양처럼 순해요.”
파리에는 흐린 날이 많아서 볕이 귀하단다. 거리엔 모처럼 일광욕 하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카페 앞에 좁은 테이블과 의자마다 사람이 꽉꽉 찼다. 서울에서 카페의 야외좌석에 식탁처럼 마주보고 모여 앉는다면 파리사람들은 차도를 향해 앞을 보고 나란히 앉았다. 저마다 커피한잔 시켜놓고 신문이나 책을 보지 수다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마치 투명극장 같은 그 풍경이 매우 신선했다. 파리사람들은 테라스문화를 무척 사랑한단다. 그래서 스타벅스에서 테이크아웃 해서 걸어 다니며 커피 마시는 걸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차 한 잔의 여유를 거스르는 행위, 거의 커피에 대한 모독쯤으로 해석된 모양이다.
해 지기 전이다. 세느강에서 유람선을 타면서 파리 야경 보면 멋지다는데 참았다. 내일도 돌아다니려면 힘을 비축해야 했다. 사실 나는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유람선은 ‘비포선셋’의 줄리델피처럼 여름 날 오후에 (에단호크급의) 멋진 남자랑 로맨틱한 대화를 나누며 타고 싶었으므로;;
왼종일 바게트와 크레페와 치즈같은 것만 먹었더니 속이 울렁거렸다. 원래는 저녁으로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와 와인을 먹으려 했는데, 일일 고춧가루권장량의 섭취를 위해 찬거리를 사서 후배 집으로 갔다.
파리 남자는 아니지만 순한 양 버금가는 인간성의 소유자에 기타솜씨와 요리솜씨가 수준급인 남친이 순식간에 멋진 '서울밥상'을 내왔다. ‘고추장불고기’와 ‘탕수육 소스와 딤섬’ ‘김치’에다가 우리들은 밥을 두 그릇 이나 비웠다. 살짝 배가 불렀는데 "한 수저만이라도 더드시라"는 남친의 인정 넘치는 권유를 마다하지 못했다. 울 엄마들은 그럴 때 다시금 고봉밥을 만들어오는데 신세대라 그런지 정말 깔끔하게 한수저 정도만 더 줘서 고마웠다.
나야 여러모로 맘 편하고 좋았지만 애들을 둘이나 데리고 가서 밥을 얻어먹자니 미안스러웠다. 예전에 우리 남편이 술 마시고 집에 친구들을 잘 데리고 왔는데 그 때 생각이 났다. 남친 밥하는데 나랑 수다 떨기 바쁜 후배. “나가서 좀 도와줘라” 내가 쿡쿡 찌르면 "괜찮아요. 요리하는 거 좋아해요" 그러면서 꿈쩍 않는다.-.-; 입으로는 B급 페미니스트를 자처해온 나는 막상 현실에 '여자가 일을 안 하니까'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민박집으로 가기 위해 다섯이 우르르 집을 나섰다. 늦겨울과 초봄 사이 춥지 않은 밤공기가 감미로웠다. 우리밖에 없는 듯 동네가 참 조용했다. 읍단위에서나 느낄 수 있는 적막과 고요가 흘렀다. 모든 상점이 7시면 다 문을 닫으니까 그렇단다. 어떤 가게는 두 달씩 문 닫고 휴가도 가버린단다. 그러고도 안 망하고 장사가 된다니 신기했다. 후배남친이 그런다. “서울에 가도 7시만 되면 불안해요. 가게 문 닫기 전에 뭘 사둬야 할 것 같고...하하.” 집 앞에 24시간 영업하는 김밥‘천국’과 맥도날드가 있고 심지어 배달까지 해주는 우리나라는, 그에 비하면 천국인가 지옥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파리의 첫날을 느린 걸음으로 음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