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혁명 이후 프랑스에서 나타난 특이한 현상은 대학의 국유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는 이미 대학에 진학해 있던 대학생들이 얻어낸 것이 아니고 앞으로 대학에 들어가게 될 중고등학생들이 얻어낸 것이다. 68집회에서 대학생들은 교실 증설과 복리 증가 등을 요구하였지만, 당시의 중고등학생들은 대학생들의 이러한 요구를 배신이라고 규정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직접 내걸고 거리에 나서게 되는데, 그야말로 국가 시스템의 전면적인 붕괴를 눈앞에 둔 프랑스 정치 지도자들은 결국 대학 국유화를 카드로 내밀게 된다.
전국의 대학에 대한 전면적인 국유화가 진행되고, 서열을 없애기 위해 대학의 이름을 없애면서 총장들의 추첨에 의해 각 대학마다 번호를 하나씩 가져가게 되는데, 가장 오래된 소르본은 4번을 받았고, 나중에 생긴 생드니 개방대학은 8번을 가져가게 되었다....이렇게 국립대학으로 전환된 새로운 시스템 하에서 연간 5만 원 정도의 저렴한 등록금을 내면서 새롭게 대학에 들어간 세대들을 사르트르 세대라고 부른다.’ - 우석훈 <88만원세대> 중에서
물리학도인 그가 어느 날 파리로 간다고 했다. 일단 의사가 되고 국경없는 의사회에 들어간 다음 전 세계를 떠돌며 인민의 벗이 되겠다고 했다. 미국도 아니고 프랑스로 가는 이유는 두 가지. 파리에서는 의사에게 ‘부와 명예’가 전혀 없다는 것. 학비가 연 30만원이라는 것. 그래서 2004년에 눈물 한 바가지 쏟으며 떠나보냈다. “약자에 대한 감수성이 넘치고 열정과 총기를 간직한 너는 꼭 훌륭한 의사가 될 거야. 그 맘 변치 말고 가거들랑 편지해라ㅠㅠ” 파리로 날아간 그는 파리6대학에 들어갔다. 한국말로도 어려운 의대공부를 불어로 잘도 해나갔다. 시험기간에 커피 1.5리터를 두 병이나 마시고 두통이 심해 ‘사리돈’까지 먹는 바람에 카페인 과다복용으로 응급실에 실려 가는 등 몸을 던져 공부하더니 벌써 내년에 졸업이다.
이튿날도 후배가 우리를 데리러 민박집에 왔다. 우산을 쓰기도 성가신 가는 비가 부스스 내렸다. “파리날씨가 원래 이래요.” 아까 집주인이 한 말을 후배도 반복했다. 버스로 시내엘 나갔다. 에펠탑도 봤겠다, 이날은 아무 데나 봐서 적당히 내리기로 했다. 목적지를 정해두면 발걸음이 다급해지고 주위가 차단된다. 아까운 단 하루를 그렇게 흘려버리고 싶지 않았다. 어제의 강행군으로 지쳤는지 애들은 말이 없다. 난 창밖을 응시했다. 부지런히 아침을 여는 사람들. 여기서도 생의 기본적인 장면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소르본대 앞 서점 - 타국에서 만난 철학자오빠들 “다음역이 소르본 대학이에요.” 후배는 어차피 재학생 아니면 못들어가니 버스에서 보자고 했는데 내가 교문앞이라도 가보자고 했다. 내렸다. 꼭 왕자와 공주가 가는 성 같았다. 병정이라도 서 있을 것 같은 분위기더니 정문이 굳게 닫혔다. 구경 오는 사람이 많아서 그렇단다.
나에겐 니체가 더없이 매력적이지만, 들뢰즈는 경이감을 주는 철학자다.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책을 쓸 수 있었을까’ 경탄했다. (이해는 못해도 충격은 받는다) 구경 수준으로 훑어본 들뢰즈의 다른 책들도 그랬다. 개념을 만들어 주장을 전개하는데 개념의 치밀함, 해석의 독창성, 논리의 집요함이 놀라웠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한 사람이 천재적 재능이나 학문적 열정만으로 우연히 꽃 피워낼 수 있는 결과물이 아니다. 토양의 문제였다. 어려서부터 ‘철학의 나라’에서 성장한 훈련된 신체이기에 이런 책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뢰즈가 다닌 대학이야. 예전엔 종합대학이었는데 68혁명 이후 파리4대학이 된 거지. 아들아, 너도 다닐 수 있어! 파리 대학은 들어가긴 엄청 쉽대. 1학년에서 2학년 올라갈 때 추풍낙엽처럼 죄다 떨어져서 그렇지.^^”
우리는 비도 피할 겸 학교 앞 철학서점에 들어갔다. 후배도 처음이라는데 “의대서점보다 크다”며 놀라워했다. 책이 철학자 별로 진열 돼 있었다. 아들이 난리다. “엄마, 여기 니체전집 있어요.” “마르크스도 있다” “어, 푸코다.” 집 책꽂이에서 한번 본 철학자들을 거기서 보니까 무슨 ‘고향친구’라도 만난 듯 반가운지 법석이다. 영어가 취약한 꽃수레는 어디로 갔는지 조용하더니 나오기 전에 한 건 했다. “엄마, 여기 플라톤! 이거 플라톤이라고 쓴 거 맞지?” “맞아. 대견한 우리 꽃수레!” (수천권의 책 사이에서 숨은그림찾기 하듯이 '플라톤'을 찾았다)
귀동냥한 얄팍한 상식으로 중무장한 꽃수레. 지난번엔 ‘하룻밤에 읽는 서양철학사’에 나온 철학자 계보를 일독했다. 그 뒤로 “엄마, 내가 아는 철학자 말해볼 게.” 라며 또래 애들이 공룡이름 외우듯이 철학자를 줄줄 읊어대곤 했다. 그런데 또 자꾸 까먹어서 나를 귀찮게 해서 “차라리 이름이 쉬운 동양철학자를 외우라”고 권했다.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등등을 말해줬더니만 한다는 말이, “어? 노자란 사람도 있어? 스피노자랑 다른 사람이야?” -_-;;;
동양인 가족이 서점에 와서 수선 피운다고 흉볼까봐 얼른 나왔다. 책의 물질성을 사랑하는 ‘소장’학파로서 기념 도서를 사고 팠지만 한국말로 번역된 것도 쩔쩔매는 판국이라 참았다.
채식자, 게이, 공산당원, 이주민 - 파시즘이 없는 나라 베트남전과 인종차별, 권위주의와 기성 제도에 맞서는 커다란 저항사태 68혁명이 일어났던 생 미셀 거리(맨 위 사진)를 찬찬히 돌아서 후배가 아는 작은 레스토랑으로 갔다. 점심때라 사람들이 많았다. 혼자 와서 ‘풀코스’로 밥 먹는 중년 여성들이 눈에 띄었다. 애들 다 키워놓고 나이 들수록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우리네 엄마들과 달리 유럽쪽 여성들은 젊으나 늙으나 ‘혼자 놀기의 고수’인 것 같았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메뉴판에 ‘채식주의자를 위한 메뉴’가 마련돼 있었다. 그곳은 세계 각국 관광객을 위한 큰 음식점이 아니라 현지인들만 아는 작은 레스토랑이다. 삶의 구석구석까지 미친 ‘일상화’된 다름을 위한 배려와 공존의 장치에 감동했다. 선진문화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파시즘은 정치 형태가 아니라 욕망의 형태, 사유의 형태다. 일상 곳곳, 먹는 것이든 생각하는 것이든 사는 것이든 ‘같지 않음’에 가해지는 폭력과 차별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영혼에 숨통을 틔우는가.
아이들은 연어와 소고기 요리로 포식하고 어른은 와인 한 잔으로 낮술을 즐겼다. 세느강 따라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세느강 시테섬에 떠 있는 저 뾰족탑. 왜 나는 파리의 명소를 보는 순간 할 말이 ‘크다’ 밖에 없는지;; 암튼 대단했다. 이것이 소싯적부터 교과서에서 눈 아프게 봐오던 중세고딕양식이로구나! 내부는 더 정교하고 휘황찬란했다. 내가 건축학도면 미칠 것 같았다. 빈틈없는 비례와 균형이 숨통을 조여 오는 느낌에 두렵기도 했다. ‘美란 공포의 시초’라던 릴케의 말이 바로 이런 뜻일까.
“이 성당 짓는데 250년 걸렸대요.” 얼마 전에 외벽 때 벗기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마쳤다고 한다. ‘대성당’은 겨울바람에 씻겨 더 청명해지면서 하루하루 깊어가고 있었다. 1층을 한바퀴 돌고 나왔다. 괜히 아쉬워 주변을 거닐다가 위대한 성을 떠받치고 있는 세느강가를 한참 바라보았다.
“언니, 저 아래 강 옆을 여름에는 차 못 다니게 다 막아놓고 모래를 깔아요. 바닷가 못가는 사람들 일광욕하라고요. 파리시장이 그렇게 한다고 했을 때 시내 대로에 누가 나올까 했는데 정말 최소한만 걸치고 해변가처럼 일광욕해요. 그 장면이 진짜 웃기고 완전 장관이에요.” 파리시장이 일도 잘하고 인기가 좋단다. 3선이나 했는데 사람들이 대통령 나오라고 한다고 그런다. 무려 '게이'라는데, 어쩌면 최초의 게이대통령이 프랑스에서 나올지도 모르겠다.
후배가 사는 동네는 일산처럼 파리 근교다. 그 지역 시장도 '짱'이라고 자랑이다. 시장이 ‘프랑스공산당’ 당원출신인데. 외국인 차별이 하나도 없고 혜택도 다 누리고 모든 행정절차가 파리보다 훨씬 간편하고 빠르게 처리되는 완전 이주민들의 천국이란다. 후배도 프랑스공산당 당원이다. 유학생, 이주민 아무 구별없이 정당 활동이 완전 보장된다고 한다. ‘그런 세상이 다 있구나.’ 작년에 울 나라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난 이주노동자 미누가 떠올랐다.
세익스피어서점 - 지조와 향기 있는 작은책방
수다를 떨며 노트르담대성당 근처 세느강가 세익스피어서점에 다다랐다. <비포라이즈>에서 헤어진 두 사람이 10년 만에 재회하는 장소. <비포선셋>은 소설가가 된 에단호크가 ‘저자와의 대화’를 하는 장면을 줄리델피가 지긋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노트르담대성당 문짝 하나;; 규모에도 못 미칠 것 같은 작고 낡은 서점. 밖에도 안에도 ‘영화 비포선셋 촬영지’ 안내문은커녕 영화의 스틸컷 한 장도 붙어 있지 않다. 영화가 흥행작이 아니기도 했지만 겨울연가 촬영지 남이섬이 배용준 최지우로 도배된 것을 생각하면,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절제력’과 ‘도도함’이다.
단 책은 있다. 책방 한 구석에 <Before Sunrise and Before Sunset>가 다른 책들 사이에 '무심히' 놓여 있다. 대본집이다. 책 파는 곳답다. 부회뇌동하지 않는 이 침착함이 세익스피어서점을 책방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줬으리라. 땅값 비싼 동네인데도 불구하고 재개발에 허물어지지도 않고, 리모델링으로 세월의 흔적을 지워버리지 않아서 감개무량하게 좋았다. 2층에는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과 헌책 파는 곳도 있었다. 겉은 누추해도 안으로 은근히 넓고 아늑했다. 다음에 파리 오면 여기서 한나절 머물다 가리라 다짐했다. <Before Sunrise and Before Sunset>을 구입했더니 앞장에 세익스피어서점 인장을 쾅 찍어준다. 꼭 담임선생님한테 ‘참 잘했어요’ 칭찬도장 받는 기분이었다.^^;
상장까지 받고 났더니 모든 ‘관광의욕’이 사그라졌다. 파리에 왔으니 백화점 한 번 가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후배의 말에 “안 가도 배부르다”고 답했다. 서점만큼 백화점도 좋아하는 속물이지만 세계적인 유명 브랜드의 좋은 물건은 한국에도 이미 봐온지라 굳이 여기서도 그걸 또 볼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비싸서 사지도 못하고. 당시로서는 수입 불가인 ‘파리공기’ 흡입이 중요했다. 지하철을 타고 파리 북부로 이동했다. 무랑루즈 풍차가 보이는 카페에서 커피한잔 마시고 몽마르뜨 언덕을 올랐다.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우울한 도시’ 파리에게 이별을 고하고 오를공항으로 떠났다.
귀환불능자 - 천개의 바람이 되어
이틀 동안 민박집에 데려다 주고 데리러 오느라 고생한 후배에게 많이 고마웠다. 오죽하면 민박집 주인이 친언니냐고 물어봤다. 계약하기 전부터 무척 신경을 쓰더라며. 후배 남친도 그랬다. 후배가 저렴하고 좋은 민박집 찾느라 여기저기 정말 많이 알아봤다고. 혈육과 국경을 초월한 자매애에 가슴 뭉클했다. 그는 ‘국경없는 의사회’말고 다른 '이름 없는 단체'에서 활동할 거라고 그랬다. 파리에 와서 알아보니까 국경없는 의사회가 진짜 절실한 약한 자들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더란다. 크고 유명한 단체들이 갖는 한계에서 그곳도 자유롭지 못한 모양이다. 우리나라도 ‘기초수급자’ 자격에 미달하는 사각지대 빈민이 그렇 듯이 더 주변으로 추방된 자들이 있을 것이다. 초심을 잃지 않고 더 예민하게 깨어 있는 그의 모습에서 그동안 좋은 사람들과 공부하며 잘 살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서울에 와서 무사귀국을 알리는 통화를 했다. “언니, 인생 휴가 받아서 애들 두고 한 6개월 놀러 와요.” “흑. 말만 들어도 황홀하다. 그런 날이 올까?-.-;” “왜 못 와요. 언니가 결단 내리면 되죠. 저도 의사시험 합격하면 일 년은 쉬고 여행 다닐 거예요. 지난 6년 동안 엄마 왔을 때 스위스 간 게 다에요.ㅠㅠ 파리에는 좋은 행사가 많거든요. 랑시에르가 구민회관 같은데서 무료로 강연하고 그래요. 할아버지부터 애들까지 사람이 꽉 차서 토론하는데 얼마나 좋다고요. 그동안 못 간데 다 다니려고요.” “그래. 재밌겠다. 네 인생휴가에 내인생휴가 일정 맞춰 볼게. 꿈조차 못 꿀 건 없으니까.” 그러마 했다. 그 순간만은 약속하고 싶었다. 귀환불능자가 되어버린 그를 만나기 위해선 같이 바람이 되는 수밖에 없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