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첫 해외여행을 갔다. 베푸와의 동행. 동남아 7일짜리 자유여행사 상품이었다. 원래 우리는 유럽배낭여행을 가고팠다. 그런데 유럽을 가려면 최소한 보름은 필요했다. 그 때 나는 다섯 살 바기 아들과 그렇게 오래 떨어지면 큰 일 나는 줄 아는 소심한 엄마였기에 일주일에 타협을 봤고 만만한 동남아행을 결정한 것이다. 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뭔가 꽤 알려진 명소들, 멋진 바다 보고 좋은 호텔서 먹고 자며 호강한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여행’이 아니라 ‘관광’이었다. 지하철 노선처럼 정해진 대로 다녔으며, 매우 등 따시고 배불렀기에 그건 관광이지 여행이 될 수 없다.
그 때 못간 유럽. 그 때 못한 여행. 십년 만에 스위스에 가면서 아무런 준비도 안 했다. 제네바에 있는 선배는 어떤 여행을 원하는지 대충 목적지라도 정하라고 당부했건만 대답만 하고 그러질 못했다. 서울을 비우는 동안의 일들을 처리해놓고 가느라 짐도 그 전날에야 꾸렸다. 내심 믿는 구석도 있었다. 스위스는 어디든 눈만 돌리면 ‘그림엽서’라고 이구동성 말했으니까. 여행사 패키지처럼 명소중심의 투어 말고, 자유하며 떠돌고 싶었다. (스위스다운 동네 풍경)
또 설사 좋은 곳을 가지 못한다 해도 최악의 경우 선배집에서 먹고 자고 뒹굴며 7박 8일 언니형부와 대화만 나누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것 역시 서울에서는 하기 힘든 경험 아닌가. 하나같이 말했다. 스위스가 살면서 자주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니까 뽕을 빼라! 그치만 나는 자연경관도 좋지만 사람한테도 잘 감동하고 기운을 얻으니까 상관없었다. 형부는 산, 언니는 바다. 두 사람의 품에서 쉬다 와도 좋은 거다. 스위스행 비행기에 오르며 정의내렸다. 나는 지금 목적 없음이 목적인 여행을 떠난다.
스위스 8일, 파리 2일 다녀왔다. 스위스 여행 중에 잠시 파리를 들른 것이다. 그런데도 파리 여행후기는 곧바로 쓰고 스위스는 한 달이 넘도록 추억을 가슴에만 저장해두었다. 스위스에서 최상의 숙식 및 다양한 음주제공과 풀코스 가이드에 힘써준 선배부부는 섭섭함에 토라져버렸다. “파리만 좋아하고 스위스는 진정 별로였더냐?” “그럴 리가요, 아니옵니다. 기타과목 먼저 하고 국영수는 나중으로 미뤄놓았을 뿐이고~”
스위스는 아름답고 여유로운 나라다. 파리는 역동적이고 자유로운 도시다. 장미와 백합처럼 향기와 자태가 다르다. 몸에 남아 있는 추억도 그렇다. 혁명의 도시 파리는 재채기처럼 토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근질근질함이 있었고, 중립국가 스위스는 산처럼 품고 침묵해야 마땅한 묵직함이 있었다. 나름은 내적요청에 충실한 것이다.
“형부, 여기 사람들 운전이 여유로워요”
“응. 전임자가 그러더라고. 삶의 속도를 서울보다 세 배 정도 줄이라고. 처음엔 힘들었는데 이제 적응이 되네.”
"공기도 진짜 좋아요."
"그치? 서울 살다가 여기 있으니까 폐가 나약해질 것 같다고 선재(선배아들)가 그러더라고.."
제네바에 도착한 첫날, 작년 8월 스위스 특파원으로 간 형부와 언니의 안내에 따라 제네바 시내를 둘러보았다. 유엔본부, 국제노동기구, 적십자 등등. 소싯적 교과서에서 겁나게 봐오던 ‘세계평화와 인류복지’를 위해 세워진 건물들을 육안으로 확인했다. 운동회나 하이마트 매장 앞 빨래줄에 매달려 있던 색종이 크기의 만국기도 널따란 마당에 꼿꼿이 늘어서서 국기숲을 이루었다. 뉴스의 자료화면이나 관광객들이 사진 찍는 단골 배경이라서 그런지 처음 보는 데도 친숙했다.
제네바 역 근처는 번화가다. (사진) 명품과 금융의 거리. 전 세계 부자들의 돈이 들고 나는 곳인 셈이다. 그런 데 치고는 우아하면서 소박했다. 국제금융의 메카 뉴욕과는 다른 이미지일 것 같았다. 제네바에는 일단 하늘을 가리는 높은 건물이 없고 한산했다. 탁 트인 파란 하늘 아래 숨 쉬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더디 가는 기분이었다. 낮고 완만하게 흐르는 이국적인 거리를 통과했다. 양옆에 테라스가 예쁜 건물들이 커튼처럼 펼쳐진다. 차도엔 아우디, 폭스바겐, BMW, 벤츠 등 멋진 자동차들이 택시처럼 흔히 지나갔다. 차도 크고 매끈하고 사람들도 늘씬하고 멋지다. 행인들은 주먹만한 얼굴들을 내놓고 긴 코트자락 휘날리며 은혜로운 기럭지로 유유자적 활보했다.
2월 바람이 여간 스산한 게 아니었다. 차안에서 눈으로 훑고 있자니 오락실 같았다. 고정된 의자에서 핸들만 돌리며 커다란 스크린을 바라보는 기분. 시시각각 꿈결 같은 풍경이 스쳤다. 세계에서 제일 큰 호수 레만호도 제네바에 있다. 거의 바다급이다. 선배네 집이 있는 동네로 가는 길에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레만호에 노을 지는 광경을 보는 호강을 누렸다. “비올 때랑 화창할 때 흐릴 때랑 호수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선배가 귀띔한다. 바다의 넓이에 호수의 고요함을 가진 레만호. 평화로운 나라 스위스에 있어 마땅한 호수였다. (흐린 날 저 멀리 레만호)
(제네바의 아름다운 뒷골목)
스위스에 간 선배부부는 한동안 외로움을 호소했다. 밤문화가 번성하고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국과 달리 스위스는 조용한 밤의 나라다. 두 사람 부부 공히 술과 사람을 좋아한다. 그런데 이곳의 한국인은 국제기구에서 근무하는 외교관과 연구원들이다. 교양 넘치는 친절한 사람들이지만 재미가 없단다. ‘코드’가 맞지 않는 부류였다. 그런데 언젠가 통화하다가 언니 목소리가 밝아졌는데 이유인 즉, “말이 통하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제네바에서 첫날. 코드가 맞는 그분들이 선배네 공동구매한 물품을 가지러 왔다가 합석하게 됐다. 애들은 재우고 어른 다섯이 술과 담소의 밤을 보냈다. 남자분이 유엔에서 일하는데 제3세계 빈곤문제를 위해 힘쓰고 있었다. 박식하고 논리적이고 정치적 아이디어와 유머가 풍부했다. 기자생활을 오래한 형부도 결코 뒤지지 않았기에 대화거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절대빈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에 관심이 많은 나는 피곤해서 두 눈이 감기는 와중에도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정치적 지향이 같은 동지들과 얘길 해도 답답한 구석이 있는데 그날은 대화를 나눌수록 흥미로웠다. 이유가 뭘까. 유럽은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토론이 일상화됐다. 그런 공기에서 공부하고 생활한 사람들은 대체로 혈연, 지연, 학연, 정파에 얽매이지 않는 대인배적 관점을 지녔다. 사고의 틀이 다르다. 그분들도 그랬다. 대학은 한국에서 마친 386이었지만 참신하고 진중했다. 꽤나 급진적인 얘기를 해도 듣기에 부담이 없었다. 스위스에서 8개월 간 지내면서 한국정치와 물리적 거리를 두고 스위스에서 몸담은 언니와 형부도 외부자의 시선에서 더 깊고 풍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등요리사 은주언니의 훌륭한 밥상)
형부의 기획기사에 관한 논의 도중, 내가 스위스 가기 직전 만났던 윤구병 선생님에게 들었던 감동적인 문구 '모든 바람에 씨를 뿌린다'란 말을 던졌더니 그것이 불씨가 되어 대화에 탄력이 붙었다. 좋은 가치는 널리 알려야 한다는 '파종론'을 골조로 인류의 구원에 관한 유러피안드림으로 진도를 뺐다. 그래봐야 밥 굶은 사람 없는 세상에 관한 얘기이다. 지구역사상 유래없는 물질적 풍요의 시대에 이게 왜 엄청난 상상이 되어야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랬다. 암튼 알코올 기운과 함께 허공으로 사라진 이야기 중에 우리나라에서 교육문제에 대한 혁신적인 대안을 가진 ‘교육정당’을 만들어보라는 제안이 나왔다. 기억에 남았다. 교육이 한국정치의 난마처럼 얽힌 문제의 거의 모든 키를 쥐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솔깃했다.
서로 다른 삶의 배경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것. 그리하여 새롭게 감각하고 사고할 수 있음이 여행의 묘미라면 첫날 여행은 백점이었다. 낮도록 눈이 호강하고 밤에는 입과 귀가 즐거웠다. 선배네 내빈접대용 고품질 와인과 스위스에서 3만원에 판매되는 참이슬 재고가 줄긴 했지만 덕분에 유쾌했고 유익했다. 역시 좋은 경치에서 좋은 사람과 술을 마시면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리다. 그것을 무려 천혜의 땅 스위스에서 확인하게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