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고 따뜻한 검은색 옷으로 최대한 겹겹이 입느라 거울 앞에서 패션쇼를 했다. 추운 것도 싫지만 둔한 건 더 싫었다. 아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아들아, 이렇게 입으면 따뜻하겠지? 근데 너무 투박한가, 조끼를 벗을까....” “엄마, 장례식인데 그냥 소박하게 입어요. 장례식에는 화장도 하는 거 아니래요.” “얘는, 내가 뭐 깃털모자라도 썼냐;; 날씨가 추워서 그렇지. 글구 립스틱만 발랐거든. -_-; 근데 화장하는 거 아니라고 누가 그러던?” “도덕시간에 배웠어요.” '쳇. 도덕시험이나 좀 잘 볼 것이지...'
아들의 잔소리를 뒤로 하고 집을 나선다. 나는 지금 상가에 가는 길이다. 이례적인 장례식이다. 조의금은 온라인으로 넣었다. 고인이나 유가족을 아는 것도 아니지만 모르는 것도 아니다. 일 년 동안 문상은 또 몇 번짼가. 죽어서도 죽지 못한다더니, 육신은 냉동고에 갇히고 영혼은 구천을 떠돌았던 그분들이 오늘에서야 장례를 치른다. 원래는 3일장에 끝나고 길어야 5일장인데 이번엔 355일장이다.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다. 고인들은 그 긴 시간 동안 얼마나 춥고 고달프고 원통했을까. 가는 길이라도 쓸쓸하지 않도록 마음 한 자락 보태는 수밖에. 아무쪼록 장례식에는 문상객이 많은 게 진리다. 가난할수록 친구가 필요하다.
서울역 앞. 장례식이 진행 중이다. 무대는 안 보이고 마이크 소리만 쩌렁쩌렁 울린다. 계단 한구석에 섰다. 높은데서 보자니 촘촘히 들어선 깃발이 철새처럼 떼로 나부낀다. ‘안티 이명박카페’ ‘다함께’ ‘금속노조’ ‘한대련’ ‘전철연’ 반가운 얼굴들. 촛불집회 때 보고 실로 오랜만의 재회다. 둘둘 말려 창고에 잠자고 있었을 깃발들이 모처럼 외출했구나.
그런데 사람은 설 자리가 없다. 광장에서 계단 위를 넘어 역사까지 인파가 흘러넘친다. 분노의 역류인가. 너무 좁다. 좁아 터졌다. 마을회관 앞마당도 이보단 넓을 텐데. 이게 뭐람. 광화문을 빼앗긴 우린 이제 여기서 모여야 하는 건가.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집회가 답답하지만 안개처럼 자욱한 슬픔의 기운은 느껴진다. 누가 와서 근조리본을 건넨다. ‘용산참사 진상규명’이라 쓰인 검은 리본을 가슴에 달았다. 춥지는 않았지만 발은 시려웠다. 마치 한지에 물감 스미듯이 엄지발가락부터 점점 시멘트의 냉기가 전해온다. 소방 훈련하는 것처럼 친구랑 손잡고 건물로 대피해 몸을 녹였다. 그러는 사이 김정환 시인이 나오고 안치환이 노래를 불렀다.
장례식이 끝났다. 그제야 무대 앞에 빈공간이 생긴다. 다섯 분의 영정사진과 시신이 옮겨진다. 노래가 흐른다. <마른잎 다시 살아나> ‘가네. 가네. 서러운 넋들이 가네. 가네. 가아네. 한 많은 세월이 가네...’ 드라마 삽입곡처럼 절묘하다. 연달아 나오는 <동지를 위하여>도 맞춤하다. 빵빵한 음향 시설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에 마음을 달래는데 또 특수효과처럼 하늘에서 눈발이 날린다. 점점 굵어지는 눈송이. 이 모든 상황이 허구 같다. 망루에 올라간 지 25시간 만에 화염에 휩싸여 사람이 숯덩이처럼 타버렸던 것도, 유가족들이 355일 동안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버틴 것도, 저들이 꿈쩍 않다가 일 년이 다 돼가서야 사과한 것도, 다 모두 다 믿어지지 않는다.
서울역부터 용산까지 행진이 시작됐다. 우리는 빠져나왔다. 동생을 데려온 후배랑 친구랑 일단 몸을 녹이고 밥을 먹기로 했다. 용산참사역 가는 지하철을 탔다. 발걸음이 무겁다.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미안했다. 그녀들은 앞서가며 예전에도 엠티가면 다 걸어가는데 꼭 버스타고 먼저 가는 애들이 있었다는 얘기를 하며 머쓱함을 무마한다. 사십대인 나만 뒤끝작렬이다. 밥을 꾸역꾸역 먹으면서도 참회한다. “우리만 밥 먹으려니 좀 걸린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그치?..그래도...”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 평균 연령이 심하게 높다. 젊은 청년들 중심으로 사람이 바글바글하면 이런저런 미안함이 덜 할 텐데. 이 땅의 청년들은 죄다 토플책 붙들고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악전고투 중이다. 안쓰럽고 안타깝다.
남일당 앞. 전경들 반 시민들 반이다. 방패들고 선 시커먼 전경들을 보고 누군가 그런다. "저걸로 눈이나 좀 치우지" 그러게 말이다. 운구행렬은 삼각지까지 왔는데 경찰의 방해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단다. 끝까지 치사하게 나오는 저들이 야속하다. 그나마 심금을 울리는 <민들레꽃처럼>을 따라 부르며 기다렸다. ‘민들레꽃처럼 살아야 한다. 내 가슴에 새긴 불타는 투혼 무수한 발길에 짓밟힌 데도 민들레처럼...모질고 모진 이 생존의 땅에 내가 가야 할 저 투쟁의 길에 온몸 부딪히며 살아야 한다. 민들레처럼...’ 박노해씨의 시에 곡을 붙인 건데 오늘따라 가사가 입김처럼 따스히 스민다.
다섯 시 반이 돼서야 유가족과 영정차량이 도착했다. 맨 앞줄 유가족의 상복에 하얀 눈이 덮였다. 마른 눈사람. 아니, 검은 눈사람. 바람불면 부서질 듯 진이 다 빠진 표정이다. 유가족들이 걱정이다. 지금까진 그래도 같이 모여 지내면서 버텼지만 장례식이 끝나고, 1월 25일 남일당에서 철수하고 나면 더 힘들어질 것이다. 그 공허함과 그리움과 미어짐을 어떻게 견딜까.
서울메트로에 실려 집으로 돌아가며 메트로폴리스 서울을 생각한다. 재개발이 가속화되면 가난한 사람들은 죄다 서울 밖으로 추방된다. 원래 재개발은 빈민대청소 작업다. 원주민이 다시 입주하는 비율은 턱없이 낮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잠실주공아파트만 봐도 13평 아파트 재개발해서 35평 만들면 그 비싼 집에서 어떻게 살겠나. 그래도 민들레처럼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다가 용산참사 같은 비극이 발생한 거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왜들 그렇게 집단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뉴타운에 열광하게 됐을까. 집은 사는 곳인데, 언제부터 사는 것이 됐을까. 가난한 사람들이 엄동설한에 쫓겨나지 않고 가난한대로 자기 살던 자리에서 살 수는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