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때 잠실에 살았는데 무악재로 학교를 다녔다. 학교가 거의 산꼭대기라 교실까지 가려면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새벽6시 전에 집을 나섰다. 겨울이면 캄캄하고 바람이 매서웠다.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에 나와 청소부 아저씨뿐이었다. 슥슥슥 비질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매일 아저씨를 보면서 이렇게 추운데 고생하시고 참 부지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턴가 청소부 아저씨가 불쌍했다. 아저씨네 집이 찌그러져가는 판자촌이 아닐까 그런 상상을 했던 거 같다. ‘가난한 사람들은 왜 계속 가난할까?’ 열여섯 소녀의 질문은, 마흔을 앞둔 내겐 화두가 됐다. 청소부 아저씨에 대한 동정어린 시선은 자본적 가치로 구조화된 삶에 대한 연민으로 확대됐다.
내가 그러했듯이 가난은 불행하다는 믿음, 가난은 도와야 한다는 믿음이 오늘날 우리 도덕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을 돕는다고 밥 굶는 사람이 줄어들까. 그 어느 때보다도 기업의 사회공헌이 일반화되고 빈민구호단체의 활동이 활발하지만, 역으로 우리나라 절대빈곤층 양산과 지구촌 빈민층이 고착-확대되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까. 세상에 불쌍한 사람은 늘어만 가는데 그런 것들에 점점 무감각하고 무기력해져가는 현실에 한숨만 쉬던 차에 ‘동정은 이 세상의 고통을 증대시킨다.’는 니체의 발언이 천둥처럼 다가왔다.
동정이 삶을 유지하는 힘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갖게 된다. 동정은 역겨움과 공포 때문에 삶을 내팽개치는 것이 낫게 보일지라도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이다. 동정은 쾌락을 포함하고 우월함을 적게나마 맛보게 하는 감정으로서, 자살의 해독제가 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잊게 해주고 우리의 마음을 충만하게 해주며 공포와 무감각을 쫓아버리고 말을 하게 하고 탄식하게 하며 행위를 하도록 자극한다. 동정에는 무언가 고양하고 우월감을 주는 점이 있다. (아침놀 136 동정속의 행복)
독설가 니체다운 일갈이다. 니체의 말대로라면, 동정의 수혜자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동정하는 자 자신이다. 주위를 봐도 동정을 행동으로 승화한 ‘봉사’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봉사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봉사는 마약이라고. 처음엔 의무적으로 했지만, 이젠 봉사하는 낙에 산다면서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봉사를 즐긴다. 저마다 봉사하는 이유는 천차만별이겠지만 동정이 우월감을 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어떤 분은 ‘봉사를 하고 오면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며 크고 작은 불평불만이 싹 없어진다.’고 적나라하게 고백하기도 했다. 이를 테면 장애아시설에 다녀오면 우리 아이는 공부는 못해도 건강해서 다행이라고 위안받는 식이다.
이것을 니체는 ‘동정적인 행위에 세련된 자기 방어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보다 강력한 사람, 돕는 사람으로 나타날 수 있을 때, 박수갈채를 받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 때 불행에 빠진 사람들과는 반대로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느끼기를 원할 때, 혹은 불행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권태에서 벗어나기를 바랄 때,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보는 것을 피하지 않기로 결심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오늘날처럼 ‘동정적인 사람들을 선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시대를 지배하는 도덕적 유행일 뿐이라고 말한다. 반대의 유행이 한 때 그리고 오랫동안 지배했던 것처럼!
니체는 왜 동정-연민의 도덕에 반기를 드는 것일까. 차라투스트라의 마지막 허물도 연민이고,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는데 무엇 때문에 죽었는가하면 ‘연민으로 죽었다.’고 한다. 니체의 도덕비판에 연민은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다.
연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영(zero)에 접근하는 삶의 상태에 대한 관용이다. 연민은 삶에 대한 사랑이지만, 약하고 병들고 반응적인 삶에 대한 사랑이다. 연민(동정)의 도덕에 따라 사는 것은 미래를 희생하여 현재에 안주하는 것이다. 결국은 이 도덕은 독이자 마취제이다... 나아가 기독교는 연민의 종교이다. 기독교는 연민을 하나의 미덕으로 간주한다. 기독교는 회개나 양심의 가책 등등을 창궐하게 하여 현실을 왜곡시키고, 경시하며, 부정한다. 이는 즐거운 감정에 대한 불쾌한 감정을 우세하게 한다. 약자의 도덕이다. 연민은 자신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감싸고 보존하고자 한다.
(니체와 철학, 들뢰즈)
연민에 빠질수록 자신을 극복할 수 없게 되며, 삶은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 된다. 삶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실제로 견뎌야 할 고통의 크기가 증가해서가 아니라, 고통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연민은 인간에게서 고통을 극복할 힘을 빼앗아 간다.이런 고통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 타인에게서 같은 것을 확인하고 안도하는 것, 이를 통해 서로를 위무하는 태도에 사로잡히는 것, 그것이 바로 연민이다. 따라서 연민에 대한 니체의 부정은 삶을 부정하고 피안을 그리워하는 허무주의적 기독교에 대한 비난인 것이다.
니체가 동정-연민을 비판할 때 그러한 주장에 심기가 불편했다. 좋다. 당신 말이 옳은데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물질적 기반도 없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홀로서기’하라며 외면하는 게 답은 아니지 않는가. 독거노인에게 일주일에 두 번 반찬배달 함으로 해서 어르신들도 찾아 뵙고, 어쨌거나 입에 풀칠은 하게 해드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현실적인 판단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미봉책일 뿐이다. 노숙자에게 무료급식 하는 곳이 늘어난다 해서 그들의 삶이 개선되지 않고 갈수록 피폐해져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니체는 “고통에 빠진 타인을 연민하는 것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가 없는 자와 그것을 연민하는 자, 둘 모두의 생명력을 소진시키는 최악의 감정”이라고 본다. 약한 사람을 도와줌으로써 그들의 힘을 박탈하고 약한 채로 그 상황에 맞춰 살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한 니체는 기본적으로 남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과 동일하게 느낄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연민은 세상의 고통을 증대시킬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팽창과 더불어 엔지오활동도 급격히 성장했다. 우리나라에는 한비야라는 구호활동가 스타가 탄생했지만 지구촌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월회비 일이만원에 도덕 마일리지 쌓은 것은 유행이 되고 있고 지구촌 가난한 아이들 사진은 범람하지만 고통의 스펙터클은 소비될 뿐이다. 이 모순은 무엇을 말하는가. 더 많은 인권, 더 많은 복지를 요구하면서 근본적인 것, 정치-경제적인 주권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니체가 그토록 신랄하게 동정과 연민의 도덕을 비판한 것도 이런 측면이 아니었을까 싶다. 까칠한 니체씨는 네가 태어날 때부터 피부처럼 주어진 당연한 도덕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질문하라고 부추기니까.
연민은 세상의 고통을 증대시킨다는 니체의 주장도 옳고, 측은지심이 인류를 구원한다는 인륜적 도덕도 옳다. 그 자체로 그른 것은 없다. 연민과 측은지심이 어떤 지배 질서 하에 놓이고 어떤 삶의 실천으로 승화되느냐에 따라 그것은 고귀한 연민이 될 수도, 천박한 연민이 될 수도 있다. ‘가난한 사람은 왜 계속 가난해야 하는가.’ 가난한 사람에 대한 동정과 연민에서 출발한 나의 질문은 정답 대신에 또 다른 무수한 질문을 낳고 있다. ‘어떤 게 가난일까. 가난이 왜 꼭 나쁜 것인가.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면 어떻게 돕는 것이 옳은가.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가 동정을 넘어 새로운 삶을 낳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