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일이 버거울 때,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라는 표현을 쓴다. 세상의 짐을 혼자 걸머진 듯한 절망감에 휘청댄다. 이렇게 나를 자꾸 주저앉게 만드는 것, 차라투스트라는 이를 ‘중력의 악령’의 소행이라고 한다. ‘날지 못하는 사람은 대지와 삶이 무겁다고 말한다. 중력의 악령이 바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삶이 무겁고 고된 이유는 “우리가 요람에 있을 때부터 사람들이 지참물로 넣어준 이것” 때문이다. 바로, 선과 악이라는 지참물. 정확히 말하면, 선악을 척도로 하는 가치관 - 도덕이다. 어려서부터 공기처럼 받아들여 온 ‘착하게 살자’의 기치 아래 펼쳐지는 나날들. 아이 때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착한 자식으로, 선생님에게 고분고분한 착한 학생으로, 사회로 나가면 조직의 룰과 상사에 복종하는 착한 직원으로, 결혼해서는 착한 며느리로, 돈 잘 버는 착한 아빠로 살아간다. 나보다는 ‘남’의 도덕과 평판을 기준으로 살아간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의구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낡아 빠진 자부심’, 선악이라는 지참물이 삶에 천근만근의 무게를 부여하는 것이다.
나의 인생인데 오직 타인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 이를 일컬어 흔한 비유로 ‘노예적 삶’이라고도 한다. 니체는 이를 노예의 도덕이라고 부른다. 니체에게 ‘선악’은 노예의 지참물이다. 약자의 도덕적 판단은 늘 타자로부터 출발한다. 타자가 악하다는 판단 위에서 자신이 선하다는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식이다. 타자에 대한 곁눈질로부터 자신의 평가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그것은 수동적이고 반동적이다. 니체 저서의 제목이기도 한 <선악을 넘어서>는 기존의 노예적 도덕을 넘어서라는 뜻이다.
선악을 넘어서 우리는 좋음과 나쁨의 가치척도를 찾아야 한다. 좋음과 나쁨. 이것은 수혜자가 아닌 행위자 기준의 판단방식이다.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강자의 도덕이다. 좋음과 나쁨은 나에 대한 좋음과 나쁨이다.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으로 넘친다는 점에서 이것은 자발적이고 능동적이다. 고귀한 도덕, 주인의 도덕이다.
“선하다는 자들은 진실을 말하는 법이 없다. 저들처럼 선하게 되는 것, 정신에게는 그것이 일종의 질병이다. 선하다는 자들은 양보도 하고 순종도 한다. 그러나 복종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기 마련이다!”
니체가 보기에 선하다는 것의 문제점은 바로 이것이다.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 어린 시절부터 옳다고 규정된 것에 대해 네가 한 번도 깊이 성찰해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도덕. 세상이 만들어 놓은 가치판단의 척도에 휘둘리다 보면 자신을 ‘가장 늦게’ 발견한다. 중력의 악령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이 중력의 악령에게 벗어나 새가 되어야 한다. 타조처럼 말보다 빨리 달리면서도 대지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게 아니라 새처럼 날아야 한다.
‘가벼워지기를 바라는 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무조건 자기 자신을 참고 견뎌냄으로써 쓸데없이 떠도는 일이 없도록, ‘자기 자신을 건전하며 건강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한다.” 이 과정은 험난하고 고되다. “나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자는 먼저 서는 법, 걷는 법, 달리는 법, 기어오르는 법, 춤추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처음부터 나는 법을 배울 수는 없다.”
그것은 또한 다른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소용없다. 차라투스트라는 “나는 나만의 길과 방법으로 나의 진리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자기만의 도덕’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내 신체에 맞는 도덕은 나만이 만들고 창조할 수 있다. 남들과 같은 삶이란 존재하지 않고 그들이 속속들이 내 삶의 조건과 사정을 알지는 못하니까.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도중에 늘 길을 묻고는 했지만, 마지못해 그렇게 했을 뿐이라며, 물어물어 길을 가는 것 또한 내 취향에 거슬린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차라리 직접 그 길에게 물어가며 길을 가려 시도해보았다.”고. “오직 시도와 물음만이 나의 모든 행로였다”고 말한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나의 취향. 나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숨기지도 않는다. 모두가 가야할 단 하나의 길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