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성의 역사’는 모두 세 권이다. 1권 앎의 의지, 2권 쾌락의 활용, 3권 자기배려. 그는 이 방대한 저서를 왜 썼을까.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일단 푸코는 '성은 억압되지 않았다.'는 말로 논의를 펼쳐나간다. 성에 대한 엄격한 금지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이 말해졌다는 것. 이같은 공적인 성담론이 확산은 '성의 주체'와 '성과학'을 탄생시켰고, 서구 현대의 개인은 자기-실천에 따라 발견되는 자기 몸속에 있는 진실이 아니라, 자기-인식(해석)에 따라 저 멀리 존재하는 진실을 찾으려는 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권력의 예속화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푸코는 계보학적으로 증명한다. 계보학은 가치의 가치를 묻는 니체의 철학적 접근방식이다. 우리가 자명하다고 믿는 것, 근본원인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권력 효과나 담론의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것, 그 과정에서 행해진 실천들을 밝히는 작업이다. 성 담론화가 어떻게 개인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아 권력에 예속시키는지 다음의 사례를 보자.
가령 “1867년 어느 날” 주이라는 날품팔이꾼이 “밭가에서 어린 소녀로부터 약간의 애무”를 받은 사건에 대해 푸코는 시골마을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상적 사건인데도 ‘집단적 불관용’ ‘사법적 소송’ ‘의학의 개입’ ‘주의깊은 임상적 검사’ ‘거창한 이론적 구축의 대상’으로 변할 수 있었다“고 지적, 프랑스 사회의 “앎과 권력제도가 그 하찮은 일상의 무대를 엄숙한 담론으로 뒤덮을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역자서문 중)
고대-그리스 사회는 어땠을까.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할 때, 고대 그리스 델포이 신전 현관 기둥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는 사유하는 실체로서의 나를 알라와는 전혀 다른 의미다. 고대 그리스에서 너 자신을 알라는 자기자신을 배려하기, 자신에게서 즐거움을 발견하기, 자기 자신과 친구가 되기, 자기 자신을 지배하기와 같은 자기를 향한 감성적 실천을 내포한다. 여기서 앎은 자신의 신체적 욕망을 돌봄으로써 ‘좋은’ 삶을 성취하는 실천 기술에 내포된 지식이다. 이것이 성애술(아르스 에로티카)이다.
이러한 실천적 감성으로서의 너 자신을 알라가 수동적 감성으로서의 너 자신을 알라로 전도된 형태가 성과학(스키엔티아 섹슈알리스)이다. 성애술의 목표가 자기-지배라면 성과학의 목표는 자기-포기다. 성애술의 전술이 자기-돌봄이라면 성과학의 전술은 자기-인식(자기-해석)이다. 성애술에서는 진리가 실천적 과정에 있다면, 성과학에서는 실천적 과정이 진리에 도달하는 수단이 된다.
자기 지배가 자기 인식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고백의 제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중세시대부터 서양사회는 고백이 진리공정의 핵심절차로 자리 잡았다. 한 개인의 진실은 자신의 행위와 고백에 의해 산출된다는 관념이 지배했다. 이 같은 고백의 절차에서 자기-인식의 진실은 고백을 듣는 자에게 있다. 반성문을 요구하는 교사, 자백서를 요구하는 경찰 등. 고백의 제도 속에서 형성된 자기-인식의 진리는 감성적 실천의 주체를 타자의 지식-권력에 예속시킨다. ‘나’를 알기 위해서는 항상 사제에게, 교사에게, 의사에게, 정신분석가에게 의뢰해야한다. 나를 알기 위해 나를 타자에게 양도하는 권력 장치의 예속화가 발생하는 것. 그래서 푸코는 “성의 장치에 대한 반격의 거점은 욕망으로서의 섹스가 아니라 육체와 쾌락임에 틀림없다.”고 역설한다.
푸코는 죽음의 권리와 생명에 대한 권력을 다루며, 개인의 탄생을 근대의 생명-통치 권력의 탄생 속에서 고찰한다. 과거 군주가 생사여탈권의 권력을 갖고 있었다면, 이제는 권력이 세력을 가로막거나 굴복시키거나 파괴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세력들을 산출하고 증대시키며 정리하게 되어 있는 권력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죽게 ‘하든가’ 살게 ‘내버려두는’ 낡은 권리가 살게 ‘하거나’ 죽으므로 ‘몰아내는’ 권력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생명에 대한 권력의 조직화는 육체의 규율과 인구조절이라는 두 가지 극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제부터 권력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온통 에워싸는 것이 된 것이다. 다양한 규율, 가령 초등학교, 중등학교, 병영 일터가 고전주의 시대에 급속하게 발전한 현상, 그리고 출생율, 수명, 공중보건, 주거, 이주 문제가 대두된 현상 등을 통해 “생체-권력”의 시대가 열린다. 생체-권력은 틀림없이 자본주의 발전에 불가결한 요소였을 것이다. 자본주의 발전은 육체가 통제되어 생산체제로 편입되는 것을 대가로 치름으로써만, 인구현상이 경제과정에 맞추어지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만 보장될 수 있을 뿐이다.
이 때 섹스는 생명의 정치 기술체계가 전개된 두 가지 축의 연결점이다. 육체의 규율, 즉 훈련, 체력의 강화와 배분, 에너지의 조절과 경제적 사용에 종속된 섹스, 또 하나는 인구조절 영역의 섹스다. 섹스는 두 가지 층위로 편입되고 아주 미세한 감시, 끊임없는 통제, 지극히 세심한 공간적 구획 정리, 한없는 의료 또는 심리 검사, 육체에 대한 미시권력을 야기한다. 개인의 몸에 작동하는 권력의 장치들. 사회 곳곳에 퍼진 미시권력. 권력의 생산성과 능동성. 피의 역사에서 성의 역사로의 전환. 그것이 야기한 규율권력의 일상의 통제. 규율 미시권력의 우연한 접합으로 그토록 자본주의가 오랜기간 유지되었다는 통찰. 지배/피지배라는 단일한 거시적 패러다임 하나만으로 통찰될 수 없는 푸코의 연구가 매우 어려우면서도 놀랍고, 의미있게 와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