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늦겠다!” “빨리해!” 아침마다 아들에게 퍼붓는 말은 대략 이 세 마디로 압축된다 하겠다. 8시 30분까지 학교를 가야하는데 꼭 25분까지 팬티바람에 어슬렁거리면 애터져죽을 지경이다. “가만 보면 늦는 사람은 항상 습관적으로 늦어. 맨날 허둥대고 타인에 대한 배려도 없고 자기 지배력도 약한 사람인 경우가 많거든. 그런데 네가 그렇게 될까봐 그래. 제발 시간 개념 좀 갖고 살아! (이놈아,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러냐!)”
이런 잔소리를 아침마다 들으려니 아들도 나 못지않게 죽을 맛일 거다. “안 늦으니까 걱정 마세요” 라며 입을 쑥 내밀더니 언제부턴가 전략을 바꾸었다. 내가 따발총처럼 퍼부으면 미국드라마에 나오는 노란머리 청소년처럼 영어로 말하면서 억압을 분출한다. 내가 황당하고 당황스러워서 “쟤 뭐래?” 그러면 “아니에요~” 그러고는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현관문을 쏙 빠져나간다. 나는 굳게 닫힌 문에다 대고 진부한 대사를 궁시렁 거린다. "저 녀석이 기껏 공부 시켜놨더니 엄마 영어 못한다고 괄시하네...”
우리 집에서도 가끔씩 밥상머리 교육이 이루어진다. 내가 전날 공부한 내용 중에 감동이 남아 있으면 아들에게 얘기를 들려준다. “아들아,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은 하늘에서 심판하는 초월적 신이 아니고 ‘신즉자연’ 우리 삶에 존재하는 내재적 신인데 어쩌구 저쩌구*&^$$()_” 그러면 듣는지 마는지 눈만 뻐끔 거리면서 밥을 먹곤 했다. 내 딴에는 아주 쉽게 설명하는데 감동은커녕 이해도 못하는 거 같아서 심히 애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5분 철학 강의를 듣던 아들이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내가 영어로 말할 때 엄마의 심정을 알겠어요.”
"-.-"
서로의 언어를 공유하지 못하는 슬픈 가족사를 어찌하오리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책이 필요하다. 낯선 언어에 대한 두려움을 깨고 익혀나가는 것이 급선무. 아들도 쉬운 것부터 철학책을 읽고, 나도 이찬승voca라도 다시 뒤적거려야할 것이다. 그러던 참에 마침 아들이 읽기 좋은 책이 나왔다. 고병권 선생님의 철학이야기 <생각한다는 것>(너머학교). 청소년 대상 철학입문서다. 시집보다 약간 두껍다. 글씨도 큼직하고 내용도 쉽다. 아들에게 “읽어봐라” 건네줬더니 앞부분 읽고 나와서는 대뜸 아는 척이다.
“엄마, 좋은 걸 자기만 갖고 있다고 자랑하면 정말 좋아하는 게 아니래요. 남들이 좋아하는 걸 자기가 갖고 있다는 사실을 즐기는 거래요. 그러니까 좋은 건 나눠야한대요.”
고병권이 책을 쓴 이유다. 그가 너무나게 사랑하는 철학의 세계로 아이들을 꼬드기기 위해서 썼다고 서문에 밝힌다. 나도 읽어봤는데 거의 살신성인의 자세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인라인 타다가 부상당한 일, 술이 잔뜩 취해 필름 끊긴 상태에서 집에 찾아간 일 등등. (평생 한두번 겪은) 좌충우돌 일화를 생생히 곁들여 친근감 넘치는 옆집 삼촌 캐릭터를 구축했다. 그러면서 ‘잘 살고 싶다면 철학 하세요.’ ‘생각없이도 살 수는 있어요’ ‘생각이 일어나면 다른 내가 되어요’ ‘생각이 공부고 공부가 자유입니다’라고 조곤조곤 이야기한다. 그래서 아이들뿐 아니라 '성인' 철학의 초심자가 읽어도 아주 좋다.
디오게네스와 한나아렌트, 스피노자, 니체 등의 이야기는 흥미롭게 전개되어 철학하면 왜 행복해지는지, 생각하고 사는 게 왜 중요한지 등 철학의 힘을 느끼게 해준다. 단 삶의 경험치가 작은 아이들이 읽기엔 일상밀착형 예시가 적은 편이다. 아이들을 인터뷰해서 사례를 풍부히 했으면 더 좋았을 듯하다. 가령 생각이 일어나면 다른 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 예전의 내 생각이 유치해보였던 경험 등을 아이의 입장에서 직접 대입해보는 것이다. 울 아들은 별 생각없이 먹다가 환경과 몸을 '생각'해서 채식주의자가 된 일을 꼽았다. 책에서 배운대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육식하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김융희선생님댁 아궁이에 들어간 고추장, 철학은 생각하는 놀이라고 말한다)
고병권은 공부하는 것만큼 이야기를 좋아한다. 강의를 시작하면 고구마줄기처럼 이야기가 끝없이 딸려 나와 쉬이 끝나질 않는다. 아는 것을 나누는 데 능하고 약간 영발도 있어서 강의 장악력이 높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목사나 신부 느낌도 우러나는 중이고 그걸 본인도 그닥 싫어하진 않는다. 한번은 같이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물건 파는 아저씨가 타셨다. 나는 저런 분들은 얼마나 어떻게 연습을 할지 궁금하고 막상 (열차)무대에서 설명을 잘 못하는 분이 타면 조마조마해 죽겠다고 했더니 고병권이 생글거리며 말한다.
"내가 저거 하면 잘 할 것 같아요. 정말 효능을 과학적으로 잘 설명해서 사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할 자신 있는데 ^^”
그렇다면 과연 <생각한다는 것>은 철학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써놓은 책일까? 울 아들에게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생각하지 않음이 악이라는 것, 습관대로 판단하는 것은 생각이 아니란 건 알겠다"고 그런다. 몸과 마음이 한참 자라는 중요한 나이에 '생각'의 물꼬를 터주는 책을 만났다고 생각하니 꼭 보약 먹인 것처럼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