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자기보다 300년 전에 태어난 스피노자를 벗으로 삼는다. 니체는 한 편지에서 스피노자는 자신의 선구자이며 그로 인해 이제 자기 혼자의 고독은 두 사람의 고독이 되었다고 열띤 어조로 고백했다고 한다. 다른 듯 닮은 두 사람. 니체는 신을 부정하고, 스피노자는 신을 긍정했는데, 공통적으로 삶을 사랑했다. 스피노자 철학 역시 삶을 왜곡시키고 파괴하는 모든 초월적 가치와 도덕에 반대하는 내재성의 철학을 전개했다. 니체가 우레와 같은 호통과 아름다운 은유의 방식으로 역설한다면 스피노자는 점잖고 집요하고 치밀한 학자스타일이다. 주석달고 증명하고 정리한다.
“자연(신)은 아무런 목적도 설정하지 않았다” 자연은 인간이 자연에 부여한 목적과는 무관하게 존재한다. 우리는 인간에게 얼마나 유용한가에 따라 좋은 날씨와 나쁜 날씨를 구분하고, 해충과 익충을 가른다. 어린이는 자라서 어른이 돼야하는 ‘미’성년이다. 이처럼 하나의 목적에 갇히면 사물은 언제나 고정된 하나의 본질만을 갖고 그러한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미완의 존재가 된다. 목적론적 사고는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사고다.
스피노자에게 신은 세상을 임의로 만들어낸 창조주가 아니다. 자기 자신을 필연적으로 양태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실체다. 신은 무한히 다양한 속성에 따라 자신을 변용하고, 그 변용의 결과들이 양태다. 이 세상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양태들의 바다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어떤 관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어떠한 방식을 통해서 보다 풍요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정신의 변화(의식)와 신체의 변화(충동)의 간극을 좁히는 실천에 대한 숙고. 이것이 스피노자의 문제의식이고 책 제목이 ‘에티카’인 이유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본질을 욕망으로 본다.인간은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욕망에 따라 느끼고 활동한다. 특정한 방향으로 마음이 쏠리는 데 막을 길 없다. 내 신체에서 솟구치는 거스를 수 없는 끌림과 쏠림이 욕망이다. 스피노자는 이 흐름을 냉철히 관찰했다. 중세사람들은 신에 의해, 계몽주의자들은 이성에 의해 ‘욕망의 억제’가 가능하다고 보았는데 스피노자는 달랐다. 욕망을 자기 맘대로 조절할 수 있다고 믿고 인간의 욕망을 사악하거나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는 기존의 통념에 반기를 들었다. 욕망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자유의지’를 무지에 기반 한 착각이라고 비판했다. 자유는 자아의 선택이 아니다. 알코올중독자는 술을 자신의 기호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그가 술을 마시는 건 자유가 아니라 예속이다. 그의 자유는 술에 대한 예속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욕망은 ‘나’라는 실존을 무한히 지속하려는 힘, 즉 모든 노력, 본능, 충동, 의지작용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는 욕망을 이성으로 억누르는 게 아니라, 욕망을 창조적이고 능동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욕망은 ‘스스로 굴러가는 수레바퀴’다. 발휘할까 억제할까 선택할 수 없다. 만약 욕망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자유의지 때문이 아니라, 욕망이 약해서 다른 힘에 의해 저지되었기 때문이다.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이걸 못하면서 안한다고 생각하고, 할 수 있는 데도 안하는 것을 ‘선’으로 찬미하는 게 니체가 말하는 약자의 도덕이다.
스피노자에게 행함, 표현이 곧 자유다. 욕망과 자유는 비례한다. 자유는 동물적 충동이나 물리적 관성으로부터 의지로의 도약이 아니라, 다른 개체와의 무한한 복합력인 욕망의 확장에 의해 생긴다. 자유는 능력의 확장이다. 자유를 자신의 변용 능력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자유가 곧 능력이라는 것이 처음엔 의아했다. ‘스페셜리스트’가 되라는 건가. 다국적기업들이 직원들의 생산성 높이기 위해 무한경쟁 강요하는 주문도 아니고 뭔가. 물론 능력이 자유가 될 때가 있다. 수영을 할 줄 알면 물속에서 자유롭고, 영어를 잘하면 지구에서 사는데 편하다. 기타를 칠 줄 알면 비오는 밤 자유롭게 낭만을 펼친다.
그런데 능력이 구속이 될 때도 많다. 사람이 할 줄 알면서도 안 하기는 어렵다. 복사기 고칠 줄 아는 사람은 일하다가도 불려가야 하고, 살림 잘하는 여자는 맞벌이 하면서도 밥-빨래-청소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운전 잘 하면 놀러갈 때 차를 몰아야한다. 명절 때 음식 못하는 커리어우먼며느리는 부침개나 뒤집고, 일 잘하는 전업주부 맏며느리만 고생한다. 이렇듯 때로는 '적당한 무능력'이 좋을 때도 많다. 하지만 이것은 극히 노예적인 사고방식이다.
아무리 운이 좋고 인복이 많아도 평생 누군가에게 의탁한 삶을 살 수는 없다. 궁극적으로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자, 표현하는 자, 능력자가 되어야하고 그래야 삶이 굴러가고 자유를 얻는다. 예속적인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그저 운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거나 자신보다 강한 능력을 지닌 개체에 압도되어 그저 수동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주위를 보아도 마누라를 먼저 보낸 할아버지들은 혼자 살기 힘들다. 반면에 할머니들은 일상적인 생활의 영위가 가능하니까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산다. 매끼 식사는 물론 돈도 번다. 지하철 입구나 버스 정류장에서 완두콩이랑 고구마순 다듬어서 파시는 분은 거의 할머니다. 할아버지들은 파고다 공원에 계신다. 노숙자도 남자들이 많다.대체로 엄마-여성들은 삶의 의지(코나투스)가 강하고 존재확장에 능하다. 덕분에 삶을 영위하고 '자유'를 누린다.
"정서의 조절과 억제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을 나는 예속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정서에 복종하는 인간은 자신의 권리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의 권리 아래 있으며, 흔히 더 좋은 것을 보기는 하지만 더 나쁜 것을 따르도록 강제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운명의 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책을 통해 '단 한줄'의 죽비 같은 문장을 발견하고는 자유를 느낀다. '욕망을 이성으로 억누르는 게 아니라, 욕망을 창조적이고 능동적으로 구성하라.'와 같은 스피노자의 말이 내겐 노후대책용 펀드이자 보험의 납입금이다. 니체가 누누이 강조하듯이 자유는 안락, 휴식, 평화의 상태가 아니다. 다른 개체와의 복합력을 통해 욕망(이성)이 확장되고 신체가 바뀌는 과정, 삶도 친구도 달라지는 것. 그러한 전쟁 같은 자유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