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관념에 비해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령 “당신만을 사랑할 테야”라는 사적 고백의 그 빛나는 초월도 끝내 비루한 안일의 체계 속으로 내재화하고 만다. 일상은 무엇보다 몸이고, 그 모든 고백과 의도는 잠시의 부유를 끝내면서 그 몸속으로 가라앉는다. 결심은 잦고 의도는 선하지만, 그런 식으로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 김영민<동무론>
몸은 껍데기고 정신이 알맹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길었다. 나는 생각했고, 고로 존재했다. 그런데 살수록 아니었다. 몸은 정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 몸은 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었다. 학원 가 있어야 할 시간에 떡하니 극장에 가 있다거나 공부하려고 책을 폈는데 잠을 자고 있거나 위장이 아파도 커피는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드라마에서도 알콜상태의 주인공이 헤어진 연인의 집 앞으로 무작정 찾아가곤 한다. 그리고 깨어나서는 중얼거린다. 나는 모른다고. 내 몸이 거기로 갔다고.
니체는 이 몸을 ‘신체’라고 부른다. 신체는 오장육부와 근육과 살과 뼈로 이뤄진 육체와 내면의 충동(에너지)의 흐름의 통합 상태다. 니체의 주장은 이렇다. “정신이 아니라 신체를 믿어라. 우리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도 작은 이성, 즉 신체의 도구, 너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놀잇감에 불과하다.”
우리가 살면서 내리는 행동과 결정은 관습적이고 무심코 하는 행동이 대부분이다. 정신의 명령을 따르기 전에 몸이 반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성보다는 본능과 감정이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도 한다. 이를 니체는 “커다란 이성, 그것은 자아 운운하는 대신에 그 자아를 실현한다.”고 말한다.
“감각기능이 감지하고 정신이 인식하는 대상들은 결코 그 안에 자신의 목적을 지니고 있지 않다. 감각기능과 정신, 그것들 뒤에는 자기라는 것이 버티고 있다...자아는 정신의 영역이라면 자기는 내면의 충동의 형태들이다. 너의 사상과 생각과 느낌 배후에는 더욱 강력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가 있다. 이름 하여 그것이 바로 자기다. 자기, 그것은 언제나 경청하며 탐색한다. 이 자기는 지배하는 존재인 바, 자아를 지배하는 것도 그것이다.”
고로, 나는 행동의 행위자가 아니다. 니체 말로는, ‘광기’가 행동한다. 그런데 가련한 이성은 광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설득하려 든다며 안타까워한다. 엄격한 이성이 아닌 몸이, 충동과 광기가 나를 지배한다니 괜한 염려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겠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반대로 이성이 지배하는 삶이 자로 잰듯 정확하고 행복한가. 회의적이다. 사람은 너무 진지하게 생각할 땐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뭐 먹고 살지’ 고민하다보면 평생 노동의 사슬에 묶여 있게 되고 (요즘은 그마저도 힘들지만) ‘성적 떨어지면 어쩌지’ 걱정하다보니 대학에 가서까지 학원을 다녀야하는 처지가 된다. 회사를 때려치우게 하는 것, 학원프리를 선언하게 하는 것은 내 안의 건강한 충동들, 경쾌한 긍정들이다.
다 큰 어른이 되어서야, 내가 너무 나를 모르고 살았다는 회한이 밀려오는 경우도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여본 적이 없는 경우다. 세상이 등 떠미는 대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위하여 살아도 결국 행복할 수 없는 게 인간이다.
“차라리 강건한 신체에서 울려오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라. 보다 정직하며 보다 순결한 음성은 그것이니.” 죽음 다음 찾아가는 저 세상의 천국이나 삼십년 후 노후의 행복이 아니라 이 대지의 뜻을 전해주는 것은 바로 ‘신체’다. “정신이란 것, 신체에게 그것은 어떤 존재인가? 신체가 벌이는 싸움과 승리를 알리는 전령사, 전우 그리고 메아리 정도가 아닌가.”
신체는 커다란 이성이다. 니체의 말대로라면 일상의 습을 바꾸어서 건강한 충동을 많이 길러놓고 충동의 조형력을 갖추어야 한다. 어떻게? ‘앎’으로써. 앎은 삶의 중요한 자본이다.
“신체는 앎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정화한다. 그리고 앎에 힘입어 자기 자신을 고양시킨다.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있는 자에게는 모든 충동이 신성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