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이 삶을 꽃피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신앙을 필요로 하는지, 흔들리지 않기 위해 고수해야할 ‘확고함’을 얼마나 많이 필요로 하는지가 그가 지닌 힘의 (그의 약함의) 척도이다... 인간은 신앙의 명제를 수천 번이라도 반박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그것을 필요로 하는 한, 언제라도 거듭해서 그것을 진리로 여길 것이다. 신앙, 기둥, 버팀목과 지지대에 대한 요구, 나약한 본능에서 나온 것이다. 의지가 결여된 곳에서는 언제나 신앙이 가장 커다란 갈망과 가장 긴급한 필요의 대상이 된다. 나약한 본능은 비록 종교, 형이상학, 모든 종류의 확신을 만들어내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보존하기는 한다...
다시 말해 명령할 줄 모르는 자는 그만큼 더 간절하게 명령하는 자를 갈망한다. 신, 영주, 신분, 의사, 고해신부, 도그마, 당파적 양심 등처럼 준엄하게 명령하는 자를. 하나의 정신이 저 신앙, 확실성에의 요구와 결별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실행하여, 가벼운 밧줄과 가능성 위에서도 몸을 바로 세우고 드리워진 심연 위에서 춤을 추는 자기규정의 기쁨과 힘, 의지의 자유를 갖는다면 그러한 정신이야말로 자유로운 정신일 것이다.”
(즐거운학문 347절)
한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확실성의 요구'와 결별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리를 찾는다. 기만은 나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진리에의 무조건적인 의지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기만당하지 않으려는 진리에의 의지다. 왜 기만하지 않아야할까. 여기에는 “기만당하는 것이 해롭고, 위험하고, 불행을 가져온다는 생각”이 내포돼 있다. 하지만 무조건적 불신이나 무조건적 신뢰의 편에 서는 것이 더 커다란 이득을 가져다준다고 결정해버릴 만큼, 그대들이 현존재의 성격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slcp‘진리에의 의지’는 ‘나는 기만당하고 싶지 않다’가 아니라 ‘나는 기만하고 싶지 않다. 나 자신까지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도덕의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다른 모든 확신을 희생시킬 수 있을 만큼 단호하고 무조건적인 확신. (이러한 진리에의 의지에서 객관성에 대한 환상과 인과관계, 목적론의 시나리오가 탄생한다.)
신의 죽음 이후 신의 자리엔 과학(진리)이 대신했다. 학문도 믿음위에 기초하고 있다. 신이든, 이성이든, 과학이든 모든 의지할 대상을 필요로 한다.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인간의 근본적인 의지가 신을 만들고 원죄를 만들고 진리를 만들고 우상을 만들었다. 자기비하는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도록 한다. 속된 이 세계 너머 참된 세계와 위대한 진리라는 가상을 세운다. 진정한 어떤 것이 현실 너머에 있다는 관념, 진정한 삶은 지상의 삶 이후에 온다는 관념. 그것이 바로 형이상학적 사유의 요체다.
진리에 대한 의지가 철학과 과학을 지배하고, 진리가 신이자 최고의 법정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신의 왕국이 우리 삶의 다른 가능성을 봉쇄하듯이, 우리의 도덕이 기독교적 도덕에 사로잡혀 있듯이, 진리의 왕국은 우리의 인식 실험을 봉쇄한다. 신앙은 신앙의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신앙 그 자체가 문제다. 신앙은 생산을 질식시키고 빗나가게 하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법관을 비판해야 한다. 법관 대신 강려한 삶의 실험가를 원해야 한다. 나를 가로막는 것은 나의 한계이어야지 진리이어서는 안 된다.
인과론-목적론 비판
"생각과 행동, 행동의 표상은 별개의 것이다. 이들 사이에는 인과의 수레바퀴가 돌지 않는다. 행동의 행위자는 광기다.... 나는 창백한 범죄자처럼 저들 또한 자신을 파멸로 몰 수 있는 그런 광기를 지니기 바란다. 나 진정 저들의 광기가 진리, 또는성실, 또는 정의라고 불리기를 바란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창백한 범죄자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것을 인식하려면, 낯선 것이 친숙한 어떤 것으로 소급되어야 한다. 인식에 대한 요구는 친숙한 것에 대한 요구다. 모든 낯선 것, 익숙하지 않은 것, 의심스러운 것 안에서 우리를 더 이상 불안하게 하지 않는 어떤 것을 찾아내려는 의지.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은 두려움의 본능이다. 그래서 원인과 결과를 찾아낸다. 철학자는 세계를 이념으로 환원시키고는 세계를 인식했다는 망상을 품는다.
우리가 인과성을 믿도록 심리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의도가 없는 사건의 상상불가능성 때문이다. 결과 도식에 따라 원인을 추정하는 인간의 독특한 사고방식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다. 힘들 사이의 권력관계만 있다.
"목표와 목적은 흔히 미화된 구실이다. 배가 우연히 빠져든 조류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으려는 허영심이 사후적으로 만들어낸 자기기만이 아닐까. 배가 그곳을 향하려는 것은 그곳으로 향해야만 하기 때문이 아닐까? 배가 방향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조타수가 없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목적의 개념을 비판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