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 자체’는 없다. 그 자체로 선한 것,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 그 자체로 고상한 것,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없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 물음은 하나의 답만을 강요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아름다움인가 물어야 한다. ‘무엇’은 고정이고 ‘어떤’은 생성이다. 아름다움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배치와 접속에 따른 생성이다. 한 여성이 자신의 일과 만났을 때는 능력 있는 커리어우먼이지만 가부장 질서에 배치되었을 때는 남편의 내조를 못하는 나쁜 여자가 되고 만다. 어느 위치에 서느냐에 따라 진리는 달라진다.
예술도 마찬가지. 좋은 예술에 하나의 진리모델이 있는 건 아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예술가를 통해 바라는 게 다르다. 논리적 사고를 즐겨하는 독일인은 예술에서 몽환적인 열정에 사로잡히길 원하고, 이탈리아인들은 실제 자신들의 열정에서 벗어나 쉬기를 원하고, 프랑스인은 자신의 판단을 과시하고 사람들과 이야기 나눌 기회를 갖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예술에서 자기에게 없는 것을 갈망한다.
예술은 점점 관람객의 관점에서 판단된다. ‘관객을 고려한’ 눈치 보는 예술은 천박할 수밖에 없다. 니체는 자신의 열정에서 흘러넘친 피그말리온의 미학을 요구한다. (피그말리온은 키프로스의 전설적 왕. 그 자신이 조각한 여인의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다. 아프로디테가 그 조각상에게 생명을 주고, 왕은 그 생명을 얻은 조각상과 결혼한다.) 예술은 예술가의 삶의 활동성, 예술가 자신의 권력의지를 말해야 한다. 관람자의 입장을 고려한 게 아니라 창조자의 권력의지에 대한 결과물로서 예술이 가치 있다. 그러므로 “훌륭한 음악가들은 대체로 자신의 예술을 위해 훌륭한 인간이 되어야 했다.”
사람들은 영혼이 비참하고 비애에 빠졌을 경우 사람들은 자신을 도취시키는 것들에 손을 뻗치기 쉽다. 병자로서 예술을 열망할 경우에 예술가들을 병들게 한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비애와 영혼의 비참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시도되어야 하는 일은 “우선 식단을 바꾸고, 육체적으로 고된 일을 하는 것”이다. “나의 친애하는 우울증 환자여, 가장 좋은 것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든 비유적인 의미로든 많이 자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다시 자신만의 아침을 맞게 될 것이다! 삶의 중요한 지혜는 어떤 의미의 잠이든 적시에 잘 줄 아는 것이다.”
자신을 가변적인 양으로 보아라
니체는 힘의 충동에 따른 행위를 중시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그 행위들이 가장 이성적인 행위로서 선택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일단 마음에 떠올랐을 때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명예욕과 허영심을 자극했기에 그것들에 집착하고 그것들을 맹목적으로 수행하게 되는가! 따라서 행위들은 우리 내면에서 우리의 성격과 떳떳한 양심에 대한 믿음, 즉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의 힘에 대한 믿음을 증대시킨다. 이에 반해 가능한 한 이성적인 행위들을 선택하면, 자신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이에 상응하는 약한 감정이 우리 내면에 존속하게 된다. (301절)
우리가 갖고 있는 여러 힘들을 평가할 수 있지만 우리는 힘 자체는 평가할 수 없다. 주위 환경이 힘을 크게 하거나 작게 한다. 사람들은 자신을 가변적인 양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의 수행능력은 유리한 환경에서는 아마 최고도로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환경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하고 그것을 관찰할 때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326) 모든 발명에서 본질적인 것을 수행하는 것은 우연이다. (363)
가장 위험한 망각. (401) 우리는 타인을 사랑하는 것을 잊는 데서 시작해 자기 자신에게서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그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으로 끝난다. (406) 반면에 자신의 적을 죽이려는 사람은 바로 그 때문에 자기 마음 에서 적이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닌지 잘 생각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