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의 대표작이다. 단테의 <신곡>처럼 읽어본 사람은 별로 없어도 제목은 거의 다 아는 ‘고전’이다. 그런데 니체가 궁금해서 이 책을 펼쳤다면 당황하기 십상이다. 니체에 대한 예비적 이해가 없을 경우 <차라>는 제대로 읽을 수 없다. 니체를 이해하는 사람은 <차라>를 이해할 수 있지만, <차라> 하나만으로는 니체를 이해할 수가 없다고 보임러A.Baeumler는 말했다. 이는 <차라>가 니체철학의 입문서가 아니라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마지막에 읽어야 좋을 작품이라는 뜻이다.
<차라>의 이야기 구조는 간단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서른 살에 산속으로 들어가 10년 간 수행을 마쳤다. 잔이 넘치면 흐르듯이, 자신의 풍요를 나누기 위해 인간세상으로 내려온 차라투스트라가 복음을 전하는 과정의 파란만장 스토리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신의 죽음’을 알리고 ‘위버멘쉬(초인)’를 가르친다.
차라는 군중 앞에서 첫 번째 이야기를 마쳤다. “나 너희들에게 위버멘쉬(초인)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할 그 무엇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극복의 대상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 지금까지 모든 것들은 그들 자신을 뛰어 넘어 그들 이상의 것을 창조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지에 충실하라,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설교하는 자를 믿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반응이 없자 차라는 서글퍼한다. 군중이란 얄팍한 ‘교양’을 통해 자에게 자부심을 느끼는 이들로,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바대로 ‘조촐한 쾌락’을 즐기고 행복을 찾아냈다고 말하는 비천한 인간들이다. 모두가 평등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떠받들어온 가치관을 파괴하는 사람을 가장 미워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파괴하는 사람이야말로 창조하는 자이거늘. 길을 떠난 차라투스트라의 첫 번째 깨달음은 바로 이것이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나는 저와 같은 자들의 귀를 위한 입은 아닌가보다.”
들을 귀가 없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은 더없이 위험하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군중이 아니라 그의 ‘길동무’에게 말하기로 결심한다. “나 창조하는 자, 추수하는 자, 축제를 벌이는 자들과 벗하리라.”
여기까지가 머리말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에게 전하는 이야기는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고(신의 죽음) 미래를 생성하는 주문(위버멘쉬의 탄생)으로 가득하다. 또한 다양한 은유와 문체실험이 시도되고 의미의 비약이 잦아서 쉽게 읽히지 않는다. <차라>의 부제가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다. 니체는 독자를 ‘심하게’ 가렸다. 친절하지 않다. 그로 <차라>를 읽기 위해선 니체의 중심사상을 알아야 한다. 정동호의 해설을 참고해서 추려보았다.
니체는 생철학자다 생철학은 인간의 생을 그것을 초월하는 모든 가정을 물리치고 그 자체로부터 이해하려는 철학이다. 생을 모든 철학적 인식과 인간 활동이 그 뿌리를 박고 있는 마지막 거점으로 보고 그것을 그것 밖에 있는 관점으로부터 파악, 평가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하는 철학이다. 생에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 가치는 바로 생 자체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존엄한 것이 생인데도 그 동안 온갖 초월적 이념에 의해 그것이 유린되어 왔다고 니체는 보았다.
이 유린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그것은 세계를 이편의 불완전한 것과 저편의 완전한 것으로 나눈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역시 세계를 덧없는 지상의 것과 영원한 천상의 것으로 나눈 기독교 교의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들은 이편에서의 생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생의 목적이 저편의 완전하며 영원한 세계에 이르는데 있다고 함으로써 목적론을 폈다. 그 결과 우리가 누리는 이 땅에서의 생은 구차한 것, 죄스러운 것이 되어버렸고 저편의 세계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러면서 인간은 현실적 생을 경멸하는 등 자기 비하를 몸에 익혀왔다. 이 같은 이원론과 목적론의 죽음, 이것이 니체가 선언한 신의 죽음이다.
니체가 보았을 때 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극단의 허무주의가 몸에 배었다. 자신의 운명을 감당할 만한 힘을 상실했다. 목적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한 순환의 이 극단의 권태에서 “오 끔찍한 생이여 다시 한 번!”을 외칠 수 있는 건강한 상태가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인간유형이 이 대지의 주인이 되어 인류의 미래를 떠맡아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위버멘쉬의 탄생이 예고된다. 위버멘쉬는 모든 생에 적대적인 형이상학적 가식을 버리고 사실 그대로의 삶을 긍정하며 살아가는 그리하여 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영원회귀가 야기하는 허무주의를 극복할 새로운 인간유형이다. 이는 어떤 특정 존재나 확정된 지위가 아니라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끝없는 자기극복을 통해 성취해야할 개인적 이상이다. 위버멘쉬는 인간 미래의 꿈이다. 니체는 <차라>를 통해 위버멘쉬의 상을 완성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