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면 지는 건데
극장에서 이렇게 많이 웃어본 지가 언젠지 모르겠다. 평일 조조였다. 텅 빈 극장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벽을 치고 다시 나의 옆구리를 찌르니 웃음에 포박당한 기분이었다. 커다란 스크린에 지나가는 장면은 홍상수영화답다. 주인공이 영화감독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하지 않다. 생활여행자의 길 떠남의 풍경인데, 거기에 배치된 인물들 간의 얽힘과 오가는 대사가 재밌다. 딱히 김수현식의 능란한 촌철살인이라기보다 능청맞고 투박하고 격앙되고 오버스러운데 그것들이 시의적절하고 적나라하고 섬세하고 의미심장하다. 같은 이유로, 예전에는 그의 영화가 재밌지만 불편하고 불쾌했는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부끄럽고 불편해서 재밌다. 홍상수 영화, 웃으면 지는 건데. 내가 변한 걸까, 홍상수가 변한 걸까.
주인공이 영화감독 구경남이다. 양치질하면서 다음엔 꼭 이백만이 보는 영화를 만들리라 다짐하는 작가주의 감독. 홍상수는 주인공 구경남을 통해서 자기이야기를 신나게 풀어가고 있다.
미대 출신의 감독이라는 설정을 비롯해서 분위기마저 빼닮았다. 구경남이 단색 면티에 바짓단을 걷고 운동화 신고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있을 땐 진짜 홍상수다.
구경남에게 영화과 학생이 다가와서는 '저는 감독님의 영화를 통해서 인간심리의 이해의 기준을 얻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장면, '왜 사람들이 이해도 못하는 이런 영화를 만드세요'라는 질문에 '이해가 안 가시면 안 가는 거죠. 전 그냥 영화를 만드는 거고 그걸 느끼는 사람이 있으면 좋은 거겠죠.' 답하는 부분. 주민들끼리 '저 사람 유명해?' '티비에서 본 거 같아. 외국에서 무슨 상도 받고 그랬다는데' 대화하는 장면. 사실과 허구가 묘하게 뒤섞여 이야기를 골 때리고 풍부하게 풀어간다.
새 삶 내 짝이 필요해 홍상수만큼이나 캐릭터 찐한 구경남을 축으로 그가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인간군상의 보편적인 모습과 언젠가 한번 그러했을 찌질한 나의 모습, 어딜 가나 꼭 한 명씩 끼어 있는 깨는 사람들을 본다.
구경남이 씨네21 기자에게 ‘전에 그 기사 잘 봤다’고 인사하는데 어느 기사냐고 묻자 어물어물 둘러대는 장면, ‘한라산이 몇 미터죠.’ 올라가지도 않을 거면서 처음 만나는 사람과 어색함을 피하고자 주고받는 생뚱맞고 겉도는 대화들, 여기서 했던 얘기 저기서 또 다시 장황하게 하는 모습들. 남자에게 들이대는 무서운 언니들, 바다에 배 지나갔다고 흔적이 남는 것도 아니겠다 오는 여자 마다 않는 감독이나 교수. 그들을 향한 부러운 속내 감추고 인간의 도리 운운하며 길길이 날뛰는 또 다른 수컷들. “너 네 감독들 개 쓰레기 인간인 거 내가 다 알아” 소리치는 정의파 기사. ‘이 사람을 통해 새 삶을 얻었다’면서 ‘안 만났으면 어쩔 뻔 했느냐’고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다’고 말하는 약간 모자라고 귀여운 커플들....
너네도 그러고 놀잖아
가장 좋았던 장면은 구경남과 고순의 대화였다. 특히 구경남의 ‘내 짝 타령’은 압권이다. 하얀 침대 시트에서 그녀에게 평생토록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사랑의 금자탑을 쌓아가자고, 내가 짐승과 인간 사이를 오가지 않고 내리 인간으로 살 수 있게 해주는 내 짝이 필요하다고 거의 징징거리면서 조르는 장면. 불륜행각이 발각돼 두 사람은 하얀 모래밭으로 쫓겨 대화를 이어간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늙은 남편이랑 사는 옛사랑을 연민하고 잠자리 한 번에 운명적인 사랑의 의미를 부여하고 연애의 대 서사시를 쓰는 남자에게 여자는 조용히 타이른다. 그 사람(나이 많은 화가 남편)이 ‘여러모로 너보다 낫다’고. 맞다. 자기는 밖에서 별짓을 다해도 마누라 불륜을 못 참는 게 남자들인데 화가 남편은 예의 그푸근한 목소리로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별일 없을 거라’고 말하니까, 양심적이다. 거기다가 “섹스도 너 만큼은 하”고. 그럼 왜 나한테 연락했냐고 묻는 구경남에게 고순은 말한다. “심심하니까. 젊으니까. 너네도 그러고 놀잖아.” 홍상수도 남자가 여자보다 속물에 철부지란 걸 알고 있고 있는 게 아닐까 묘한 쾌감이 밀려오는 대목이었다.
예술은 발견 상투는 독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예술가들은 그 욕망과 충동이 크고 남다른 재주가 있으니, 자기만의 삶과 세상의 해석을 작품으로 부지런히 빚어내는 사람들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그것을 너무 날 것 그대로 미학적인 절차 없이 가공한다. 모두가 외면하고 싶어 하는 '삶의 벌집'을 들쑤셔댄 리얼리즘의 극치라서 환호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아무려나, 집요하게 자기만의 우물 파대더니 벌써 아홉 번째 작품이란다. 홍상수는 대단하다. 영화 속 대사에 나오는 말마따나 ‘예술은 발견’이고 예술 하는 사람에게 투는 독’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지지도 흐려지지도 않고 더 능글맞고 날카롭게 자신의 미학적 세계를 드러내는 솜씨와 부지런함에 경의를 표한다. 해마다 조금씩 조금씩 ‘인간이해의 금자탑’을 쌓아주시는 홍상수 오빠 촘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