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길 놔두고 가시덤불 길 가는 사람들이 있다. 농약 한통 쫙 뿌리면 한 소쿠리 가득 사과를 담을 수 있는데 굳이 농약 안 쓰고 고집 부려 수확량의 삼분의 일밖에 못 건지는 농부들. 고액의 족집게 강사자리 놔두고 극구 화폐랑 거리가 먼 인문학 전파하는 학자들. 해직될 거 알면서도 거리에 나서는 교사들. 밥 굶을 줄 알면서도 굳이 독립영화를 찍는 사람들. 만나본 바에 의하면 그런 사람들의 면상은 대체로 밝다. 애환은 있어도 그늘은 없다. 가난이라기보다 '청빈'한 삶을 택했으니 자기만족도가 높은 것이다. 그래서 같이 있으면 즐겁다. 이들이 모여서 ‘파티’를 열면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즐거움의 무한 증폭이다.
인디포럼 채무변제파티-그렇다면 십시일반. 9월 12일 독립영화판 사람들이 일일호프를 열었다. 인디포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가장 가난한 영화제다. 해마다 열리는 영화제인데 올해 인디포럼 주제가 ‘촛불 1주년’이었다니 무덤을 판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7월 영문도 없이 이유도 없이 그간 꾸준하게 받아오던 영진위 단체 사업 지원에서 떨어졌다는 통보를 받았단다. (지난 촛불집회 이후 집회에 참가했던 인권영화제, 국제노동영화제, 스크린쿼터연대 등의 단체들이 대부분 보조금 지원 대상에서 탈락했다니 MB의 뒤끝은 진정 어디인가) 아무튼 영화제 개최에 부족했던 운영비용을 영화인들이 직접 충당하기 위해 파티를 기획한 것이다.
돈 안 되는 영화평론만 쓰는 것도 부족해서 인디포럼 프로그래머 하느라고 고생하는 변성찬 영화평론가. 그는 홍상수와 김기덕의 영화 분석으로 씨네21 영화평론가 상을 받은, 알고 보면 들뢰즈 전문가다. 작년에 수유+너머에서 사부랑 ‘들뢰즈와 시네마’를 읽으며 공부했는데 책 내용은 완벽하게 까먹었지만 책 한권 분량의 우정은 남아서 이런 파티에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상호부조 시스템이 구축됐다. 사부와 해피동지와 함께.
입구에 들어선 순간 매캐한 담배연기가 안개처럼 자욱하다. 요즘 웬만한 곳은 다 금연인데. 이것은 80년대로의 시간여행이 아닌가. 왁자지껄해서 핸드폰 통화가 어려운 소란스러움. 끈끈하고 칙칙한 분위기. 고향에 온 듯 마음마저 편해진다. 파티는 독립영화 작가회의 의장 이송희일 감독이 사회를 봤다. 브로크백마운틴만큼 좋았다는 소문이 자자한 퀴어정통멜로 <후회하지 않아>를 찍은 분이다. 이날 파티에 참가한 배우들을 소개했다. 아무리 독립영화 배우라 해도 배우인지라 면티에 바지 하나만 걸쳐도 후광이 비추는 건 마찬가지. 특히 조은지씨 얼굴이 너무 주먹만해서 놀랐다. 일찍 나오느라 못봤는데 소유진씨도 무대인사를 했다고 한다. 이송희일 감독이 가을에 개봉하는 영화 <탈주>의 주인공이 그녀라고. 남자주인공은 <후회하지 않아>에서 주연을 맡았던 이영훈씨.(아래 사진 맨 오른쪽)
인디포럼 파티를 찾은 인디밴드들. 공연이 시작됐다. ‘반짝반짝 빛나는’ 이라는 팀의 여성보컬이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인데 무대로 나가니 완전히 달랐다. 이상은처럼 큰 키, 김윤아처럼 매력적인 보컬. ‘저런 끼를 누르고 살려면 힘들 거야. 무대에 설 기회가 많으면 좋겠다’ 다음은 ‘아마추어증폭기’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데 스타일도 특이하다. 하얀 바지, 노란 셔츠, 빨간 벨트와 멜빵, 청록색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검은 선글라스를 썼다. 중년 아이돌도 아니고 락커도 아니고 마치 학예회 복장을 연상시키는 묘한 컨셉이었다. 똘끼와 광기가 느껴졌는데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일인밴드 아마추어증폭기 시선집중. 이전 팀이 나올 때는 각자 테이블마다 얘기꽃을 피우고 무대를 외면하던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거둬들였다. 흥겹고 중독성 강한 노래들. 촌스러운 춤동작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는 흥에 겨워 높은 곳에 올라가기도 하고, 호프집을 한 바퀴 돌고 오기도 했다. ‘나는 돈도 안 받고 여길 참가했다.’ 라며 즉흥랩을 구사하기도 했다.자유분방함의 절정. '나는 너를 이해한다~' 어느 순간 그의 노래를 모두 따라하고 있었다. 처음 듣는 노래인데 감정이입이 순식간에 이뤄져 일체가 됐다. 혹시 이것이 '망아의 경지'라는 디오니소스의 축제이런가. 아마추어증폭기. 그는 이름과 실재에 상응하는 강렬한 포스를 증폭시키고 총총히 사라졌다. 잊지못할 뒷태.
다음에 권우유라는 가수가 등장했는데, 가슴팍에 빨간앵무새 모형과 독특한 헤어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광란분위기를 이어가지 못하는 바람에 다소 어수선한 무대가 됐다. 스타일 좋고 노래는 괜찮던데 안타까웠다.
무대에 서면 접시물에 담긴 꽃처럼 활짝 피어나는 사람들. 그들은 무대로 보내야한다. 아니 무대를 만들어서 스스로 올라가야 한다. 음악은 시난고난한 인생의 명약이다. 즐거움과 위로를 주는 고귀한 능력은 인류의 행복증진을 위해 발산되어야 마땅하다. 영화를 보든 만들든 영화와 지지고 볶어야 얼굴이 피는 사람은 영화판에 뼈를 묻어야 한다. 인디는 무엇일까. 주류에 섞이지 못하고 변방을 떠도는 B급 딴따라들인가. 아니다. 자본의 홈 파인 공간으로만 흐르기를 거부한 물방울이다. 매끄러운 평지에 떨어지는 빗물처럼 어디로든 흐르는 자유로운 영혼들. 이미 자유롭기에 자유를 갈망하지 않는 자유인들이다.
왜 손 벌리느냐고 진보는 이래서 안 된다는 의견도 있지만, 요즘처럼 너와 나의 경계선이 분명하고 세련된 예의바름이 각광받는 세태에 고가의 술과 안주 책정하고 손 내밀어 ‘상호부조’와 ‘십시일반’을 내세우는 뻔뻔함을 나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다행히도 문전성시를 이룰만큼 흥행에도 성공했다. 이런 마음씀씀이가 거지도 굶어죽지 않았던 우리네 귀한 공동체 정서가 아닐까. 모두 부자를 갈망할 필요도 없고 굳이 가난을 자처할 이유도 없다. 그냥 각자 꼴리는대로 자력갱생하면서 화이부동하면 좋겠다. 인디포럼도 채무변제 파티 결산하면서 앞으로 자생력 확립에 대해 머리 맞대고 고민했을 것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디포럼'이 몸소 보여주리라 믿는다. 뭐, 아니면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