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이란 무엇일까요. 읽고 나서 눈동자가 깊어지는 책이 좋은 책이라는 누군가의 글을 본적이 있고, 그 정의에 동의합니다.
좋은 책을 통해 좋은 앎을 이루었다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제 공부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공부를 할수록 자신의 가치척도만 날카롭게 다듬어져 예민하고 오만해진다면, 그래서 이사람 저사람 자신의 잣대로 찌르고 가치평가 해대는 도구로 쓴다면 그것은 좋은 앎이 아니라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공부가 사람을 억압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 부당한 것에 분노하고 저항할 줄 안다는 것 등등 모든 삶의 경구를 지켜나가자면 엄청난 지혜와 섬세한 기예가 요구됩니다.
그러나 다급한 마음과는 달리 치열함과 이해력이 부족하여 책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기 일쑤지만 그런 스스로가 답답하고 처지가 한탄스럽기도 하지만, 매양 그럴 것 같습니다. 배움에 완전한 만족은 없을 것 같습니다.
마치 10억을 모으면 더 행복해질 거야라는 말이 허무하듯 철학책 10권을 완독하면 과연 더 현명해질까 묻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상에 갇히지 않기 위해 책을 봅니다. 보는 것을 믿지 않고, 믿는 것을 보게 된다는 말처럼 책읽기에서도 내가 아는 것만 지속적으로 확인해간다면 그것은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경게하기 위해.. 벗을 곁에 두고 책을 봅니다. 우주적인 진리의 힘을 키우고자 마음다해 책장을 넘깁니다.
# 좋은 글..
사람을 기죽이지 않는 글. 전문용어를 몰라도 그것이 부끄럽지 않게 생각되는 글이라야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소통이 목적인가 과시가 목적인가. 이윤기 선생님이 글쓰기 전에 꼭 묻곤 쓰신다고 합니다.
현란한 지식의 세계를 유감없이 드러내지만 사고의 흐름을 정지시키는 글이 있고 인식의 기회로를 틔워주는 글이 있습니다.
읽는 이를 흔들어 놓고 덫을 놓는 글이라야 그런 글이 좋은 글일 것입니다.
글의 깊이는 인간의 깊이가 '아니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글쓰는 능력은 인간지성의 작은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최고의 문장이 최고의 지성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서툰 문장이 덜 익은 지성을 증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글쓰기는 지성의 영역인 만큼 기술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모국어의 속살, 고종석도 그런 얘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글쓰기도 점점 '권력'이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고민합니다.
생각을 밖으로 꺼내는 것이 능숙하지 않은 자들의 절규. 표현하고 싶음과 표현할 수 없음의 간극을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방황은 대개 빈정거림과 비난 등으로 비춰집니다. 마구 쓴 (것처럼 보이는)글, 악플 등으로 드러납니다.
표현이 거칠고 논리가 허술하다 하여 사람까지 그렇진 않겠으나 실상은 대부분의 경우 ‘글=인격’으로 판단되곤 합니다. 문화적으로 가진 자, 힘 있는 자, 대접받는 자는 그들을 손쉽게 무시하고 폄하합니다. 이는 사이버 토론장에서 자주 확인됩니다.
약한 자들, 표현이 서툰 자들이 오해받고 불리해지는 상황, 문화적으로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이 불평등 구도를 어떻게 타파할 것인가 역시 제 관심과제입니다.
# 좋은 삶..
삶이 무엇인가. 삶은 외부가 없다는 이수영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차라투스타라에 적고 별표까지 두개 쳤었습니다.
적어도 제게 삶은 외부가 없습니다. 있었으면 힘들 때마다 그곳으로 도망쳤겠지요. 제겐 갈 곳 없음, 벗어날 수 없음, 그래서 살아야하는 게 삶입니다.
순응과 긍정은 어떻게 다릅니까.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순응은 어떻게 다릅니까.
열일곱 살짜리 외아들을 사고로 잃은 어느 여성이 딸부잣집에서 딸이라는 이유로 버려진 아이를 입양했습니다. 알고 보니 장애아였습니다. 그 여성은 지질이도 가난하지만 핏덩이를 다시 버릴 수 없어 파양을 주장하는 남편과 별거해가며 지킵니다. 키워냅니다.
이 여성의 선택은 순응입니까, 긍정입니까. 순응처럼 보이는 긍정입니까.
누가 그것을 판단합니까.
삶의 엄정함 앞에 때로 개념은 무기력해집니다.
아무리 정교하게 사유해서 개념화해도 그것은 주체의 상태와 조건에 따라 어떤 관계와 배치 속에 놓이느냐에 따라 답은 달라집니다. 제겐 그게 삶입니다.
정답 없음의 정답을 가르쳐주는 철학. 저는 니체를 이렇게 읽었습니다. 가치의 가치를 묻고, 진리에의 의지를 타파한 것이 제겐 숨통을 틔워주었습니다. 더 많은 존재를 인정하도록 너른 눈을 주었고,
우연을 생성의 기회로 삼아도 좋다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천개의 눈, 천개의 길이 있기에 천개의 니체해석이 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자기합리화의 주장이라면, 그렇습니다. 자기를 합리화하지 않으며 살지 않는 자가 있기나 하던가요.
개념을 날카롭게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영원히 쓰지 않기 위해 읽는 자가 되고 싶지 않듯이 판단하지 않기 위해 사유하는 자가 되는 건 아닌지, 두렵기도 합니다.
삶,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입니다. 그냥 삶입니다. 마치 돈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그 가치가 결정되듯 삶도 그런 거 아닌가 싶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좋은 삶인가 나쁜 삶인가 물을 수 있음의 상태가 좋은 삶이겠지요. 눈 오는 날이 누구에겐 좋은 날씨고 누구에겐 나쁜 날씨 듯이 어릴 땐 좋았지만, 거동이 불편하거나 늙으면 싫어질 수 있듯이 제겐 삶도 자연처럼 매순간 달리 느껴집니다.
삶, 사람의 다른 말.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말. 삶은 은유다. 삶의 모토처럼 제 명함에 한줄 적어 놓은 글귀입니다. 누구나의 삶이 존중받는 세상을 위해 저 혼자서 주문을 거는 말입니다.
사람을 극복되어야할 그 무엇으로 대상화 하는 한, 그곳엔 인간소외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이 인간다운 삶을 꿈꾸는 이들의 성실함을 배반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