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환>을 본 사람들은 거의 그랬을 것이다. 감동이 넘쳐 감독님을 존경하게 됐다. 감동의 크기만큼 감독이 궁금했다. <송환>은 곧 김동원의 자서전이었다. 그리곤 잊었다. 잊고 지냈다. 내가 송환을 감명 깊게 봤다는 사실조차. 한 달 전, 변성찬 선생님이 인디포럼에서 <끝나지 않은 전쟁>을 봤다면서 감독님 얘기를 꺼내셨다. “어, 선생님 저 그 영화 보고 싶어요. 구해주세요.” 다시 감독님을 떠올렸다. 마치 옛사랑처럼 그의 이름 석 자에 마음이 아련해졌다.
그렇게 안부를 궁금해 하고 있다가 오마이뉴스에서 취재의뢰를 받았다. 나는 ‘운명’이라고 정의 내렸다. 확대해석을 해버렸다. 너무 좋았다. 마구 설렜다. 염려도 앞섰다. 4년 전에 쓴 <송환> 감상 후기를 읽어보았다. 절절하더라. 4년 전의 내가 대견했다.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영혼을 여는 대화가 가능할까.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질문지를 써놓고 나자 네 페이지가 넘었다. 줄이고 줄여서 그 정도였다.
인터뷰 할 때도 감독님은 실망시키지 않았다. 감독님 다큐의 주인공들처럼 진솔하게 이야기 하셨다. 중간에 어느 대목에선 목이 메어 딴 데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 기사를 썼다. 원고를 삼십 매 분량으로 줄이려고 노력했다. 아쉬웠다. 기사도 불만스러웠다. 이유는 두 가지. 전체적인 완결성이 떨어졌다.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의욕만 앞서고 어느 것 하나 특화되지도 못한 거 같고 헐겁다.
또 하나는 내가 너무 깊이 개입했다. 사랑한 티가 난다. 어떤 결론을 미리 갖고 확인하려 들었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그게 아쉽다. 꼭 그런 건 아니었는데. 암튼 안에도 있지 말고 밖에도 있지 말고 중간에도 있지 말아야하는 인터뷰의 룰을 어겼다. 그래도 제법 소중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고 생각한다. 아끼는 공책 가져가서 볼펜으로 받아 적어왔는데 열 페이지다. 녹취를 안 해서 부정확한 기록이 될 수도 있겠다. 기억의 재구성이라 해도 좋다. 하지만 그 때 그 당시 내 영혼의 울림의 진솔한 기록이다. 인터뷰 풀 버전을 올려본다.
#1 독립영화, 무구한 충동
이장호, 정지영, 장선우 등 유명감독들의 조감독시절로 영화를 시작하셨어요. 어깨 너머로 무엇을 보았나요.
= 영화를 시작했을 때 당연히 극영화였죠. 다큐가 있다는 것도 몰랐어요. 조감독 생활 현장에서 배운다는 것은 첫째 제작과정을 배우고, 둘째 감독들의 내공, 카리스마나 개성을 배우는 거겠죠. 81년 처음 충무로 갔을 때 27세였고 나이가 많은 편이었어요. 대학원 다니면서 영화판에 가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마침 일자리가 있었어요.. 진로를 놓고 갈팡질팡... 감독 될 수 있을까. 재능이 있나. 집에서는 유학을 가라고 하고.. 영화 책 보면서 공부했는데 우리나라 영화는 비평거리가 없더라고요. 외국영화만 보고 읊조리는 게 불편했어요. 당시 한국영화를 보면서 저 정도면 나도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어요.(웃음)
잘 간 거 같아요. 이장호 감독과 <바보선언>은 좋은 경험이었어요. 한국영화가 꽉 막힌 상황이었지요. 시나리오 사전 검열 제도가 있었어요. 검열에 걸려서 제작기한이 몇 달밖에 안 남았는데 시나리오가 없는 상태에서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 때 즉흥성을 배웠지요. 즉흥성이 다큐의 요소인데, 바보선언에 다큐적 요소가 있었어요. 588창녀촌에서 이보희 씨가 호객 행위하는 걸 뒤에서 찍는 식으로 촬영했는데 재밌더라고요. 청량리 광장의 정서도... 이때부터 다큐에 관심 갖고 센스를 개발했다고 할까요. 80년대 시대상황이 극영화 억지로 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찌보면 다큐기법이 개발됐지요. 검열 심한 나라일수록 다큐 영화가 나와요.
영화판 자체가 힘들지만 인생역전의 기회조차 없는 ‘독립영화’판에 뛰어들다니 용감하세요.
= 극영화 했어 봐요. 내가 지금 영화를 할 수 있나..(웃음) 화려한 거 끌려서 시작했지만 우연히 상계동에 가게 됐고 다큐 하면서 독립영화를 하게 됐죠. 상계동 하면서 인생관이 변했어요. 독립다큐는 할 만 하고나.. 극영화 시나리오도 써보았지만 제작사 타진하고 그런 게 만만치 않더라고요. 소극적인 성격으로 뚫지 못하겠더라고요.
예상된 고행길이라고 해서 고생이 덜하진 않을듯해요. 생계 등 ‘실존’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나요.
= 내가 원래 현실감각이 없어요. 몇 년 후 계산을 못 해요. 또 한편 반찬이 없어도 굶었다 먹으면 맛있어요. 3일 이상 굶지 못했지만 굶어죽지 않으면 밥은 언제나 맛있어요. 호텔 뷔페나 된장찌개나 행복은 똑같다고 생각해요. 내가 너무 낙천적이라 그런지...
‘하고 싶다’에서 ‘해야 겠다’로 가게 된 과정이 궁금해요. 감독님 영화의 힘은 우연성, 즉 ‘계획되지 않은 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어떻게 3년-5년 있었을까. 상계동에서. 우연이라고 하지만 뭐가 있었을까 스스로 캐물어 봐요. 상계동에서 처음 1년은 다큐를 의식하지 않았아요. 그 때 하도 사람들이 많이 와서 정일우 신부님이 주민들에게 설명하니까 번거로워 보여서 찍어서 보여주면 좋겠다 그런 용도로 시작했지요.
그 안에서 나름 할 일을 찾았어요. 누군가 거기 같이 있어주는 게 필요했지요. 애들이 많았는데 철거촌이라 돌, 못 등 위험한 물건이 많고 살벌했어요. 공부방 애기방 차려서 애들을 돌봤어요. 나중에 세월이 지나 축적이 되고 부천의 철거위험을 알릴 생각에서 만들었지요. 그걸 보고 남들이 다큐라고 하니까... 다큐 하라고 3년 있으라고 하면 못 있죠.
마음이 약한가 봐요. 웬만한 사람이면 슬쩍 가버릴 수도 있을 텐데..
= 거기 있는 게 싫지 않았어요. 끈끈함.. 아주머니 아저씨들이랑 술 먹고 노는 분위기가 나한테 굉장히 따뜻했어요. 끌림이지 정의감 그런 거 아니에요.
#2 송환, 경계에선 관찰자의 사유
<송환>시작할 때 ‘반공주의자였던 아버지에게 바친다’는 자막이 올라가잖아요. 문득 그 분, 사람의 아들..월북한 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해 가엾은 말년을 사는 이문열이 스쳤어요. 감독님은 어떠세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나요.
= 아버지가평안도 강계 출신이에요. 강계군민회 행사에 쫓아다니고 그랬죠. 그런 분위기에 익숙한데 특별히 반공교육을 받은 기억은 없어요. 아버지가 성격이 강한 편이 아니세요. 그냥 그 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런 말씀 자주하시고.. 지주계급에 쫓겨나서 고생하다가 월남하셨거든요. 그런 얘기를 들고 커서..내가 이남에서 태어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믿고 자란 세대에요. 박정희 정권 때 인혁당 사건이 있었는데..대학교 1학년이었어요. 뭔가 이상하다..생각했고 유신 데모 많았고..젊은 혈기에 답답하고 권력에게 뭔가 구린 게 느껴지고, 저항심이 일고...의심하는 버릇이 생겼죠.
아버지는 2002년 6월에 입원해서 10월에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와 제 관계가 많이 틀어졌죠. 대학생 때부터.. 상계동에 있을 때 잡으러 오기도 하고..선거 때마다 조그만 얘기로 시작해서 싸우고... 아버지가 입원했을 때 화해하고 싶었는데 그게 병상에서도 잘 안되더라고요. 돌아가시기 전에 약간 정신이 맑지 않으셨는데 김일성 얘기도 하시고, 너 나 죽이려고 왔지 이런 말씀도 하시고..편치 않았죠.... 아버지가 강계 소식 궁금해 하셔서 장기수 김석형 씨와 한번 만나게 해드렸어요. 집으로 모시고 와서 말씀 나누었는데 대화가 잘 되진 않더라고요. 한 30분 얘기하다 가셨어요. 글쎄요. 영화는 아버지가 보셨다면 약간 걱정할 정도..좋아하셨을 거 같기도 하고. (영화가) 친북적 입장을 보인 건 아니었잖아요.
<송환>은 친밀함과 엄정함이 공존해요. 감독님이 너무 빠져들어도 문제지만 안 빠져도 곤란한데 원칙이나 방법이 있으세요. 기다림의 미학과 대상화 하지 않기가 전 너무 좋았어요.
= 상계동에서 주민들 만났을 때 점점 시간 지나면서 푹 빠졌어요. 주민 한 사람으로서 일인칭을 쓰기도 하고. 하지만 여전히 될 수 없는 거리가 있어요. 하나가 된다. 중요한 얘기지만 다른 점이 있죠. 처음엔 인정하기 싫었어요. 내가 무슨 권리로 여기 와 있는가. 이분들을 돕는다는 건 뭔가. 끝까지 같이할 수 있는가. 고민하고.. 평생간다고 결심하니까 조금 맘이 편해졌어요. 하나가 될 수 없는 한계가 불편하지만 긍정해야 해요. 그 위치에서 관찰하고 다가가고 물러서고. 거리두기. 조절하기. 차갑게 관찰하고 뜨겁게 참여하기. 스스로 조절해 갔어요.
다큐멘터리 영화는 자칫 계몽주의나 신세한탄 등으로 갈 우려가 있어요. 어설픈 연민의 정서, 진부한 이념의 논리 등 통속성에 빠질 위험이 있는데 <송환>에서는 어떤 새로운 정서를 이끌어내셨다고 봐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고요. 감독님이 본 것,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던 건 무엇인가요.
= 제가 만났던 장기수분들은 우리 기준으로 불행한 사람, 지독한 사람입니다. 그래야되는데 편안해 보인다는 거죠. (당당해 보였나? 묻자) 당당함보다는 맑아 보이는 거죠. 보통 일흔 살 이상 할아버지들이 찌들리고 의욕 잃은 모습인데, 보아왔던 할아버지들에 비해 훨씬 맑은 표정이 읽혀졌어요. 반했죠. 나도 나이 먹어서 저런 얼굴, 저런 눈빛을 할 수 있을까. (할아버지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북한을 신봉하기 때문인가? 신념의 힘인가?... “아닌 건 아니다”라고 얘기할 때, 최소한 틀린 것 불의나 고문에 대해서 타협하지 않은 사람들이에요. 유혹일수도 있겠고.. 아닌 건 아니다. 최소한 그것만 있어도 늙은 이가 됐을 때 떳떳할 수 있다. 비인간적인 것에 저항한 사람들이거든요.
편집 도중까지도 이분들을 어떻게 포괄적으로 얘기할 수 있을지 그 안에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고민했는데... 생각이 있어서 정리했다기보다 하다보면 정리가 돼요. 혼란. 헝클어짐. 그 기회에 정리했죠.
미국에서 송환을 상영할 때 "당신은 남한에서 왔습니까? 북한에서 왔습니까?" 물어봤다는 얘길 들었어요. 그런 점, 뭐 특별히 중립성 그런 느낌도 없고 그냥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너무 좋았어요. 노인들이 영화에 그렇게 자주 나오는 경우는 없으니깐, 전 개인적으로 ‘주름에 관한 영상’이라고 생각했어요. 패인 주름 사이 눈물까지 흐르고.. 오래 클로즈업으로 어르신들 눈물 보는 것도 귀한 경험이잖아요. 억센 촌로에게 여린 감정의 결을 보았다...그거. 영화 끝나고 못 일어나겠더라고요. 앉아 있는데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들어오셔서 일하시는 거예요. 평소 같으면 의식하지 못했을 텐데 그 아줌마가 보였어요. 사람이 그 자체로 보였어요. 인정, 존중, 사랑 이런 거 아니고 그냥 내 앞에 사람이 있구나, 이걸 느낄 수 있게 한 영화여서 좋았어요. 그 당시 대박 난 <태극기 휘날리며>와 <송환> 필름을 바꿔치기 하고 싶었던 기억이 나요.
(장황한 나의 애정고백에.. 감독님은 고맙다며 잔잔한 미소를 지으셨다.)
다큐멘터리 하려면 생면부지의 이들에게 속마음을 말하도록 해야 하잖아요. 노하우가 있으세요.
= 전 그런 것 때문에 어려움 못 느껴요. 상계동 때도 주민들이 절 너무 좋아해줬고.. 절 소개해 준 분이 이미 신뢰를 얻고 계신 상황이라 그랬지요. 송환도 처음에 경계하는 면이 있었지만 도움 준 신부님과 친구였고 우리 동네 이웃이 된거니까 의심 안 한 거 같아요. 지금이라도 파업 현장을 간다거나 하면 최소한 배신 목적이 아니라면 말을 어렵지 않게 붙일 수 있을 거 같아요. 신뢰관계까지 가는데는 시간 걸리겠지만 저에 대해 자신 있으면 전달 된 거죠. 촛불도 sbs와 kbs 카메라 다르게 대하듯이 배경이 중요하죠.
다큐 하는 후배들에게도 그래요. 네 삶의 뿌리가 어디냐, 어디다 박을 거냐. 니가 뿌리만 잘 박으면 잘 해결 된다. 겁날게 없죠.
한 개인의 상처를 타인이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 기본적으로 절대 이해하지 못하겠죠. 몇 년 같이 살았다고 해서 가난이 이해되는 건 아니죠. 하지만 내가 목격한 가난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그 다음엔 자기와의 약속에 의해 지속돼요. 저지경이 되더라도 받아들이겠다. 닭장투어도 그런 거죠. 더 이상 겁날 게 없다. 그게 뭔지 모르지만 후회되더라도 감수하면 못할 게 없죠.
고통 불안 두려움.. 이런 게 겪기 전까지는 큰 거 같은데 겪고 나면 별거 아니다. 겪을 만하다. 그런 체험 많이 했어요. 내가 이해 못해도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용하려는 사람 아니면. 완전 이해해야 다가가는 건 아니니까.
<송환>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어떤 거였나요.
= 밑바탕에 깔린 어려움, 간첩 만난다는 두려움 그런 건 없었고 특정한 순간 약간 서운함 그런 건 있었죠. 가장 힘든 순간은 마지막 날 버스 타시는 날...촬영해야 되는데 촬영할 때가 아니잖아요. 이별할 때잖아요. 카메라 들고 이별해야 한다는 게. 카메라 던져 버리고 싶었죠. 그 때 참 힘들었어요. 그럴 걸 대비해서 조연출이랑 두 대 갔지만 마지막에 조선생님 앰블런스에 누워 있고 그 순간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념이 이성의 한 부분이고 이성도 인간을 이루는 한 부분이라는 내레이션이 기억에 남았어요. 그러고 보니 이념이 세상을 바꾼 일은 없죠.. 있나요? (없죠) 이념에 대한 감독님 생각이 송환을 찍으면서 달라진 건가요.
= 이념이 회의적인 게 있어요. 87년 전두환 정권 무너지면 세상이 변할 거라 생각했지만 안 그렇듯이... 모든 혁명이나 정체세력이 글쎄요 부분적인 변화는 모르겠지만 끊임없이 해 나가야 하니까 목표가 있는 게 아니므로.. 이념 중요하죠. 사회의 목표지점으로. 하지만 아무리 좋은 목표라도 강요된 거면 저항하고 독재가 생기고 부패 되고 그런 거 같아요.
할아버지들의 삶을 견인한 건 무엇이었을까요.
그분들 살던 배경이 거의 일제시대죠. 그 땐 누구나 민족주의자였어요. 사회주의 이념에 대해 공부할 기회조차 없는 무지렁이 같은 분들이 많아요. 오히려 감옥에서 공부를 하셨죠. 이념적 바탕이 삶의 경험에서 나온 거예요. 일본 순사의 횡포.. 미국 놈이 일본 감싸서 열받는다..그런. 물론 맑시즘 공부한 인텔리도 있어요. 공통점은 민족주의적 경향이 있고 최근에 공부한 분은 맑스즘부터 주체사상까지 다양하게 섭렵하신 분도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