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설일 2008년 4월 22일. 2년 전 이 맘 때 블로그를 만들었다. 산파는 여럿이다. 맨 처음은 친구가 ‘네가 쓴 좋은 글을 세상과 공유하라’고 추동했다. 헌데 그즈음 나는 너무도 바빠서 블로그질 할 시간이 도저히 없었다. 나의 사정을 잘 아는 민언련 후배가 기꺼이 나서주었다. 티스토리에 방을 구하고 내가 보내준 원고를 일주일 간 틈틈이 올리고 편집해주었다. 기초공사가 끝나고 세간이 들어간 집에 내가 본격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때가 5월초다. 청각장애인 영화감독 박재현 씨와 노트북으로 인터뷰를 하는 사진과 이러한 슬로건을 내 걸었다.
내 생각과 의견을 세상에 제출한다는 것은 운동이다. 내 글이 자본의 신과 싸우는 일에, 사람들의 위엄과 존경을 되찾는 일에 개입하는 한 운동이길 바란다. (아룬다티로이)
이 블로그는 각별하다. 가난한 화가의 스케치북처럼 절대적인 꿈의 공간이었다. 가슴에 말들이 넘칠 때 24시간 환한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다. 언제라도 기대어 울 수 있는 등짝이었다. 마음가짐은 그랬다. 살아가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글을 쓰자. 나의 글쓰기가 자기동일성을 심리적으로 강화하면서 밖으로 멀어지고 안으로 굳어가서는 안 될 일이다. 나를 열어두자. 아울러 징징대면서 감정의 토사물을 쏟아내는 자의식 과잉의 글은 자중하려고 애썼다.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었다. 그것을 보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올드걸의시집>이 탄생했다. 사람으로 인한 속상함, 가사노동의 고단함, 사는 일의 허무함이 밀려올 때 날감정을 꺼내놓으며 시인의 시를 곁들였다. ‘좋은 시 한편’을 선물하면 나의 푸념이 덜 미안하고 덜 구차하지 않을까 싶었다.
나의 명함에는 블로그 주소가 없다. 마음 통하는 이들에게 개별적으로 알려주고 누가 물어오면 적어주었다. 소극적 공개다. 오마이뉴스와 다음뷰 뉴스는 발행하다가 중단했다. 김송지영도 접었다. 갑갑했다. 번화가의 소란을 피했다. 오롯한 나의 호흡으로 깊게 몰입하고 싶었다. 그래서 눈길에서 우연히 스친 인연이 더 각별했다. 핫한 뉴스나 실시간 검색어에 걸리지 않는 이 변방의 섬에 다다른 이들이기에 미더웠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온기만 느껴지는 그들과 함께 조명 어둑한 소극장 공연처럼, 오붓하니 좋았다. 수차례 우연한 마주침을 경험하면서,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난다는 믿음이 생겼다. 때마침 블로그 2주년에 맞춰 <행복한인터뷰> 100번째 글이 올랐다. (예전에 한 인터뷰인데 빠진 것) 100명의 이야기는 아니다. 두 번씩 오른 사람이 세 명이다. 그들은 매번 다른 존재였기에 그대로 두었다.
블로그 2주년 기념으로 조촐한 시상식을 열기로 했다. 자기가 쓴 글은 자기가 가장 잘 안다. 좋은 글을 평가하는 심사위원장은 바로 나. 누구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나에게 인정받고 싶다. 나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글은 남도 감동시키지 못한다고 믿고 있다. 역시나,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글은 자꾸 외부에서 확인받고 싶었다. 좋은 글은 쓰는 순간 이미 보상이 다 주어진다. 그 가슴충만함은 또 다른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다. 내가 행복하면 남도 행복했다. 공감과 칭찬의 말을 들으면 날개가 솟았다. 누군가의 한마디에 기운을 얻어 밤을 새우기도 한다. 나를 노트북 앞에 앉혀준 은인들에게 감사한다.
지금까지 인터뷰한 사람들 중에 누가 제일 좋았어?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줏대 없이 오락가락 했는데 당분간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좋은 삶의 실체를 느끼게 해준 성태숙선생님에게 '행복한인터뷰상'을 드린다. 좋은 인터뷰이가 반드시 좋은 글로 빚어지지는 않는다. 나의 언어의 무능이다. 다만 어떤 사람이나 사안에 크게 감응할 경우 더 잘 쓰려고 노력은 하게 된다. 그 느낌이 자주 오지는 않는다. 그래서 못자고 못먹는 줄도 모르고 말들과 씨름한 글에 애착이 간다. 삶에서 숙성되었다가 어느 날 발효된 글들 또한 소중하다.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을 안고 살았고 살고 있으며 살아갈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