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칼럼'에 해당되는 글 119건

  1. [2019.08.27] '그거'에 대해 말하지 못할 때
  2. [2019.08.15] '응'이라고 말하고 싶어 (1)
  3. [2019.07.29] 졸음과 눈물 (1)
  4. [2019.07.01] 잠재적 가해자라는 억울함에 관한 문의 (5)
  5. [2019.06.04] 이거 대화 아닌데요?
  6. [2019.05.06] 페인트 눈물
  7. [2019.04.08] 죽은 자는 정말 사라지는가 (2)
  8. [2019.03.11] 사람을 물리치지 않는 사람들 (2)
  9. [2019.03.04] 다가오는 말들 (6)
  10. [2019.02.11] 로마에서 엄마를 보다

'그거'에 대해 말하지 못할 때

[은유칼럼]

김순자는 1979년에 삼척고정간첩단 사건에 휘말려 원가족 12명과 함께 잡혀갔다. 남편은 딴살림을 차렸고 열 살, 일곱 살, 네 살 삼남매만 남겨졌다. 외가 쪽 친척은 다 구속됐고 친가에선 외면했다. 엄마의 복역기간 5년간 아이들은 이집 저집 떠돌며 컸다. 학교에선 ‘여간첩의 아이들’로 놀림과 따돌림을 당했다. 큰딸은 학교 갈 차비도 없는데 설상가상 생리를 시작했다. 한번은 하굣길에 생리가 터져서 아무 부잣집에 들어가 청소해드릴 테니 돈 좀 달라고 해 생리대를 샀다고 한다.

3년 전 국가폭력 피해자 인터뷰에서 들은 얘기다. 고문보다 오래가는 상처로 김순자는 큰딸의 생리대 일화를 언급했다. 나 역시 인상깊었다. 큰딸이 나랑 동갑이었다. 간첩사건은 <수사반장> 같은 드라마에나 나오는 딴 세상 일로 알았는데 내 또래가 이토록 구체적인 피해를 입고 있었다니…. ‘분단국가의 상처’가 일상의 맥락에선 생계부양자의 급작스러운 부재이고 그 자식이 생리대를 구걸하는 상태로의 몰락인 것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더니 가난도 디테일에 있었다. 그즈음 신발 깔창 생리대 사건이 보도됐다. 사연도 놀라웠지만 40년 시차가 무색하게 빈곤 여성청소년의 처지가 그대로라는 게 나로선 더 충격이었다. 그제야 의문이 들었다. 밥 굶고 추위에 떠는 가난은 공론화되는데 생리대 못 사는 사안은 왜 이제껏 잠잠했을까.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 된다(에이드리엔 리치)고 했나. 그럴 만도 했다. 생리하는 날은 ‘그날’이고, 생리대는 ‘그거’고, 광고의 생리혈은 파란색이고, 생리대는 까만 비닐봉지에 칭칭 묶어 운반하는 현실. 인구의 절반이 경험하는 월경은 강력한 금기어였고 철저히 비가시화됐으므로 문제점도 은폐된 거다. 그나마 신발 깔창에 덧대어 ‘생리대’란 단어가 공공연히 거론되면서 해결책도 모색하기 시작했다.

빈곤 청소년 생리대 무상지급과 관련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설전이 오갔을 때, 그럼 남자도 수염이 나니까 면도기를 공짜로 달라는 의견이 ‘예상대로’ 나왔다. 누군가 응수했다. 남자도 길 가다가 수염이 갑자기 막 솟아나고 바지를 뚫고 나와 생활에 지장이 생기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그렇다. 월경은 제 몸에서 다달이 일어나는 일이지만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하기에 고통이다. 생리대가 없으면 앉지도 서지도 먹지도 자지도 못하기에 기본권이고 생존권이다.

동료 시민의 처지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우린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상황에서 얼마 전 생리대 무상지원에 관한 국민여론 설문조사가 이뤄졌다. 빈곤 여성청소년만이 아니라 모든 여성청소년으로 대상을 확장하는 사안이었는데, 예산을 이유로 반대한다는 의견이 절반을 넘었다. 정작 여성청소년은 설문 대상에 없었다. 그건 마치 이성애자끼리 ‘동성애에 찬성합니까?’ 묻는 것처럼 질문 자체가 인권을 거스른다. 사람의 사랑이 그러하듯 사람의 안위도 찬반을 묻는 게 아니라 존중을 구할 사안이다.

세상 쓸데없는 게 연예인 걱정이라지만 나는 여성아이돌을 걱정한다. 저 딱 붙는 짧은 옷을 입고 생리 양이 많은 둘째 날엔 어찌 춤을 출까. 얼마 전 여성아이돌의 한 멤버가 공황장애를 이유로 활동을 중단했다. 다른 질병처럼 ‘생리통이 심해서’ 같은 사정도 거리낌 없이 얘기되면 좋겠다. 그럴 때 “1970년대엔 생리대 살 돈이 없어서 남의 집에 가서 일했대” “2010년대엔 신발 깔창을 썼대” 하는 말들이 흑역사로 남고 자판기에서 무상으로 생리대를 뽑아 쓰는 날이 올 거다. 어떤 부모를 만났느냐에 상관없이, 즉 가난을 증명하는 절차 없이 급식도 생리대도 지급되어야 아이들이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성장할 수 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06919.html?_fr=mt5&fbclid=IwAR2H-_ZoAkbkRydmZvZppYbGXuw8d4yXkC7PiecP9nbjQI-I1RKfcfY5dHU#csidx54a7452589d4e409c4f90daa5109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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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이라고 말하고 싶어

[은유칼럼]

“무지에게 ‘응’이라고 말해주고 싶어. 무지는 다 옳으니까.” 
교복을 입은 수레가 식탁에 앉아 계란후라이를 젓가락으로 들어 올리며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나는 보리차를 따르다 말고 멈칫했다. 시인이 앉아있나? 고개를 돌려보니 딸아이가 맞고, 시계를 보니 오전 7시다. 이불에서 십분 전에 빠져나온 아이의 말이 시적이다. 무조건 무지가 옳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응’이라는 방석을 먼저 내어 주는 말. 지극한 존중이 묻어난다. ‘응’이라는 말이 이렇게 순정하고 온전했던가 싶다. 내가 고백을 들은 양 울컥한다.
 
며칠 후 나는 아껴둔 질문을 아이에게 꺼내 놓았다. 
“수레야, 왜 무지에게 응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어?” 
“무지가 좋으니까.” 
“근데 무지는 왜 다 옳아?” 
“무지는 거짓말을 못 하잖아.” 

수레의 무지에 대한 애정 세례는 새삼스럽지 않다. 아는 핸드폰 대리점에서 돌보던 길냥이가 낳은 새끼들 4남매 중 혼자만 입양이 되지 않고 남아있던 아기고양이를 손수 데려온 4년 전부터 시작됐다. 흰색, 갈색, 검은색이 조화롭게 자리잡은 ‘삼색이’ 무지를 보며 연신 감탄한다. “무지는 무늬가 너무 예뻐!” 무지도 수레 곁을 충신처럼 지킨다. 수레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슬며시 아이의 방으로 거처를 옮긴다. 수레가 공중에서 휘젓는 낚싯대를 따라 신나게 한판 놀다가, 숙제를 하는 수레 옆에서 잠이 들곤 한다. “무지는 나의 베스트프렌드”라고 으쓱하며 말하던 수레는, 열네 살 땐 커서 무지랑 결혼할 거라는 선언으로 날 놀래켰다. 그런 세속적 말들과 달리 이번에는 다른, 보다 너른 차원의 사랑으로 나아갔다. 졸음의 바닥에서 주워 올린 말. 선적이고 시적인 말. 그러고 보니 시도 있다. 문정희 시인의「응」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그때 너 시인 같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 했지만 도로 삼켰다. 시인 같다는 건 시인이 아니라는 전제를 둔 말이니까. 시인과 시인 같은 사람의 경계를 아이에게 주입하고 싶지 않다. 인간과 고양이의 구분을 두지 않고 ‘결혼’하겠다는 아이니까. 시인이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를 쓴 사람이 시인이다. 살면서 우리는 죄인지도 모르고 죄를 짓듯 시인지도 모르고 시도 짓는다. 잠결의 아이처럼. 

수레는 고2가 되니까 문학을 배워서 좋다고 지나가듯 말했다. 어느 밤엔 내 옆에서 자려고 눕더니 묻는다. 
“엄마,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시 알아?”
“응. 알지. 우리 집에 시집도 있을 걸.” 
“근데 왜?” 
“문학시간에 배웠는데 그 시가 좋아…… ‘귤값을 깎으며 기뻐하던 너를 위해/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수레는 제법 결연한 어투로 시구를 두 행 읊더니만 이내 잠이 들었는지 잠잠하다.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는 그 나이를 두 번 산다. 열일곱 무렵부터 나도 시가 괜히 좋았다. 시집 표지가 나달나달해지도록 읽고 노트에 정성스레 베껴 쓰곤 했다. 슬픔, 기쁨, 사랑, 그리움 같은 단어가 만든 감정의 둘레에서, 나는 마치 꽃그늘 아래 앉은 것처럼 더없이 안전하다 느꼈다. 아이는 왜 그 시의 그 부분이 좋았을까. 
수레는 거의 책을 읽지 않는다. 집 곳곳에 책이 있지만 나는 굳이 아이에게 권하지 않는다. 나도 한 때는 책 읽으면 똑똑해진다는 신앙에 얽매이는 엄마였지만, 똑똑한 게 사는 데 좋은지 나쁜지 어느 순간부터 헷갈린다. 그리고 책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교감하며 느낄 것은 느끼고 배울 것은 배운다는 걸 이젠 안다. 나이가 들고 오가는 타인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아이의 성장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자연스레 터득했다. 수레에겐 고양이 무지가 책이다. 있는 그대로 존재를 대하는 법을 일러주는 지침서이자, 도도한 상대와 관계 맺는 법을 알려주는 탁월한 심리에세이, 한 번도 같은 장면이 나오지 않는 마술 같은 그림책. 매번 설렘으로 첫 장을 여는 책.

 

#무크지'언유주얼' #10매소설 #무지와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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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음과 눈물

[은유칼럼]

한 중학교에 오전 강연을 갔다가 급식을 먹었다. 점심시간이 12시 반이다. 아이들이 얼마나 배고플까 싶었다. 돌아서면 허기가 올라와 2, 3교시 마치고 도시락을 까먹고도 점심시간엔 매점을 배회하던 그 시절의 내가 생각났다. 아이들에게 배고픔을 참고 강연을 듣느라 힘들었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 아이가 정말 잘 듣고 싶었는데 잠깐 졸았다고, 죄송하다며 말을 잇는다.

“근데 원래 1, 2교시엔 아침잠이 덜 깨서 졸려요. 3, 4교시엔 배고파서 힘들고요. 5, 6교시엔 점심 먹고 난 뒤라 비몽사몽이고 7교시엔 좀만 있으면 학교 끝난다는 생각에 들떠서 또 집중이 안 돼요.”

너무도 솔직한 고백에 나는 웃음이 빵 터졌다가 이내 짠해졌다. 약간의 과장이 더해졌겠지만 결국 학교에서 ‘살아 있는 시간’은 점심시간뿐인가! 거기다가 생리까지 하면 배도 아프고 책상에 앉아 있는 게 더 힘들다고 옆 아이가 거들었다. 여학생들은 한달에 일주일은 생리 중이다. 생기 잃은 몸으로 장시간 학습 노동에 속박된 학교생활. 그런데도 아이들은 “해주는 밥 먹고 공부만 하는 그때가 제일 속 편한 때인 줄 알라”는 충고를 듣는다.

내 학창 시절엔 아이들이 이렇게 단체로 맹렬히 졸진 않았다. 사교육이 덜해서일 거다. 요즘처럼 집-학교-학원이 정규 코스가 아니었으니까. 그날 대화를 나눈 아이들도 밤 9시까지 학원에 있는다고 했다. 아직 중학생인데 직장인으로 치면 매일 야근인 셈이다. 실제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도 적지 않다. 이러니 책상이 침대로 변할 수밖에. 한창 배움과 활동 에너지가 넘치는 시기에 반수면 상태로 하루하루를 버틴다는 사실은 가까이서 봐도 비극, 멀리서 봐도 비극이다.

교사의 자리에 서 본다. 나는 강연에서 어쩌다가 조는 사람들만 봐도 의기소침해진다. 내 얘기가 재미없나, 지루한가, 잘못됐나 하는 자책감이 든다. 그 쓸쓸한 기분이 감당이 안 돼서 비자발적인 청중이 모인 자리는 가급적 피한다. 그렇기에 더 의아하고 염려스러웠다. 학교에서 일하는 교사들은 아이들이 벼 이삭처럼 일제히 고개 숙이는 그 처연한 졸음의 풍경을 어떻게 날마다 견디는 걸까.

한 고등학교 교사들 책모임에 초대된 적이 있다. 자퇴하는 아이들이 그런단다. 학교에 와봤자 잠만 자고 하는 일도 없어서 그만둔다고. 그런데 그 하는 일 없는 학교의 복판에 자기가 있다고 한 선생님이 웃음 띤 슬픈 눈으로 말했다. 다른 교사는 글을 써왔다. “떠나가거나 무너져버린 친구들. 그 와중에 나는 직업인으로서 교사가 되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되지 못함을 한탄하는 교사인데, 때로는 온종일 엎드려 있는 학생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정지하고 싶다며 속으로 울기도 하는 것이다.”

한페이지 분량의 글을 그가 울먹울먹 읽어내려가는 사이 다른 교사들의 눈자위도 붉어졌다. 교실에서 눈물 흘리는 (학생이 아니라) 교사의 모습은 낯설었는데 묘하게 아름다웠다. 아이들은 알까. 선생님도 이토록 마음이 아프다는 걸, 너희와 잘 해보고 싶은데 방법을 모른다는 걸, 매 순간 무력감에 주저앉는 자신을 일으켜 교탁에 선다는 걸 말이다. 선생님의 눈물이 아이들의 지친 마음에 가닿는 장면을 상상하자 나는 잠깐 마음이 환해졌다.

서로 밀고 밀치며 욕망의 사다리를 기어오르는 일부 교사, 학부모, 학생들이 언론을 장식하고 도드라져 보이는 세상, 그러나 우리 사회 곳곳에는 졸음을 물리치고 눈물을 훔쳐가며 때로 한권의 책에 의지해 말문을 틔우고 고민을 나누며, 그러니까 제 가진 생명력을 총동원하여 매일의 생존을 도모하는 것으로, 답 없는 공교육의 뿌리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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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적 가해자라는 억울함에 관한 문의

[은유칼럼]

아들 둘 키우는 엄마는 고민이다. 스무살인 큰아이가 페미니즘 이슈에 부쩍 민감한 모습을 보이더니만 이렇게 투덜거렸다. “내가 왜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받아야 해요? 나는 여자들 괴롭힌 적도 없거든요.” 이럴 때 뭐라고 답해야 할지 난감하다 했다. 같은 자리에 있던 이십대 여성이 말했다. 설령 잠재적 가해자로 몰리더라도 자기가 나쁜 짓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잠재적 피해자는 제 의지와 상관없이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다고.

‘잠재적 가해자의 억울함에 관한 문의’는 여학교 강연에서도 곧잘 나온다. 어떻게 반박해야 하느냐고 걸페미니스트들이 묻는다. 나는 이십대 여성의 언어로 답한다. “남자는 잠재적 가해자라서 억울하지만 여자는 잠재적 피해자이기에 위험하잖아요. 억울하면 바꾸자고 말해봐요.” 다 같이 깔깔깔, 울 일인데 일단 웃는다. 웃음 끝이 쓰다. 아이들에게 한탄 겸 질문을 던졌다. 여성들은 신체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왜 상대의 억울함을 이해시키는 임무까지 맡아야 하는지 우리 생각해보자고.

한 여자 대학생도 고민을 터놓는다. 생애 최초로 커트머리를 했다. 세상 가뿐했다. 샴푸도 절약되고 외출 준비 시간도 단축됐다. 한 남자 선배가 헤어스타일의 변화를 알아보길래, 그냥 호기심에 잘라봤다고 근데 이 편한 걸 그동안 남자들만 했느냐고 심상하게 말했다. 그러자 남자 선배는 누가 언제 머리 못 자르게 했냐고 받아쳤다. 안부에서 출발한 대화가 서먹해졌다. 그 일이 맘에 걸린다며, 여자 대학생은 남자들과 불편하지 않게 대화하는 법을 물었다.

글 잘 쓰는 법처럼 답 없는 질문이다. “머리 길이가 세상을 활보하는 여성의 경험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을 남자에게 10분 안에 이해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인격체 이전에 관상용으로 취급받는 건 여성 공통의 사회적 경험이다. 그리고 대화에 불편함은 기본값이다. 생각의 결을 맞추는 일은 통증을 수반한다. 그보다 나의 궁금증은 이것이다. 남자 선배도 이 일로 뒤척였을까. 주변 사람에게 여자 후배가 ‘페미니즘을 공부하더니’ 예민해져서 말하기가 조심스러운데 대화하는 방법을 찾고 싶다며 조언을 구했을까. 그랬을 수 있다. 그런데 적어도 내 주변엔 이런 일상의 말 한마디나 에피소드 하나를 두고 그 상황을 복기하고, 반성하고, 모색하는 남성의 목소리는 드물다.

목마른 자가 샘 파는 이치 같다. 여자로 사는 일은 상대를 이해시키는 일이다. 밤에 다니는 것도, 혼자 여행을 가는 것도, 어떤 직업을 택하는 것도, 결혼부터 화장까지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한글부터 페미니즘까지 공부하는 이유도…. 이 세상 ‘아버지들’에게 설명의 통행료를 지급해야 한다. 그래야 삶의 통로가 겨우 확보됐다.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공감력이란 게 있다면 이 자기 증명의 훈련 덕분일 것이다.

인류를 둘로 나눠본다. 살면서 사사건건 자기 사정을 남에게 설명해야 했던 사람, 굳이 남에게 자신을 설명하지 않아도 사는 데 지장이 없었던 사람. 페미니스트에 반감을 가진 아들을 둔 엄마도, 걸페미니스트도, 어긋난 대화로 고민하는 커트머리 학생도 태어나서부터 전자의 삶을 산 경우일 거다. 남(자)의 기분을 헤아려 조심스럽게 말하고 이해시키는 건 여자의 임무라고 배웠으니까.

나도 그랬다. 노동을 소통으로 알고 살았다. 설명되지 않은 것을 설명하는 혹독한 지적 정서적 감정적 노동을 한쪽에서 너무 오래 전담했다. 이 관계의 불균형이 공감 능력의 양극화를 낳고 있다. 사실 잠재적 가해자의 억울함은 잠재적 피해자의 고통을 알면 사라지는 감정이다. 제 몸 돌려 타인의 입장으로 건너가보는 일은 지구를 반대로 돌리는 일처럼 불가능한 게 아니다.

 

*한겨레 삶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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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대화 아닌데요?

[은유칼럼]

“엄마 아빠가 대화하자고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편하게 말하라고 하시는데 별로 할 말도 없고 앉아 있는 게 힘들어요.” 글쓰기 수업에서 스무살 학인이 말했다. 대화는 관계의 윤활유라고 아는 난 혼란스러웠다. 알고 보니 부모가 운동권 출신이란다. 어릴 때부터 지속된 소통형 참교육에 피로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럴 수 있다. 자식이 보기에 부모는 돈, 힘, 지식을 다 가진 강자다. 자식의 생살여탈권, 적어도 용돈권을 쥐고 있다. 그런 비대칭적 관계에서 약자는 발언의 수위를 검열하거나 잠자코 들어야 하는 정서 노동을 피하기 어렵다. 대화가 배운 부모의 좋은 부모 코스프레가 되고 마는 것이다.

실은 나도 ‘이만하면 좋은 부모’의 함정에 빠져 있었다.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자 서로 바빠서 대화는커녕 대면 기회가 줄었다. 그 또한 나쁘지 않았다. 아이와 밀착하지 않으니까 집착도 덜어졌다. 내가 육아서에 나오는 모범 엄마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식을 통제하는 극성 엄마도 아니란 은근한 자부심마저 들었다. 한번은 슬쩍 물었다. “엄마 정도면 괜찮지? 잔소리도 잘 안 하고?” 아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엄마도 짬짬이 잔소리 많이 해요.”

역시, 자기 객관화는 실패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폐회로텔레비전(CCTV)처럼 나를 가장 가까이 지켜보는 타인, 자식이 참스승이다. 그 후로 아이에게 말할 때마다 조심스러웠다. 이것은 대화인가 훈계인가, 무관심인가 무리수인가. 경계는 늘 알쏭달쏭했다. 매번 질문하고 검토하는 수밖에. 애써보다가도 내 기분이 엉망인 날은 슬그머니 짜증이 일었다. 내가 자식한테도 눈치 보고 쩔쩔매야 되나, 라며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내적 외침을 삼키곤 했다.

원래 인간관계는 공손이 기본이다. 그런데 부모라는 이유로 자식한테는 막 해도 된다고 여기는 지극히 폭력적인 양육 관습을 나도 모르게 체화하고 있었다. 인문학으로 본 체벌 이야기를 다룬 책 <사랑해서 때린다는 말>을 읽고선 난 괜찮은 부모라는 환상을 벗었다. 자식에게 매를 드는 체벌만 폭력이 아니다. 빈정거림이나 비하 발언도 언어폭력, 방문을 쾅 닫거나 설거지를 할 때 탕탕거리며 불안감을 조성하는 건 정서 폭력, ‘나중에 두고 보자’는 말은 예고 폭력 등등 찔리는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얼마 전 정부가 부모(친권자)의 자녀 체벌을 제재하는 방향으로 민법 개정을 검토한다는 기사가 났다. 댓글 여론은 험했다. 보기에도 아까운 자식이지만 사람 만들려면 체벌은 필요하다거나, 교사의 손발을 묶더니 부모의 손도 묶는다고 개탄하는 의견, 내 아이니까 꿀밤 정도는 된다는 주장도 폈다. 이들은 꿀밤은 애정 표현이고 체벌은 폭력이 아니며 불가피한 부모 노릇이라는 믿음을 가진 듯 보였다.

‘사랑의 매’라는 말은 그 자체가 이중 폭력이다.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고 폭력을 정당화한다. 우리는 대부분 최초의 폭력을 가정에서 경험한다. 그간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수많은 어른들은 집과 학교에서 겪은 폭력의 기억을 수십년이 지났어도 그대로 복기했다. 맞아서 사람 됐다는 증언은 어디에도 없다. ‘사랑의 매’는 때리는 사람의 언어이지 맞는 사람의 언어는 아닌 것이다.

‘미성년’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좋은 어른이, 부모가 되긴 어렵다. 자식에 대한 성실한 이해는 귀찮고, 빠른 복종을 받아내길 원하는 이들이 ‘사랑의 매’라는 죽은 문자를 신봉하는 게 아닐까. 아이들은 대화와 훈계의 차이를 특유의 예민함으로 걸러내고 체벌과 훈육의 노골적인 차이를 간파한다. 가족이든 학교든 회사든, 그 조직의 가장 약자는 많은 진실을 알고 있다. 묻지 않으니 말을 안 할 뿐.

 

*한겨레 삶의창 6월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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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 눈물

[은유칼럼]

고양이 무지는 아침마다 베란다 창틀로 뛰어오른다. 18층 꼭대기는 세상을 관찰하기 좋은 전망대다. 그런 고양이의 의젓한 뒤통수를 나는 책상에서 감상하곤 한다. 하루는 무지가 생소한 울음소리를 냈다. 옆동 옥상에서 먹잇감인 새를 봤을 때 내는 우렁찬 야생의 소리랑은 달랐다. 무슨 일인가 봤더니 아파트 난간에 사람이 있다. 24년 된 단지의 페인트칠이 시작된 거였다.

작업자는 밧줄에 매달려 페인트 스프레이를 빠른 손놀림으로 뿌려댔다. 방석만한 깔개에 엉덩이를 댄 그는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떠 있었다. 간당간당 흔들리는 사람을 보자 현기증이 났다. 건물 벽에 붙은 사람이 지상에서는 검은 덩어리로 보이는데 같은 층 높이에선 인체 형상이 온전히 드러났다. 나는 커튼을 닫았다. 무지는 꼼짝 않고는 간간히 요상한 소리를 냈다. 내게 묻는 듯했다. “날개도 없는 닝겐(인간)이 왜 저기에 매달려 있는 거야?”

나는 인터넷 창을 켜고 ‘아파트 외벽 작업’을 검색했다. 청주시 J(62)씨, B(35)씨, 의정부시 A(78)씨, 수원시 J(47)씨, 서울시 김모(55)씨, 광주시에 사는 한 50대 남성, 춘천시 인부 B씨, 수원의 러시아인 A(25)씨…. 아파트를 칠하다가 떨어져 사망한 이들이다. 설마 했는데 ‘전신 골절’이란 단어가 들어간 지역신문 단신은 끝도 없이 나왔다.

2년 전 양산시에서 일어난 사건은 나도 본 기억이 났다. 옥상에 설치해둔 밧줄을 주민이 커터칼로 절단해버려 숨진 인부 이야기. 김모(46)씨는 오전 8시쯤 음악을 틀고 일하던 중 수면에 방해된다며 음악을 끄라고 항의하는 주민에게 변을 당했다. 고인은 칠순 노모, 아내, 그리고 열일곱살부터 세살까지 5남매 등 일곱 식구의 가장이었다고 한다.

우리 아파트에서 작업하는 분들도 누군가의 자식이고 남편이고 아버지일까. 고층건물 외벽으로 출근하는 심정과 그런 가장을 바라보는 가족의 질긴 불안을 헤아려본다. 살다 보니 떠밀려간 자리가,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아파트 난간 같은 ‘벼랑 끝’일 순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생과 사의 완충지대가 10센티미터도 확보되지 않는 일자리는 있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살기 위해 일하지만 일하다가 죽도록 내버려두는 이 부조리한 구조는 너무 노골적이라 가려져 있다.

우리 아파트는 화사한 봄옷을 갈아입었다. 다행히 사고는 없었으나 그 며칠간 무지는 매일 외부의 낯선 소리와 냄새와 움직임에 반응하며 ‘저기를 보라’ 명령했다. 나는 고양이를 따라 응시했다. 외벽 작업을 하는 반나절만이라도 땅 위에다 매트리스 같은 안전장치를 깔아놓으면 좋겠다 싶다. 당사자는 덜 불안하고 존중감이 들도록. 주민들은 그를 운 나쁘면 죽기도 하는 도구적 인간이 아니라 어떤 경우라도 살아야 하는 존엄한 존재로 보도록. 그러면 적어도 벽에 붙은 벌레 털어내듯 사람을 떨궈내는 일은 막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런 내 안전 구상을 이웃 아주머니에게 말했더니 실현 가능성 없다며 흘려버린다. 사고가 줄지 않는 걸로 봐서 도장 업체 대표나 노동자의 안전을 담당하는 관료들은 무신경하다. 아들 용균의 죽음으로 세상 돌아가는 비밀을 알아버린 김미숙씨는 이렇게 한탄했다. “우리나라는 안전장치를 하는 것보다 목숨값이 쌉니다.”

고양이에게 면목 없는 인간 세상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날개도 없이 허공에 매달려 일할 것이다. 그들은 존 버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불사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들”이다. 죽어도 죽지 않는 이들이 흘린 ‘페인트 눈물’로 우린 깨끗한 아파트, 쾌적한 도시에 산다. 인간 불평등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새가 있을 자리에 사람이 있어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면서.

※ ‘페인트 눈물’은 30년 경력의 도장 노동자가 “작업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 눈에서 페인트 눈물이 나온다”고 말한 데서 빌려왔다.

 

*한겨레 삶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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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는 정말 사라지는가

[은유칼럼]


“애들은 좋은 곳에 갔으니까 이제 마음에 묻어라.” “교통사고다 생각해라.” “시간도 흘렀는데, 옛날처럼 같이 산에도 다니고 만나서 술 한잔도 하자.” “아이를 잃은 건 슬프지만 너는 그만큼 보상을 받지 않았냐?” 세월호 유가족이 들었던 위로의 말들이다. 상대방의 선의는 의심하지 않으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유가족을 배려하는 행동도 배려가 되진 않았다. “유가족입니다” 하는 순간에 모든 사람들이 아무것도 안 시킨다. 커피 한 잔, 물 한잔 마시려고 해도 “앉아계세요, 제가 타드릴게요.” 하고 어딜가도 유가족 자리는 따로 마련한다. 지나친 배려는 때론 배제가 된다. 유가족이 술을 시켜도 되나, 화장은 해도 되나, 여행 간다고 손가락질 하면 어쩌나 지레 주눅이 든다. 


세월호 5주기에 맞춰 발간된 유가족 육성 기록집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에 나온 몇 가지 에피소드다. 유가족은 자식 잃은 비통함에다가 거친 말들과 시선까지 감내해야 했다. “슬픔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을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슬픔의 일부다.(론 마라스코)” 그래서 부모들은 모임을 꺼린다. 광화문 농성장에 모여있어도 말은 돈다. 울기만 한다고 뭐라고 하길래 웃었더니 웃었다고 다시 뭐라고 하니까, 서로 이렇게 충고한다. “간간히 울어.” 


책을 한 장 넘길 때마다 고개가 숙여졌다. 이 나라는 아이들만 구하지 못한 게 아니라 세월호의 슬픔에 빠진 유가족도 손 잡아주지 못했구나 싶었다. 나도 찔리는 구석이 있다. 상처를 건드릴까봐 고인의 이야기는 삼갔다. 예의인줄 알았다. 근데 아니더라. 17년 키운 자식을 한순간 잃었는데, 갑자기 이름도 불리지 않고 존재가 싹 지워진다면 그건 너무 쓸쓸한 일일 것이다. 


우린 슬픔에 무지한 종족이 됐다. 세월호 이전에도 슬픔은 허용되는 삶의 모드가 아니었다. 슬픈 사람은 약자로 분류되고, 약자는 구제의 대상이지 자기 목소리를 내는 권리의 주체로 보지 않는다. 공적 발언의 장이 주어지지 않고, 슬픔은 각자 삭혀야 할 사적 과제로 여긴다. 슬픔을 표현하는 말도, 슬픔에 공감하는 말도 공동체에 흐르지 못하니까 슬픔에 관한 언어가 빈곤하다. 슬픔에 관한 지혜가 모자라다. 


세월호 가족 이야기가 그래서 귀했다. 5년이란 고통의 시간을 견딘 목소리가, 슬픔에 단련된 말들이 쟁쟁하게 빛나는 슬픔의 교과서다. 해야 할 말과 해선 안 될 말이 무엇인지 배운 것만으로도 내겐 공부였다. 그리고 좋은 책이 그렇듯 삶과 사람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담겼다. 슬픔을 기르는 법이 정신을 가꾸는 길로 통한다.


“이 시간이 내 정신 세계를, 중요한 게 뭔지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생각하는 능력을 좀더 성숙하 게 만들어놨다”고 이지민 엄마는 고백한다. 이영만 엄마도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고, 세상에 힘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았다”며 이제 어른이 된 것 같다고 한다. 오준영 엄마도 깨어났다. “다 연결되어 있다고. 다 나한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 말한다. “책임지는 어른의 모습을 나한테 계속 강요한다”는 이재욱 엄마는 멋지다.


죽은 자는 정말 사라지는가. 아이들은 여전히 곁에 남아 부모의 결정에 개입하고 선한 영향을 미친다. “집에 들어가면 회의 녹음한 걸 세 번, 네 번, 어떤 때는 다섯 번까지 들어요. 이해를 하려고요. 우리 아들이 옆에서 자꾸 공부를 가르치는 것 같아요.” 호성이 엄마의 말이다. 세월호의 시간 5년, 유가족은 주변에서 그토록 권하던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했으나 한 사람의 분별력 있는 시민으로 복귀했다. 나만 잘살면 된다는 각자도생의 삭막한 땅에 슬픔의 눈물을 떨구어 진실의 언어를 심는다.

 

*한겨레 삶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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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물리치지 않는 사람들

[은유칼럼]

산시외버스터미널 대합실에 갔더니 연탄난로가 서있다. 학창시절 교실에서 보곤 처음이다. 동창이라도 만난 듯 다가갔다. 불꺼진 난로 옆에 연탄 여덟 개가 대기 중이다. 어릴적 엄마랑 외출했을 때 엄마는 연탄불이 꺼질까봐 늘 발을 동동거렸다. 연탄 구멍 사이로 엄마의 초조한 눈빛이 보인다. 너는 누구를 위해 한번이라도 연탄을 갈아봤느냐, 유명한 시구를 내맘대로 고쳐 써본다. 대합실 벽면엔 ‘축 발전’이 새겨진 거울이 걸려 있다. 서울에서 고작 두 시간 이동했는데 다른 시간대에 떨어진 영화 주인공처럼 나는 두리번거린다. 


괴산 솔멩이마을에 글쓰기 강연을 왔다. 섭외 제안이 연애편지 같았다. 진즉에 초대하고 싶었는데 못하다가 사업비가 생겨서 부른다는 사연. 가난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괴산이라서 더 그랬을까. 괴산은 빈민운동가 정일우 신부가 88올림픽을 앞두고 상계동이 철거되자 터를 잡은 곳이다. 이곳에서 땅을 살리는 유기농법 전파에 힘을 쏟았다. 그의 다큐멘터리 <내 친구 정일우>에서 그는 말한다. “더 가난해졌으니까 잘 된 것이다. 가난해야 천국에 가깝다.” 이 말 뜻을 이해하고 싶어서 괴산에 가보고 싶었다. 


강연을 주선한 엄선생님이 터미널에 마중을 나왔다. 차를 얻어타고 가는데 점심을 먹자고 한다. 식사 초대는 매번 딜레마다. 강연 전에 낯선 사람과 식사를 하면 기운을 뺏기고, 강연 후엔 기운이 소진돼 밥이 안 넘어 간다. 정중히 사정을 말하고 사양하곤 한다. 때마침 남은 시간도 빠듯해 핑계도 적당했다. 그런데 웬 걸. “강연에 좀 늦어도 돼요. 밥 먹고 갈테니까 차 마시면서 기다리라고 했어요.” 한다. 


메뉴는 김치찜. 윤기가 반들반들 흐르는 묵은지를 보자 침이 고인다. 반찬으로 나온 계란말이도 특별했다.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한 조리법인데, 노란 테두리에 하얀 속살 사이사이 오색 채소가 박힌 도톰한 계란말이는 젓가락 대기도 아깝게 고왔다. 계란말이에 대한 찬사를 건네자 주인이 그런다. “계란말이만 7년을 연구했어요.” 그 말이 내겐 이 원고는 퇴고만 7년 했어요,로 들렸다. 평소 농담처럼 말하지만 글은 밥과 경쟁한다. 밥 한그릇 만큼 필요와 만족을 채워주는 글을 쓰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예정대로 10분 지각했다. 강연에 늦고도 이토록 속 편한 것도, 수도가 얼어 화장실을 쓰지 못하는 강연장도, 마을회관 같은 오붓함도 처음이다. 암막 커튼이 없고 햇살이 눈부셔서 스크린이 희미하게 보였지만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두 시간이 태평하게 흘렀다. 강연료가 적어서 미안하다며 엄선생님이 꾸러미를 건넸다. 직접 농사지은 쌀로 만든 누룽지, 딸기잼, 블루베리잼, 계란, 술이 한보따리다. 


“산이 참 깊네요.” 들어올 때 안 보이던 풍경 나갈 때야 보인다. 울울창창한 산세에 감탄하는 내게 엄선생님 말한다. “저 아랫마을에 사는 할머니들은 산에서 내려온 호랑이를 봤다고 해요.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으면 머리는 남기고 몸통만 먹는대요. 멧돼지는 머리까지 다 먹고요.” 전래동화처럼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본 적 없는 공룡도 믿는데 할머니가 본 호랑이를 못 믿을 건 무언가. 자연에서 반나절, 시간 엄수, 근거 확립, 신속 정확 같은 도시의 감각에서 잠시 놓여나니 마음이 들녘처럼 넉넉해진다.


<내 친구 정일우>의 원래 제목은 ‘사람 물리치지 않는 정 신부’였다고 한다. 사람 물리치지 않는 사람 품은 고장에서, 그가 말하곤 했던 사람 물리치지 않는 주문을 되뇌어본다. “사람은 누구나 깨진 꽃병이다. 이렇게 막고 저렇게 막고 해봤자 깨진 걸 숨길 수 없다.” 연탄 난로와 깨진 꽃병의 마음이 있는 그곳이 천국이겠구나 생각하며 서울을 향한다.


한겨레 3월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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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말들

[은유칼럼]


<출판사 책소개>

나를 과시하거나 연민하기 바쁜 시대,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지만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 되는 시대. 《다가오는 말들》은 이런 ‘나’ 중심의 시대에 ‘타인’의 입장에 서보는 일의 가치를 역설한다. 은유는 우리가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일 때 내가 가진 편견이 깨지고 자기 삶이 확장되는 경이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럴 때 나는 나와 타인을 돌볼 수 있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우리가 서로 연결되면서 세상도 좋은 쪽으로 약간의 방향을 틀게 된다.

“글쓰기를 배우려다 인생을 배웠다”는 독자들의 반응을 얻은 《글쓰기의 최전선》과 《쓰기의 말들》, 여성이자 엄마로서 살아오며 겪은 편견과 차별, 외로움과 절망, 울분을 여러 편의 시와 엮어 풀어내면서 독자들이 잊었거나 몰랐던 감각을 깨워준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를 모두 아우르면서도 그 책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은유의 말을 빌리자면 《다가오는 말들》은 “나에게서 남으로, 한발 내디뎌 세상과 만난 기록”이다. 늘 그래왔듯 이번에도 은유의 글은 읽는 사람의 마음과 시야를 열어주며, 독자들은 더욱 성숙하고 단단해진 은유의 문장들을 통과하다 보면 자신 역시 성장하는 느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새 책이 나왔다. 그동안 쓴 글을 모은 게 아니고 이 책을 위해서 그동안 글을 썼다. 순서가 그렇다.

이환희 편집자가 책 내자고 제안하고 , 꾸준히 글을 쓰게끔 채널예스와 시사인에 연재를 잡아주었다.

지난 2년 간 편집자와 매주 연락을 주고 받고 글과 말을 나눈 협업의 결과물이 <다가오는 말들>이다. 

편집자에 대한 고마움은 서문에 별도로 쓰지 않았다. 책 낼 때마다 편집자와 출판 관계자분에게 너무 고마워서 

그 고마움에 답하고자 1년 전 <출판하는 마음>으로 냈기 때문이다. 

수레가 묻는다.  엄마는 언제 이 책을 썼어? 너 잘 때, 학교 갈 때, 놀 때 썼어.

아이들이 모를 정도로 일상에 지장 없었으므로 가족들에게도 특별히 미안할 것은 없다. 

내 밥 지어 먹고 애들 다 돌보고 스스로 앞가림 하면서 글 쓴 것이 떳떳하다. 

책 내는 일이 살아가는 일이 그렇듯 위대하게 평범한 일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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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엄마를 보다

[은유칼럼]

영화 <로마>의 주인공은 연애를 하다가 아기를 갖는다. 임신 사실을 극장에서 연인에게 말한다. 스크린을 등지고 여자의 몸을 탐닉하던 남자는 그 말을 듣고 자세를 고쳐 앉는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한다. 영화도 안 끝났는데 어딜 가냐고 여자가 묻자, 금방 올 거라며 뭐 사다 줄까? 묻기까지 하더니만 결국 오지 않는다. 남자는 종적을 감춘다. 이후 남자의 행동은 예상대로라서 슬프고, 예상치 못한 대목에선 참담하다.


주인공의 성정은 외유내강하다. 유명한 회화 속 ‘우유 따르는 여인’처럼 매일매일의 노동을 묵묵히, 만삭이 되도록 수행한다. 영화 끝무렵 딱 한번 감정의 수문을 연다. “아기를 낳고 싶지 않았다”며 목 놓아 운다. 나도 따라 울었다. 남자를 비난했고 여자를 연민했다. 여자의 엄살 없는 살아냄을 존경했다. 예나 지금이나 지구촌 어디서나 그래도 되는 남자가 계속 생겨나는 가부장제 시스템에 분개했다.


같은 영화를 본 친구는 주인공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 ‘원치 않았던 아기’의 존재에 감정을 이입했다. 친구는 말했다. “어쩌면 나도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 그리고 그 복잡한 사연과 심정을 글로 남겼다. 엄마의 냄새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엄마에 대한 정보는 두 가지뿐이다. 아빠와 아빠의 부모에게 가족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는 것. 자신이 생후 백일 무렵 홀연히 떠났다는 것. 친구는 자기도 엄마로 십년 넘게 살아낸 지금에야 엄마를 바로 본다며 이렇게 글을 맺었다.


“그건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엄마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은 것뿐이다. … 엄마는 나에게 역할이 아닌 주체로 살라고 최초로 보여준 사람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20대 후반의 엄마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엄마, 너의 자유로움으로 가.”


드라마나 소설 같은 허구에서 엄마의 부재는 가능한 시나리오다. 자식을 버린 여자, 엄마가 되지 못한 엄마는 있었다. 나쁜 년이고 독한 년으로 불려나왔다. 현실에서는 보기 어렵다. 아니, 드러나지 않는다. 배타적인 직계가족주의 사회에서 엄마의 부재는 커다란 결핍이고 모성의 거부는 금기였으니까. 가족은 숨겼고 당사자는 숨었다.


몇 년 전부터 나는 그들을 본다.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소위 숭고한 모성의 기준에 미달한 존재를, 감히 자식을 저버린 엄마의 서사를, 그것을 진술하는 용감한 목소리를 듣는다. 조용한 감동이 인다. 이 사회에서 자리를 할당받지 못한 ‘모성 없는 (존재로 낙인찍힌) 여자들’은 약자의 자리에서 세상을 보는 법과 언어를 익힌 자식의 몸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영화 <로마>도 낮고 깊은 시선의 영화다. <그래비티>로 잘 알려진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인데 엄마, 누나, 보모 등 자신을 키운 여자들에게 바치는 헌사다. 그중에서도 보모가 중심이다. 보모의 너그러운 품에서 먹고 자고 놀던 아이가 자라서 50여 년 후 영화를 내놓았다. 그것은 백인 가정에 고용된 원주민-보모?여성이라는 불리한 생애 조건에 놓인 한 사람을 역사와 서사 속에서 바라보는 데 걸린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나의 친구도 44년 만에 엄마를 재의미화했다. ‘엄마는 왜 나를 두고 갔을까’에서 ‘엄마는 왜 나를 두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로 질문이 나아가기까지 한 세월을 바쳤다. 친구가 그간 읽고 쓰고 보고 들은 모든 것은 엄마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이해는 그만큼 고도의 지적 작업이다. 한 편의 기품 있는 영화가 불러온 이야기를 전하며, 친구의 이야기를 이어받아 또 다른 삭제된 존재로서 여자의 서사가 태어나길 기대한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81393.html?_fr=mt5&fbclid=IwAR2OhH2J3x6-wOGvuWKO63YEO8p1RBX6NWpxHSTcJPe0g3eCZXog_StSdUw#csidx92c87cc429f4782a92a32cdee053d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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