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은 20대에도 이해할 수 있지만, 인문학은 인생의 깊이만큼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인문학이 삶의 학문이기에 나온 얘기다. 자아를 성찰하고 세상 보는 안목을 키워주는 인문학은 길을 잃은 사람일수록, 굴곡진 경험이 많을수록 이해가 쉽다. 그래서인지 인문학의 죽음을 논하는 시대에도 교도소·노숙인센터 등 삶의 변방에 인문학이 번성하고 있다.
그 불씨를 지핀 주인공은 임영인 신부다. 2005년부터 성공회 다시서기 상담보호센터에서 노숙인 대상 성 프란시스 대학 '클레멘트(Clemente) 인문학 코스'를 개설해 운영해오고 있다. 이는 노숙인을 단지 먹고 재워주는 대상에서 삶의 주체로 서게 한 유의미한 시도였다. 비록 가진 것 없어도 자존감을 되찾아 당당한 삶을 살자고, 많은 노숙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인문학 1년 공부하면 삶이 달라질 것 같습니까?"
"노숙인 인문학이 조금 소문 나니까 기자·교수부터 주변인들까지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봐요. 인문학 공부하니까 노숙인들이 달라지느냐고요. 그럴 때마다 제가 되묻습니다. 당신은 어떨 것 같습니까. 1년간 인문학 공부하면 삶이 크게 달라질 것 같나요. 삶이 180도 변하고 버리고 싶은 것 다 버렸나요. 당신이 변하고 싶은 방향으로 완전히 변하던가요?"
더러는 질문을 되돌려주는 것이 가장 좋은 답변이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변하기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노숙인에게는 다른 잣대를 들이대고,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한다. 통계치로 실효성을 확인하려 든다. 헌데 개개인 내면의 섬세한 변화를 무슨 수로 파악하겠는가. 그는 나지막이 스펀지 이야기를 꺼냈다.
"마른 스펀지에 물기가 조금 있으면 그다음부턴 물을 쫙쫙 빨아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물의 흡수량이 많아져도 겉보기엔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스펀지를 들어보면 알지요. 묵직합니다. 많이 변해요. 공부하느라 머리에 쥐난다는 분도 있고, 밤도 새고 열심히들 합니다. 눈빛과 표정·말투가 달라집니다."
노동운동 7년... 신부도 위장취업이 되나요?
노숙인과 인문학을 하나의 순서쌍으로 묶기까지, 그 러한 발상이 싹트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임영인 신부는 "나는 인문학을 잘 모른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도 노숙인 인문학을 착안한 것은 순전히 '소 뒷걸음질치다가 쥐 잡은 일'이라고 빗대었다.
그의 말대로 '뒷걸음질'의 발자취를 더듬어보자. 임영인 신부는 대학 3학년 때 군사독재정권을 비방하는 유인물을 뿌리다가 옥고를 치렀다. 공장에 안 가면 나쁜 놈이 되던 시절이었다.
노동자가 되었고 '소'처럼 묵묵히 일했다. 사람들을 모으고 조직을 꾸리며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었다. 설레는 앞걸음질, 고달픈 뒷걸음질의 연속이었다. '노동자의 벗'이 되어 인천·오류동·수원 등지를 떠돌며 생의 밭을 갈고 또 갈았다.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늘 했지요. 뭔가 밑바닥 계층인 노동자가 권력을 쥐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90년대가 오니까… 할 일이 없더라고요(웃음). 가난하고 절망에 빠진 이들과 함께 하고자 신학교에 들어갔고 성직자가 됐습니다. 그랬더니 후배들이 찾아와서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아, 선배~ 신부도 위장취업이 됩디까?'"
일순 온 얼굴에 익살스러운 표정이 번진다. 활짝 웃는 모습이 5월 풀잎처럼 쾌청하다. 그는 그야말로 '민초' 신부가 되었다.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먼저 웃는 '풀'이 되어 소외된 이웃과 동고동락했다. 그들에 대한 살붙이에 가까운 애착이 깊어갔다.
"인천 송림동에는 90년대 중후반까지 초가집이 있었어요. 당시 <체험 삶의 현장>이란 프로그램에서 씨름선수 강호동이 연탄을 날랐는데 하루 일하더니 녹초가 되더라고요. 저 체력 좋은 씨름선수도 쓰러지는데…, 여기 이 바닥 사는 이들의 삶의 무게는 얼마나 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밥'과 '신앙' 거래하는 종교단체... "왜 길거리에서 밥 퍼주나"
힘없고 가난한 이들이 어떻게 하면 자립기반을 닦을 수 있을까. 이는 그의 평생 숙제였다. 안 해본 일이 없다. 경제적 자립을 돕고자 자활공동체도 꾸리고 김치공장도 운영했다. 기초생활보장법 제정에도 나섰다. 그 사이 빈곤계층의 삶은 객관적으로 볼 때 한결 나아졌다. 무료급식도 이뤄지고 적어도 밥굶는 일은 줄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만큼 노숙인들이 행복해진 걸까? 그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노숙인들에게 밥 한 끼를 먹여주기는 하지만 그들의 자존감은 여전히 길바닥에서 뒹굴었다. 노숙인들 누구도 자아존중감을 갖지 못했고 세상도 그들을 엄연한 인격체로 대해주지 않았다. 그는 노숙인 선교단체가 지닌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IMF가 닥치고 노숙인이 늘었다. 서울역 지하도에서는 종교단체에 의해 매일 700∼800여 명의 급식이 이뤄졌다. 아쉬운 대로 먹여주는 일은 고맙지만, 10년이 지나도 노숙인들의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또 노숙인들은 10년을 얻어먹으면서도 대부분 고맙다는 생각을 안했다. 아니 못했다. 결코, 그들의 심성이 나빠서가 아니었다.
무료급식 한 시간 전엔 어김없이 예배가 이뤄진다. "왜 그렇게 '아멘' 소리가 적느냐", "진작 예수 믿었으면 이런 처지 안 됐을 거다"는 등의 말이 종교인의 입에서 나오기도 했다. '신앙'의 이름으로 밥과 신앙이 거래되고 있었다.
"아무리 추워도 노숙인들 밥은 꼭 길거리에서 퍼줍니다. 왜 그러냐면, 현실적으로 길거리에서 밥을 퍼야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후원금이 들어오거든요. 또 겨울철마다 무료로 나눠주는 방한복에는 꼭 종교단체의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그거 창피해서 그들도 안 입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나 노숙인'이라고 광고하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민중'을 입에 올리던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끼니가 전부가 아니었다. 노숙인들도 똑같은 사람이다. 인간은 의식주 문제가 해결돼도 근본적으로 자존감이 회복되지 않으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비록 가난할지라도 행복하게 살아가지 않던가. 인문학을 통해 그들에게 자아성찰과 관계 맺기의 기회를 주자고 생각했다.
이는 과거 이데올로기적 성향을 띠었던 '의식화'와는 전혀 달랐다. '성찰과 소통'으로 살아갈 힘을 키우는 마음공부다. 마침 그즈음 <희망의 인문학>이란 책을 접했으니 그의 의지는 한껏 고양됐다. 하지만 실무적인 작업이 쉽지 않았다. 세 가지가 문제였다. 교수진·강의실·돈.
"교수진을 짜기 위해 한 때 '민중'을 입에 올리던 사람들을 찾아갔으나 눈치껏 도망치더라고요. 노숙인들이 끈적끈적하고 힘들다는 겁니다. 착잡하고 실망스러웠지요. 이게 진짜 민중인데 도대체 저들이 말한 민중은 뭔가 싶어서요. 겨우 설득해서 교수진을 짜고 돈은 대기업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장소 섭외가 제일 어려웠습니다. 노숙인이라고 말하면 하나같이 얼굴빛부터 달라지니까요."
작전을 달리했다. 떳떳하게 대여료 지불하고 '인문학' 강의 용도로 대여하면 될 일이다. '노숙인'이란 말은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품위 있게 '인문'학이란 말만 했더니 쉽게 해결됐다." 노숙인 대상으로 성 프란시스 대학 '클레멘트(Clemente) 인문학 코스' 강좌를 시작했다. 1년 과정으로 20명을 뽑았다.
입학식에 기자들이 몰렸고 '클레멘트 인문학’은 대대적인 유명세를 탔다. 그러자 2학기에는 교수들이 너도나도 강의하겠다고 줄을 섰다. 그것을 보니 씁쓸한 마음이 들더라는 그는, 우리 사회 지식인들이 공부를 왜 하며 언제 어떻게 누구와 나눠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신부님, 공부할수록 내 속이 보여서 괴로워요"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클레멘트 인문학은 4년째 진행 중이다. 그간 인문학을 접한 노숙인들이 삶은 많이 바뀌었을까요. 그는 눈을 반짝이며 스스로 묻고 답했다.
"한 노숙인이 찾아와 말하더군요. 공부를 때려치우고 싶다고요. 공부를 할수록 자기 속이 들여다보여 너무 괴롭다는 거예요. 과거 살아온 날들이 보이고 쪽팔리고… 근데 못 그만두겠대요. 이게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 같다고. 이마저도 없으면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말하더군요."
노숙인 생활을 하다가 택시기사로 취직한 이씨는 사납금을 자기 돈으로 채워가면서 수업을 들으러 온다. "인문학 공부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이라며 일주일에 3회 3시간 가까이 할애해서 수업에 참여한다고 했다.
이 밖에도 희망적인 사례가 많다. 예전 직장으로 돌아간 사람, 고향 찾아간 사람, 방통대 공부하는 사람, 주택관리사 공부하는 사람, 트럭운전·청소일 하는 사람 등등. 매년 20명 입학하면 13명 남짓 졸업하는데 그들은 각자 삶의 길을 찾아 떠난다.
이처럼 노숙인들에게 인간적 성숙의 기회를 주는 노숙인 인문학 강좌는 편견과 차별, 배제의 시각으로 노숙인을 바라보는 사회에 경종을 울려주는 계기도 되었다. 임영인 신부는 "노숙인이라고 말할 때 '노숙(露宿)'은 그야말로 상태를 규정하는 것일 뿐, 그들의 인격과 삶 전체를 폄하하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노숙인 '소통훈련' 절실... 사회와 단절된 끈 이어야
노숙인의 평균연령은 50세다. 30%가 고아원 출신이고 60%가 폭력·편부모·중독가정이다. 또 절반 이상은 결혼을 하지 않았고 18세 이전부터 생계형 노동을 해왔다. 평균학력은 초졸이다. 대부분 구걸을 하거나 조금 나은 경우 막노동을 해 돈을 번다. 노숙인 현황을 줄줄이 읊은 후 그가 말했다. "노숙인은 도시 속의 섬 같은 존재"라고.
"공장 언저리에서 7년, 빈민들과 10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얻은 결론이 있는데 빈민계층이 빈곤을 벗어나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연고나 가족 등 지지기반이 전혀 없습니다. 직장이나 사회생활 경험이 취약해서 세상살이가 서툽니다. 요리자격증을 따면 뭐합니까? 재료를 구입하고 서비스를 제공하고 대인관계를 풀어가는 법을 모릅니다. 식당을 차려도 거의 실패하죠. 시행착오를 겪으며 경험을 축적해야 하는데 그런 기회 자체가 없습니다."
노숙인들에게는 세상과 단절된 관계를 하나씩 이어가는 방안이 시급하다. 타인과 나누고 소통하는 법을 배워 지역사회에 당당한 구성원으로 살아가도록, 자유롭고 넓게 살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 소통의 방법을 잃어버린 인간은 자기 사랑을 회복하지 못하고 남도 사랑하지 못한다. 노숙인들의 사회적 소통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늘 소통이란 화두를 품고 산다는 임영인 신부는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며 공개했다.
"노숙인을 위한 라디오 방송국을 만드는 겁니다. 영화 <라디오 스타>처럼 노숙인이 사연을 보내면 전화연결을 하죠. '어이 시청역 김씨~ 요새는 좀 씻고 사나?', '서울역 박씨, 술 좀 그만 먹지~' 어때요? 재밌죠? 라디오 방송을 하면 정말 좋은 거 있는데… '57분 급식정보'를 알려주는 거예요.”
"노숙인을 위한 라디오 방송국은 어떨까요"
상상만으로도 재밌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지금 어디어디 가면 무료급식을 먹을 수 있다고 친절히 알려주다니. 그는 또 일반인들도 사연을 보내면 노숙인들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도 씻고 상호 소통이 이뤄지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주파수 허가가 나지 않아 꿈을 접어둔 상태라며 금세 웃음을 거둔다.
임영인 신부와의 대화는 즐겁다. 진지한 이야기를 심각하지 않게 하고, 유쾌한 내용을 경박하지 않게 풀어내는 재주가 있다. 진지 모드와 경쾌 모드의 전환이 빠르니 지루하지 않다. 이런 그의 성품을 '심연을 아는 자의 명랑성'이라고 해두자.
그런데 그가 학생운동 할 때 퍽이나 과격했다는 소문이 있다.
"과격했지요. 사실 그때 앞에서 화염병 던지고 그러면 가슴이 엄청 콩닥거려서 도망가고 싶었어요. 싸워야 하니까 나가고 과격한 척한 거죠. 오히려 지금이 진짜 과격해진 거 같아요. 노숙인들 문제를 풀려다 보면 싸울 일이 많은데(웃음) 이제 두려운 게 없어요. 왜? 답이 보이니까요."
그는 오는 8월 노숙인 10여 명과 자전거 500대를 들고 필리핀에 간다. 헌 자전거를 수리해서 빈곤계층에 나눠주는 봉사활동이다. 노숙인들이 사회구성원으로서 땀 흘려 일하고 타인에게 나눔을 경험하면 자긍심이 생길 것이라 기대했다. 이 외에도 노숙인들이 어우러져 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 중이다.
노숙인 자활사업, 꼭 성공만이 목표는 아닌데
하지만 그는 걱정이다. 잘 된다는 보장은 없는데 사람들은 으레 잘 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일을 하는 것이 꼭 성공이 목표는 아닐진대, 주위에서 가시적 성과에만 매달리니까 부담스럽다며 말끝을 흐린다. "사는 게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데…."
문득 궁금했다. 그는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를 때 어떻게 하는지. 뭐, 남들과 비슷하단다. 잠도 자고 사람 바글바글한 시장도 싸돌아다니고 기도도 하고… 그러면 낫는다고. 그리고는 사람은 자신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한 이를 보면 얄궂게도 위안을 얻는다는 얘기까지 흘렀다. 그것이 온당한가, 본성인가에 대한 토론 끝에 그가 여운 가득한 한 마디를 남겼다.
"슬픔이 슬픔을 구원한다…. 난 이 말 아름다운 거 같아요."
슬픔의 아름다움을 아는 신부님은 말한다. 신이 인간에게 가르친 핵심은 사실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자기 자신이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잃어버린 이들의 마음에 그 귀한 씨앗을 뿌리느라, 임영인 신부는 부단히 앞걸음질, 뒷걸음질치며 척박한 땅을 갈고 있는 것이리라. 글. 김송지영
* 2008. 오마이뉴스 '백인보'
(연구공간 수유+너머 탐방 기사를 '백인보- 인물인터뷰'로 써달라고 해서 신부님을 한 번 더 뵙고 다시 매만진 글이다. '슬픔이 슬픔을 구원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신부님과 나는 땀이 뻘뻘 나도록 매운 칼국수 먹으면서 꽤나 낭만적인 얘길 나누었다. 여러번 가슴이 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