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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삶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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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등록금 마련을 위하여 '나비'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재작년 성폭력피해자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만났습니다. 수업 시간에 항상 진지한 눈빛으로 임했죠. 공부하고 알바하기 바쁜데 과제도 꼬박꼬박 잘 해오고, 무엇보다 글을 참 잘 썼어요. 회피하거나 에둘러가지 않고 자기 상황과 감정을 응시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재주가 있었어요. 오웰이 말한 '불쾌한 사실을 직시하는 능력'이 있는 거죠. 나비의 글을 보면서 저도 많이 배웠기에 "나비, 계속 글 써도 좋을 거 같아."라고 말했어요. 나비도 배우고 싶다고 했었어요. 입시 끝내고 관심 있음 언제든 오라고 했죠. 그때 같이 공부하던 한 친구와 올봄에 연락이 닿아 만났을 때 나비가 퇴소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대학은 갔는지 궁금했는데 며칠전 한국성폭력상담소 뉴스레터에서 나비 소식을 봤네요! 열림터 ..
성북동, 최순우 옛집 두문 즉시심산 (杜門卽是深山). 문을 닫아 걸면 이곳이 곧 깊은 산중이다, 라는 뜻이다. 혜곡 최순우 옛집에 걸린 편액이다. 최순우는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분으로 미술사학자다. 성북동 자락에 그가 살던 고졸한 아름다움이 배인 한옥이 보존되어 있다. 조붓한 앞마당도 좋지만 모퉁이 돌면 나타나는 수려한 뒷뜰에 취한다. 햇살과 바람과 잎새 종일 뒤척이는 그곳, 깊은 산중이라 할만 하다. 최순우는 창호지 문 열고 들어가면 가 닿는 깊은 산중 '자기만의 방' 에서 라는 책을 썼다고 한다. 읽어보고 싶다. 그 방을 생각하며. 김수영이 나는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었다고 했는데, 나는 글은 안 쓰고 글방만 보면 탐낸다. 훔치고 싶은 방. 어제 성북동 전시장 오뉴월 갔다가 정호씨가 가보자고 해서 우연히 들른..
우연히 길담서원에서 첫눈 내리기 하루 전날. 수능 한파가 몰아친 날. 그러니까 겨울 초입에 서촌을 찾았다. 체부동에서 통인동 지나 옥인동으로. 예전 내 근무지. 점심 먹고 옷깃 동여맨 채 종종걸음으로 산책하던 그 길. 길담서원이 이사를 한 뒤로 한 번도 가보지 못하다가 이날에서야 발을 디딘다. 숨은 그림 찾기처럼 찾고 나면 잘 보이지만 모르면 꼭꼭 숨어 있는 집. 등 뒤에서 나를 놀래킨 서점. 박성준 대표님 만나러 귤 한상자 들고 동료랑 동행했다. 이런저런 책관련 포럼의 자문을 구하기 위한 자리. 박대표님이 외부 일정 마치고 들어오는 길이라고 했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지만 가끔 늦기도 하는 것은 좋은 거 같다. 숨 고르기의 시간. 이런 틈. 일상의 여백. 서가를 기웃거리면서 침을 꼴딱 삼켰다. 사고싶은 책이 너무 많..
통영 동피랑 벽화길 - 달동네 꽃물들다 ‘새끼 오이소! 동피랑 몬당꺼지 온다꼬 욕 봤지예! 짜다리 벨 볼 끼 엄서도 모실 댕기드끼 어정거리다 가이소’ 자글자글 주름꽃 핀 할매의 다정한 목소리 들리는 듯하다. 이는 동피랑 마을에 설치된 통영사투리 간판이다. 표준어로 옮기면 ‘어서 오세요. 동피랑 언덕까지 오신다고 수고하셨습니다. 별 볼거리가 없어도 마실 다니듯이 천천히 둘러보세요.’ 라는 뜻이다. 동피랑은 통영 중앙시장과 강구항을 품고 있는 하늘아래 언덕마을이다. ‘한국의 나폴리’로 불리는 통영의 아름다움이 한 눈에 내다보이는 동쪽 벼랑(피랑)에 자리했다. 전망이 좋은 만큼 가파르다. 물길, 발길이 닿기 어려운 지형 탓에 일제강점기 때부터 부두의 막노동꾼, 지게꾼, 엿장수, 붕어빵 굽는 아낙 등 가난한 사람들이 판자촌을 이루고 살았다. 몇 년 ..
배다리, 옛 정취 간직한 역사문화마을 ‘이르다’는 뜻의 이름에는 저마다 타고난 사명이 담겨있다. 땅이름도 그렇다. 인천(仁川)은 어진 내, 어진 흐름이다. 물길이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던 시절 인천은 근대화의 진입통로였다. 항구에서 받아들인 서구문물을 서울로 실어냈고 외지사람들은 여기서 성공하면 서울로 나갔다. 엄마처럼 정성스레 품어 내어주는 곳이 인천이었고 그 중심에 배다리마을이 있다. 배다리는 인천 동구 금곡동 일대를 일컫는다. 19세기 말까지 마을 어귀에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닿는 다리가 있어 ‘배다리’라고 불렸다. 유서 깊은 지명대로 배다리는 근대로부터 이어오는 삶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최초의 공립 보통학교 창영초등학교, 여선교사 기숙사 등 100년도 더 된 건물과 옛 성냥공장, 양조장을 볼 수 있다. 인천항에서 일하던 인부들과..
통인시장길, 시장 옆 한옥마을 서울 인왕산 자락에는 작은 동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통인동, 옥인동, 누상동, 누하동, 체부동 등 골목길을 돌 때마다 지명이 바뀌는데 이 일대를 경복궁 서쪽이라 하여 ‘서촌’이라 칭한다. 이곳엔 한옥 300여 채와 사대문 안의 유일한 재래시장인 통인시장이 남아 있다. 개발과 속도를 피해간 도심 속 ‘올드타운’이다. 고풍스러운 멋을 간직한 서울의 시골길을 걸었다.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10여분 가면 왼편으로 ‘통인시장’ 간판이 보인다. 천장에는 눈비를 가리는 둥근 아케이드가 있고 통로 바닥은 매끈하게 다져놓은 신식 재래시장이다. 건어물, 채소류, 잡화류, 쌀, 떡볶이, 반찬을 파는 소형점포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가게 안쪽 온돌마루에는 꽃무늬나 땡땡이무늬 티셔츠에 보풀 일어난 카디건을 겹겹이 걸치고 ..
충무로인쇄골목 - 삶을 실어 나르는 인생길 개구쟁이 꼬마 서넛이 팽이치기라도 할 것 같은 아련한 골목길이다. 낮은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내려온 오후 두시의 도톰한 햇살이 울퉁불퉁한 바닥에 고인다. 그 좁다란 길 위로 머리에 쟁반을 인 밥집 아줌마가 잰 걸음을 옮기며 단역배우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종이를 실은 삼륜차와 오토바이가 곡예를 하듯이 서로 비껴간다. 양 옆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인쇄소 미닫이 문틈으로 기계 굉음이 새어나온다. 허름한 골목길에 어시장 못지않은 활기가 넘친다. 모퉁이를 돌아설 때마다 비슷비슷한 골목길이 실개천처럼 이어지는 곳. 서울 충무로 인쇄골목 풍경이다. 영화의 고장답게 마치 거대한 세트장을 연상시키는 충무로 일대에서는 각종 인쇄물만큼이나 다양한 삶이 만들어지고 있다. 인생이라는 장편영화를 찍는 주연배우들. 봄의 전령사..
그린원 환경을사랑하는학생전시회모임 - 원하는 것은 자연이다 젊은 미술학도들이 하면 환경운동도 다르다. 딱딱한 문건, 식상한 구호 대신 재기발랄한 작품과 풋풋한 초록감수성으로 친환경 메시지를 전한다. 세 번의 큰 전시와 크고 작은 게릴라 전시를 통해 에코세대의 소명을 다하는 그들은, 환경을 사랑하는 대학생 전시모임 ‘Green One’이다 백 마디 말보다 하나의 작품으로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된 7월 초순.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연일 퍼붓는 빗줄기가 이들에겐 바늘처럼 따갑다. 해마다 조금씩 일찍 찾아오는 여름, 해마다 조금씩 더 더워지는 이상기온도 걱정인데 폭우까지 내리니,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바쁘기도 하다. 어서 지구의 위독한 상태를 알리고 환경사랑의 문화를 가꾸고픈 ‘착한 욕심’이 앞서는 까닭이다. 그것도 ‘말’이 아닌 한 편의 멋진 ‘예술품’으로서 폼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