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채식주의 선언

# 먹는 것도 윤리학

열 살때부터 아침에 삼겹살 구워먹고 등교하던 아들이 며칠 전 폭탄선언을 했다. “엄마, 저 앞으로 고기 안 먹을래요.” “왜?”  “학교에서 다큐멘터리 봤는데 너무 끔찍해서 못 먹겠어요.” “오~ 아들, 네가 채식주의자가 되겠다고? 엄마는 대환영이다만...진짜야?”  “네!”   “결심 단단히 해라. 우리나라에서 소수자로 살아가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니란다..”  

사실 난 믿지 않았다. 작심삼일이겠거니 했다. 근데 제법 완강하다. 아침에 고기먹고 저녁에 고기가 없으면 "반찬이 이게 다에요?"라며 못내 아쉬워하고, 여섯 살 아래 동생이랑 유치찬란하게 지우개 만한 고기 살점 놓고 쟁탈전을 벌이던 놈이다. 그런데 김치찌개에 야들야들한 돼지고기가 들어가도, 갈색의 윤기 도는 불고기가 있어도 젓가락도 대지 않는다. 외려 고기를 보면 자꾸 생각난다고 고개를 휘저으며 두 눈을 가리고 호들갑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고기타령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흐뭇하다. 사실 시험 백점 맞아 왔을 때보다 더 좋았다. 나는 아들이 남자이기 때문에 공부 못하는 것보다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 될까봐 걱정이었다. 나를 닮아서 눈물은 많지만 수컷 특유의 무심한 구석이 좀 있었다. 그대로 방치했다가 불쌍한 것을 봐도 가여운 줄 모르고 약한 것을 봐도 눈물 흘릴 줄 모르면서 공부만 잘하고 부지런하기까지 하면 최악의 인간이 되는 거다. 아들한테 늘 얘기한다. "MB를 봐라. 사유하지 않는 인간의 전형이다. 열심히 살지 말아야될 사람이 열심히 살면 나라까지 엉망된다고."  

요즘 <경철수고>를 다시 읽으면서 감성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다. 맑스가 비판했던 '소외'는 감성 소외고 '해방'은 감성해방이다. 소외를 벗어난다는 것은 인간적 감각을 창조하는 행위다. 분업을 통해 인간의 감각이 일면화 되었고 "우리는 어떤 물건을 우리 것이라고 느끼려면 반드시 그것을 소유해야만 한다."  "사적 소유의 세계에서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감각들 대신에 내가 갖고 있다는 감각이 근본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맑스는 모두가 돈이 공평히 가져야 한다'가 아니라 '존재의 풍부함이 부를 대체해야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따뜻한 감성과 윤리적 올바름은 필수적이다. 그래서 내 양육의 최우선 과제는 감성근육 기르기였다. 감성이 살아 있어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다보면 공부할 필요성도 느끼게 될 테니까, 조금 늦더라도 괜찮은 사람으로 클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최근에 학교에서 적성검사를 했는데 음악적인 능력이 제일 높고 그다음 친화력, 논리사고력 순으로 나왔단다. 성적표 받는 날은 머리 아픈데, 적성검사표는 희망찼다. 암튼 좁은 울타리에서 학대 받고, 신체 부위를 절단당하는 동물의 고통에 감응했다니 대견했다. 아들이 나보고도 그 비디오를 보라고 권유했다. 나는, 여자는 빈혈이 있어서 고기를 좀 더 먹어야하기 때문에 엄마는 당분간은 안보겠다고 둘러댔다. (휴우~)  

#  웃고 느끼고 사랑하고  

자식사랑도 기복이 있다. 요즘은 아들 키우는 재미가 솔솔하다. 한참 딸의 재롱에 빠져서 아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는데 새삼 귀엽다. 키가 나보다 커버린 뒤로는 껴안거나 뽀뽀하기 어려운 여건이다. 그래서 잘 때 몰래 한다. 잠을 하도 잘 자니까 기회가 많은데, 입을 헤 벌리고 자고 있으면 가서 얼굴도 찬찬히 뜯어보고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뺨에 뽀뽀해준다. 또 아침에 깨울 때는 엉덩이 부분 팬티를 내려서 북처럼 두드린다. 엄마의 성희롱에 놀라 기겁을 하고 일어난다.  

아침에도 등굣길에 사랑의 인사를 잊지 않는다. “잘생긴 아들아, 얼굴값 하고 와라~” 푼수처럼 이 대사를 수년간 남발하는데 아들은 싱긋 웃으며 못들은 척 한다. 그게 좀 식상하면 "밥 많이 먹고 와라"로 대체한다. 그런데 속마음은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 앞집에 할머니가 가끔 시골에서 올라오신다. 아침마다 손자손녀를 학교 보내면서 엘리베이터 앞에까지 따라 나와서는 과일도 한쪽이라도 더 먹이고 꼭 큰 소리로 애정표현을 하신다. “**야, 사랑해~” 현관문을 뚫고 들려오는 사랑의 화살에 움찔 놀라면서도 나는 마냥 부러운 거다.  

그렇다고 나까지 큰소리로 그러기는 민망해서 묘안을 생각했다. 수화로 하자! 현관문 반쯤 열고 아들이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걸 보면서 두 손을 정수리에 꽂아 하트를 그린다. 처음에 아들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푹~”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쑥스러워서 그러나보다 그랬다. 며칠 간 계속됐다. 바람이 심한 날, 잠 못 잔 날 빼고는 하트로 친히 배웅했다.

오늘도 수화 인사를 하는데 아들이 “엄마, 좀 웃겨요” 그런다. “왜? 손발 오글거리냐? 이게 어때서? 엄마가 아들 사랑하는 건 당연한 건데..뭐.” 나는 아들이 단지 어색해서 그러는 줄 알았다. 그랬더니 그게 아니라 거울을 보니 내 꼴이 우습기는 했다.  

이번 겨울에 내복을 애용했다. 분홍내복을 상하로 차려입고 집안을 활보하던 날, 딸내미가 말했다. “엄마, 꼭 내복 모델 같애!”  내가 봐도 나한테 잘 어울렸다;; 보온메리가 추리닝이나 잠옷보다 편하고 따스해서 요즘도 잘 때는 내복바지로 갈아입곤 했다. 윗도리는 반팔이나 낡은 긴팔 티셔츠를 착용했다. 그랬더니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도 부스스, 무릎 나온 분홍내복에 목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있는 셈인데, 얼마나 심난했을까.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 그 복장을 하고는 현관문 열고 서서 머리에 하트를 그리고 있었던 거다. 

내일부로 내복과 안녕이다. 빨아서 서랍에 넣어둬야겠다. 안 그래도 아들은 '엄마 일하러 갈 때는 아가씨같고 집에 있으면 아줌마 같다'고 말하곤 했다. 이번 겨울 나면서 스타일 확실히 구겨졌지만 뭐, 괜찮다. 아들이 웃으면서 학교 가는 걸 보니 마음이 좋았다. 느낄 줄 알고, 웃을 줄 알고. 거기다가 공부까지 잘하길 바라면 나는 지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