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났는데 내가 살 테니까 맛있는 거 골라 봐. 아네요. 선생님. 연락 못 드린 죄도 있고.. 제자가 모셔야 도리죠..
여기 음식 잘 나온다.. 다 내 취향이네.. 그쳐? 절음식처럼 정갈하고 맛나더라고요. 왠지 선생님이 좋아하실 거 같았어요. ^^
산채 한정식을 한 상 앞에 두고 반찬만큼이나 다양한 오방색 빛깔의 정담이 오갔다. 4년 6개월 동안의 해직교사 생활 이야기. 공부에 미련을 못 버린 사모님이 유학 간 이야기, 혼자서 아이 데리고 전교조 사무실 다니면서 육아한 이야기. 책과 대화로 키운 아이가 사교육 없이 외고에 가고 전액 장학금 받고 미국으로 유학 간 이야기. 아흔 넘은 노부와 함께 사는 이야기. 그리고 나의 남편과 아이들 사는이야기 약간까지. 드라마에서 내레이션으로 사건을 정리하듯이 주요 흐름만 짚어 17년의 공백을 메웠다. 사실 별다른 장황한 설명 없이도 짧은 단어 몇 가지만으로도 선생님의 지나온 삶이 훤히 읽혔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의 만남임에도 세월의 단절을 느낄 수 없었다. 아랫목에 앉은 것처럼 마음이 노곤해졌다. 대화가 물 흐르듯 이어졌다.
선생님도 저도 그대로 같은데 아이들이 너무 컸어요. 실감이 안 나요. 17년 동안 냉동됐다가 해동된 거 같아요.ㅎㅎ
그러게 말이다.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니? 선생님이 아실만한 친구 중에 영란이만 연락하고 지내요. 영란이 기억나시죠? 삼성 다니던.. 응. 알지. 영란이 그 때 노조 만들려다가 문제생겨서 그 일로 회사 그만두고 공장에 들어갔는데 위장 취업한 남자랑 결혼했어요. 제적당했던 남편은 복학해서 졸업하고는 먹고살기 위해 광주에 내려갔죠. 남편이 논술강사로 이름을 날려서 서울까지 유명학원으로 스카우트 되고 지금까지 꽤 잘 나가요. 그런데도 고액과외는 안 하고 단체로만 강의하면서 논술을 빙자해 아이들 의식화 교육도 하고.. 영란이는 남원으로 귀농해서 지역운동하고 있고요. 다른 친구들은, 관심분야가 다르니까 점점 멀어지고 연락이 끊기더라고요. 아주 가끔 봐요.
그렇지. 삶의 지향이 다른데 어울리기 힘들지. 아이를 외고 보내니까 부모가 교사인 집은 우리아이 밖에 없더구나. 계급이 세습되는 것이 실감나더라고. 계급 안에서만 자기들끼리만 어울리고 또 거기서 결혼까지 하잖아. 나는 이것을 계급적 근친상간이라고 불러. 다양한 문화가 섞이지 못하니까 사회가 기형적으로 돼가고 건강성을 잃게 되고. 이제 학생들이 공장에 들어가서 같이 공부하고 삶을 나누는 일은 우리세대가 마지막일 거야.
너무 아까워요. 수십년간 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으로 이룩한 건데 하루아침에 무너졌잖아요. 계급적 근친은 저도 목동에 살면서 많이 느껴요. 아기였을 때부터 본 아이들이 아빠의 재력과 엄마의 정보력, 매니지먼트에 힘입어 영재로 길러지고, 온갖 영재 선발기회를 독점하고 대치동으로 과외 다니면서 특수교육 받고 과고나 특목고 척척 들어가잖아요. 저 애들이 커서 교수되고, 고위공무원, 의사, 판사 같은 요직은 다 차지할 텐데 대한민국의 상류층이 이렇게 길러지는구나 실감해요. 저렇게 앞뒤 차단하고 부모 보호 아래서 공부만 한 아이들이 사회봉사 점수는 잘 받아도 ‘없는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겠나 싶더라고요. 그러니 촛불집회 나온 시민들이 배후세력에 매수당했다는 발언이 나올 수밖에 없나봐요.
# 도꾸리와 해물모듬꼬치
근처의 일식주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도꾸리와 해물모듬꼬치를 시켰다. 붕어 입만큼이나 입구가 조그만 술병에서 뜨끈한 술이 졸졸 흘러 소꿉장난 같이 작은 잔에 가득 담겼다. 왠지 술이 눈물같다고 생각했다.
요즘 행복한 일은 뭐고, 힘든 일은 뭐니 ?
행복한 거는 책 보고 글 쓸 때! 힘든 일은.... 음, 지금은 크게 없어요. 예전엔 가족 땜에 돌아가면서 힘들었는데. 3년 전에 엄마 돌아가셨거든요. 가난한 생활도 적응해서 잘 살고요. 지금은 다 아득해요. 인생에 대해 큰 미련도 없고 지킬 것도 없고 삶이 가벼워졌어요. 홀가분해서 좋아요.
많이 힘들었겠구나. 원래 힘든 일은 한 꺼 번에 오더라. 옛날 어른들 말씀이 맞아. 나도 해직되고 동생 아프고 아버지 입원하시고...한참 힘들었어. 이 고통이 언제 끝나나 싶더구나.
맞아요. 터널이 안 끝날 거 같았어요. 이제 끝이겠지 싶을 때 한 번 더 추락시켜주더라고요. 이정도의 고통은 받아주마 오만하게 굴다가 피눈물 흘렸죠; 한동안은 온통 다 짐처럼 느껴져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어요. 남편은 그 옛날에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한없이 낯설어서 당황스럽고. 연민에 증오에 막 뒤엉킨 이 감정이 뭘까 혼란스러웠어요. 지금은 서로 자유롭게 살아서 좋아요. 공산-부부됐어요. 인간의 번뇌가 꽤나 물질적이잖아요. 서로 벌어 서로 쓰는 생활이 정착되니까 웬만큼 인정하고 배려하고 적응됐어요. 싸울 일도 별로 없고 싸울 만큼 애정이 없는 거 같아 서운하기도 하고.
그런데 부부가 싸우는 건 참 중요해. 잘 싸워서 그 과정에서 터놓고 자기를 드러내야지. 상대방에게 자기 생각도 말하고 상대의 의견을 듣기도 하고 협상도 하고. 나는 워낙 말이 없는 편인데도 나중에라도 꼭 서운했던 걸 얘기해. 서로 알려줄 의무가 있어. 그래야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고 지킬 부분은 지켜주지. 나쁜 이별이 (좋은 이별은 없는 것 같더라) 나쁜 지속보다 좋다고 하잖니. 지혜롭게 풀어가고 사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보렴.
# 도꾸리 한 병 추가
도꾸리를 한 병 더 시켜놓고 우리는 '작업'에 대한 얘기로 이어갔다. 선생님은 소설을 본격적으로 써보려고 대학원에 진학한 이야기와 어떤 소설을 썼고 쓰고싶은지 얘기를 들려주셨다. 나는 인터뷰 위주로 일 하면서 블로그에 소소히 글 쓰고 있고, 그것이 무엇이든 마음에서 뭔가 솟구쳐 쓰고 싶어 미칠 정도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저는 소설이나 시는 아니고 르포문학이 제일 적성에 근접하거든요. 근데 장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용이겠죠. 더 공부하면서 세상 보는 눈을 키우고 인간 이해가 깊어져야 사리같은 정제된 글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젊은 혈기에 가슴에 출렁이는 것들을 일필휘지로 쏟아낼 나이는 지났고요..^^;
수유에서 공부는 언제부터 했니..재밌어..?
만 2년 됐어요. 지독히도 안 읽히던 책들이 이제야 조금씩 보여요. 공부가 즐거워요. 대학에 가서 문학이나 철학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볼까 고민도 했는데 스스로 납득이 안 돼더라고요. 학벌사회에서 비전공자로 학번 없이 살기 많이 불편하긴 한데, 우리사회 지배질서의 척도를 넘어서는 공부를 하면서 저를 그 기준에 맞춘다는 것도 모순이고요. 대학 안 가면 공부를 못하는 것도 아니고 수유의 인문학 공부도 충분히 훌륭하고 스승과 친구들도 좋으니까요. 이력서에 한 줄 올려서 남들과 비슷해 지느니, 부족한대로 살자. 어떤 틀에 구애됨 없이 길에서 글쓰기를 배운 저만이 쓸 수 있는 걸 하자 마음 먹었어요. 비주류로 살아가기. 하나쯤 결핍을 갖고 사는 게 제 삶의 건강을 위해서도 좋은 거 같아요. 사람은 뭐가 불편해야 자꾸 생각하니까, 평생 예민하게 깨어 있을 수 있잖아요..
그래. 원래 결핍이 삶의 동력인 법이지. 그리고 수유 강사진이 웬만한 대학 교수진보다 훨씬 수준 높아. 공부할 곳 잘 정했다. 어느 대학 나왔다는 게 무슨 소용이니. 그건 과거의 낡은 지식이야. 지금 어떤 걸 배우고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오직 너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면 돼. 잘 생각했구나.
네. 열심히 해서 오십살;; 정도에는 좋은 책 한 권 써야지 생각하고 있어요..
내년에 마흔이지? 지나고 보니까 사십대가 황금기야. 그 전에 여러가지로 너무 어설펐어. 그제서야 애들을 가르치는 게 뭔지 조금 알 것 같더구나. 사십대에 제일 왕성하게 일했고 행복했어. 지영이도 이제부터 시작이네. 네 자신을 단련해서 힘을 키우렴. 권력이 나쁜 게 아니야. 교육계를 봐도 저들이 교장자리 차지하고 중요정책을 다 결정하니 속수무책이야. 힘을 길러서 가치 있는 일에 잘 쓰는 게 중요하겠더라고.
컴컴한 산에서 우두커니 앉아있다가 손전등도 들고 지도도 갖고 초콜릿도 있는 전문산악인을 만난 기분이다. 든든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집에 왔다. 오밤중에 친구한테 전화해서 한바탕 보고대회 겸 수다를 떨었다. “선생님이 대학 때 한동안 절에 계셨다더라. 어쩐지 예전부터 내공이 달랐어. 세속을 절간처럼 사셔서 그런지 얼굴이 완전 그대로야. 아니 수행자같아. 더 깊어지셨어.” “그럼~ 돈과 명예만 쫓은 사람은 오십이면 얼굴에 다 드러나게 마련이지.” 친구가 맞장구를 친다. “산채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선생님이랑 너랑 코드가 아주 비슷해. 나중에 선생님이랑 같이 만나자~"
# 햇살 담은 아침편지
아침이 밝았다. 거실유리로 햇살이 가득 들어찬다. 정태춘 박은옥의 시디를 걸어놓았다. 햇살 같은 음악이 흐르는 평화로운 오전의 공기를 만끽하며 컴퓨터를 켰다. 밀린 에세이를 썼다. 글을 한 바닥 쓰고 메일함을 열었다. 편지가 와 있다. 선생님이 1교시 수업이 없으셨나보다. 늙은 제자가 안쓰러웠던지, 내가 글을 쓰고 있던 그 시간에 선생님도 같은 햇살을 배경으로 짧은 편지를 쓰셨다. 한 줄 한 줄 읽는데...눈물이 강물 됐다. 그냥 슬프고 기쁘고 두렵고 행복했다. 그동안 살면서 별 욕심 없었는데, 잘 살고 싶어졌다. 선생님의 편지로 인해.
잘 들어갔니?
17, 8년 뒤 만나 너와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니
우리가 먼 시간여행을 갔다 온 것 같더구나! 지금도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고.
고생 많았다! 그 고생이 너를 깨우고, 키우고, 더 잘 살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구나! 한 가지 네 삶에 더 보태고 싶은 말은, 꿈을 더 크게 갖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살았으면 한다. 네가 하는 일을 전반적으로 점검하면서 방향을 어느 쪽으로 할 것인가, 더 갖출 것은 뭐고 버릴 것은 뭔가 살펴보고. 네가 하는 일이 그 분야에서 최고 수준에 이를 수 있도록
너를 단련시키고 더 끌어올렸으면 좋겠다.
모처럼 만났는데 예의 그 훈장 습을 버리지 못해 잔소리를 했구나! 직업병이니 이해하고…^*^
답답하고 잘 안 풀릴 때, 좋은 일 있을 때, 술 한 잔 먹고 싶은 때, 그 밖에…. 연락해라!
